D-7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봉사하러 가기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순례자 사무실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게 된 날짜도 9월로 컨펌받았겠다 조금씩 짐도 싸고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새 8월 말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더운 여름에 지쳐갈 무렵이었지만 그나마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러 곧 떠난다는 설렘이 인생에 몇 방울 추가되어 그 더위마저도 때론 즐거웠다.
너무 길지도 않고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2주일간을 위한 짐을 싸며 작년 이맘때 순례길을 준비하는 행색과는 너무 다른 게 참 우스웠다지. 그때는 지구의 어디에서라도, 아무 곳에서라도 잘 수 있는 삶을 위한 실질적인 짐들이었는데 이번에는 헤어드라이기, 치마와 블라우스, 삼각대 등 그저 길게 여행 가는 여느 아낙네의 짐목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겨우 일 년 사이에 순례자로서의 내 모습은 아주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이런이런… 정신 차리러 조만간 순례길 한 번 더 걸어야겠다. 여하튼 웃음이 나온다.
그나저나 자원봉사자를 관리하는 순례자 사무실의 코디네이터와 이메일을 주고받은 지가 한참이 지났는데 그냥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떠나도 되나?
이런 의문이 들 즈음 자원봉사 시작 일주일을 남기고 이메일이 도착했다.
친애하는 자원봉사자 여러분
9월 3일 오후 2시에 자원봉사자들의 쉼터가 될 산 라사로 알베르게에서 여러분을 뵙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날 여러분을 만나 뵙고 순례자들에게 좋은 봉사를 하시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부 인사드립니다.
아 다행이다. 나 떠나도 되는 거구나. 자원봉사자로 가는 건 처음이라 메일이나 일정 컨펌 등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건지 이게 확정된 게 맞는지 아닌지 등등 괜스러운 두려움에 혼자 조급해졌나 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처음 해보는 일들에 대해 괜한 걱정이 는다. 이렇게 짧은 메일로나마 나의 산티아고행이 확실해진걸 누차 확인한 다음에야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새로운 걸 시도하는 건 즐겁고 가슴을 뛰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매우 신나 있는 나를 발견한다.
마흔 번째 생일 어디로 가고 싶어?
신랑이 나에게 물었다.
“마흔 번째 생일은 어디로 여행하고 싶어?”
산티아고에서 자원봉사를 하기로 한 건 순전한 나의 아이디어였지만 어쩌다 보니 꽉 차있는 봉사자들 슬럿 중에서 그나마 내 생일을 아슬하게 비껴가 고를 수 있었던 게 9월 3일부터 시작하는 2주간의 기간이었다. 그래도 나름 마흔이면 큰 생일이기에 나도 신랑도 어디든 좋은 곳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자원봉사는 사실 좀 갑작스러운 결정이긴 했지. 게다가 봉사 일정이 내 생일과 너무 가까워서 (실제로 봉사 시작 하루 전날) 가능한 가까운 곳으로 선택지가 줄어들었고 그것도 내 여정에 부담 안되게 이탈리아 안에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평소에 너무 좋아하는 피렌체로 빠르게 2박 3일 정도 다녀올까? 그러면 생일 아침까지 피렌체에서 맞이할 수 있고 밤에 돌아와 바로 산티아고로 출발하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면 몇 달 전에 다녀와서 푹 빠진 시실리로 다시 가보는 건 어떨까? 그것도 아니면 한 번도 안 가본 토리노는 또 어때?
정말 생각을 많이 했지만 내 생일 당일까지 비행기를 타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건 행복한 기억보다는 바쁘고 피곤했던 기억을 더 많이 만들 것 같아서 이상적이지 않았다.
나랑 같이 산티아고에 가자!
순례길을 걷고 언젠가는 신랑에게 꼭 한번 보여주고 싶었던 그 산티아고, 이게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그 생각을 못했네. 이렇게 완벽한 기회가 어디 있어! 어차피 나는 생일 다음 날에 무조건 산티아고에 도착해야 하는 거고 내 마흔 번째 생일을 보내기에 작년에 완주한 산티아고에서 신랑과 함께 축하할 수 있다면 이보다 의미 있을 수 있을까.
순례자로서 도시에 의미를 부여하는 걸 제외하고도 난 개인적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도시 그 자체로 꾀나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다. 많은 여행지를 다녔지만 산티아고는 카톨릭에서 주요한 야고보의 시신이 있는 주요 성지이기도 하고, 대성당 자체도 예쁘고 맛있는 음식에 순례자들의 패기 넘치는 바이브에 더불어 멋진 공원과 이야기들까지 소소하지만 눈에 띄게 알찬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래! 산티아고에서 내 생일을 보내자!
신랑에게 나는 산티아고로 가는 게 여러모로 완벽하다고 생각한다하니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는 신랑은 나의 마흔 번째 생일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자고 승낙해 주었다. 덕분에 내 생일을 온전하게 신랑과 함께 보내고 다음 날 신랑은 비행을 하러 이탈리아로 떠나고, 나는 산티아고에 남아 자원봉사를 시작하면 되는 완벽한 일정이 만들어졌다.
이립과 불혹
이립(而立, 서른 살) : 자립을 의미하며, 이 시기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확고히 한다는 뜻
불혹(不惑, 마흔 살) : 흔들림이 없다는 뜻. 세상의 유혹이나 혼란에 흔들리지 않고 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임을 의미함
내가 서른 살, 이립이 되었을 때는 원하던 항공사에서 비행을 하며 ‘나는 덕업이 일치된 몇 안 되는 복 받은 사람이구나’ 하며 행복에 겨워했지. 외국에서 자립해서 살고 있었고 내가 하는 일과 삶에 대한 방향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던 걸 보면 난 공자의 정의에 따른 나름 괜찮은 삼십 대를 맞이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마흔이 되는 이번의 불혹은 어떨까? 세상의 소리에 덜 민감해지긴 했다만 그렇다고 안 흔들리는 건 또 아니고, 가끔 서툰 생각들과 판단을 하는데. 아마도 이립과는 다르게 제대로 된 공자 기준의 마흔 살이 되려면 아직 조금 더 살아야 할 듯하다.
뭐 세상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을 수는 없지. 완벽한 사람이 있으면 조금 부족한 사람도 있고, 더 빠른 사람이 있다면 살짝 늦은 사람들도 있기 마련. 이제 내가 조금 부족한 것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거 보면 아마도 제대로 된 불혹에 가까워지고 있는 거일수 있지 않을까 소망해 보며 여하튼 내 불혹 생일에 사랑하는 우리 신랑, 내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울타리와 함께 그렇게 산티아고로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