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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Sep 29. 2024

순례자에게 첫 콤포스텔라를 발급하다

Day 1 순례자 사무실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하는 날

2024년 9월 4일 수요일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 Day 1


순례길을 다시 걷게 되다니

 오늘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자 사무실에서 자원봉사자로서 첫 근무가 있는 날이다. 오후 2시까지 가면 되지만 버스 편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니 12시에 일찌감치 나가본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당최 붙어있는 시간표가 이해도 안 되고 버스가 그리 쉽게 올 것 같지도 않아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어제 가본 큰 쇼핑몰까지도 겨우 20분 거리었고, 그 몰에서 한 삼십여 분만 더 간다면 산티아고에 도착할 거기에 호기롭게 걸어가 본다.

 조금 썰렁한 날씨이지만 날이 아주 맑다. 밝은 햇살 밑에서 둘러보는 숙소 근처의 풍경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근데 말이야 여기 순례길이다! 이제야 여기가 어딘지 어렴풋이 자리가 잡힌다. 작년 산티아고 프랑스길을 걷는 마지막 날 도착 1시간 정도 전에 마주하는, 산티아고 도심에 도착해 간다고 느꼈던 그 지점이었다. 길을 따라 나있는 조개 표식들과 돌비석, 까미노 안내 표지판이 내 마음을 정말 설레게 한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순간이다


걷길 잘했어!


 마음이 두근두근, 코로 마시는 들숨이 커지고 빨라질 정도로 즐거웠다. 그렇다. 나는 지금 순례자들과 함께 산티아고 초입의 순례길을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작년의 추억이 마구 몰려오며 언니에게 보낼 사진을 찍으며 모든 걸음걸음을 즐기며 산티아고로 걸어가 본다.


성당이 보이기 시작하는 구간


 살짝의 언덕이 나오고 구시가지가 시작되며 집들 사이로 산티아고의 모습이 빼꼼 비치기 시작하는데 걸음이 자동적으로 멈춰진다. 내가 다시 이 길을 걷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분명 어제도 그저께도 산티아고 대성당이 보이는 시가지에 묵었지만 오늘은 좀 다르다. 아주 짧은 50여분 남짓의 여정이지만 모든 순례자들이 걸을 마지막 그 1시간 남짓의 순례길을 오늘 다시 걷다니 그저 감회가 새로울 뿐이다. 작년 순례자로서의 기억이 생각보다 선명함에 스스로 놀라며 자원봉사하러 가는 첫날 버스를 안 타고 이렇게 맑은 날 걸을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했다.


 

사람들로 가득 찬 산티아고 대성당 앞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도착해 잠시 앉아 성당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행복으로 가득한 순례자들을 보며 내 마음도 함께 행복해지는 경험을 한다. 내가 여기 산티아고에 있다니 오늘도 믿기지가 않지만 오늘은 지난 며칠과는 다르게 발을 옮겨 순례자 사무실로 향해본다. 입구에 줄 서 있는 순례자들을 보니 벌써 가슴이 뛴다. 정문 앞의 안내원분에게 새로운 봉사자라고 소개하고 내가 작년 콤포스텔라를 받았던 곳으로 들어가다니 뭔가 비현실적이다. 어제 만났던 몬세와 사브리나도 보이고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콤포스텔라를 발급하는 테이블 뒷 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순례자 사무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와… 이거 완전 비하인드 더 씬 같이 내가 마치 영화 촬영장이나 TV 촬영장 또는 공연의 백스테이지로 들어가는 그런 느낌이다. 이거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 곳으로 막 들어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긴장도 되고 신기하다. 몬세가 한국인이라고 나를 일하고 계시던 E 선생님께 소개해주셨는데 와! 너무 착하고 귀여우신 한국분이셨다. 언니라고 하라고 너무 친근하게 반겨주시는 데다 한국어로 콤포스텔라 발급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어 나야 너무 좋았지. 아쉽게도 E 선생님은 오후 2시경까지만 봉사하시는 거라 만난 지 얼마 안 돼 금방 인사를 드리고 헤어져야 했지만 오후 2시가 되어 또 다른 한국인 봉사자인 Kim 선생님이 바로 도착하셨다.

 이곳에서 직원들과 봉사자들이 킴이라고 부르는 이 김지영 선생님은 내가 자원봉사를 지원하기 전에도 까친연의 글들을 통해 들었던 분이었다. 산티아고에 현지 거주를 하시는 한국분으로 벌써 5년째 순례자 사무실에서 정기적으로 자원봉사를 하고 계신 킴선생님은 정말 ’ 천사‘셨다. 내가 선생님이라고 불러드리니 그냥 언니라고 부르라며 정말 편하게 만들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하던지. 한국인끼리 다 언니라고 부른다고 킴선생님도, 잠시 만난 E 선생님도 모두 언니라고 부르라고 해주시니 벌써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정말 성심성의를 다해서 가르쳐주시는데 조금 성급하게 도장을 찍거나 물어봐야 할 질문을 안 하는 등 실수하는 나에게 잘한다고 그렇게 배우는 거라며 용기를 붓돋아 주셨다. 영어에 큰 문제없이 자신 있는 편이지만 아주 세세한 뉘앙스가 중요할 때 이걸 한글로 듣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큰 차이가 아닐 수 없다. 다른 순례자들은 대부분 스페인어 아니면 영어로 다른 봉사자들이나 직원들한테 교육받았을 텐데 이 멀리 스페인에서 한국어로 콤포스텔라 발급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니 이미 시작부터 행운이 가득하다.


오늘의 배운 점

- 주로 사용하게 되는 언어는 절반 이상이 스페인어구나
- 스페인어를 못한다면 적어도 영어는 유창해야 한다
- 산티아고 포르토 길은 3가지에 따라 km 수가 나뉜다 (센트럴 240km, 센트럴 + 코스트 260km, 코스트 280km)
- 코루냐에 사는 사람들은 특별대우로 100km가 안되지만 주민에 한해 콤포스텔라를 발급해 준다
*** 코루냐 주민들들은 "카미노 잉글레스"의 전통적인 순례 경로를 유지해 온 역사적 배경이 있다고 한다. 이 경로는 과거 북유럽과 영국에서 배를 타고 온 순례자들이 코루냐를 통해 산티아고로 향했던 중요한 길이었기 때문에, 이 전통을 존중해 예외가 적용된다고 한다 ***
-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전면 금지되어 있다.
(누군가가 사진을 찍으면 죄송하지만 사진 촬영이 안된다고 안내해드려야 한다)


너무 다양해서 재밌는 이곳 순례자 사무실

 지금 이 안에는 한국, 이탈리아, 코스타리카, 미국, 스페인, 프랑스, 아일랜드 사람 등 각국의 인종이 섞여 열심히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콤포스텔라를 발급하고 있다. 하루 2천 명이 넘는 우리보다 더 다양한 인종의 순례자들은 각기 다른 거리와 길을 선택해  걷고 여기에 도착하셔서 울고 웃는 그 감정의 농도가 매우 짙고 행복하다.

 오늘은 저 멀리 멕시코에서 오셔서 짧은 거리를 걸으셔서 콤포스텔라를 발급 못 받으실까 걱정하시다가 발급받으신 다음 콤포스텔라를 가슴에 앉고 우시는 분도 계셨고, 어제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작은 웨딩마치를 올린 미국여자분과 스페인남자 커플도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분에게 콤포스텔라를 발급해 드렸을 때는 얼마나 반갑고 행복했는지 나와 지영언니를 보시고 너무 반갑다며 우시는 그분을 보며 길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우리가 그분에게 안도의 느낌을 드릴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벌써 반년째 세계일주를 하고 계시다는 이 한국 남자분은 산티아고에 조금 더 머무시며 그동안 길 위에서 만났던 고마웠던 분들의 도착을 기다렸다가 좋은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떠나려 한다 하신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순례길이 이래서 아름답다는 걸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단순히 내가 받았으니 돌려드린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힘들 때 또는 외로울 때 받은 조건 없었던 따뜻함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는 우리만의 정이 아닐까. 이분의 눈물에 나도 짠해서 함께 울었다. 크고 작은 순례길에서의 추억과 감동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곳, 이곳이 바로 순례자 사무실이구나. 나 정말 좋은 곳에서 이처럼 진귀하고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된 거구나 확신이 서는 순간이었다.


 나의 사탕 주머니

 오늘 순례자들을 위해 챙겨 온 사탕 주머니는 사브리나의 조언대로 누군가에 주어야 하는지 정말 정확한 느낌이 들 때 조금씩 비워갔다. 나와 우리 언니가 생각나게 하는 두 쌍의 여자 쌍둥이들을 봤는데 내 어찌 이를 지나칠 수 있을까! 20대 너무 예쁜 시절의 한 챕터를 쌍둥이 언니와 동생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걸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니 이들이 기특하고 꼭 언니와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사탕을 나눠주었고, 너무나 반가운 우리 한국분에게(오늘은 한 분 밖에 못 만났다.), 그리고 어제 결혼을 하셨다는 그 커플에게, 또 눈물을 흘리셨던 멕시칸 여자분에게 그리고 꼬마 아이들에게 정말 내가 줘야 할 사람이란 느낌이 오더라.

 사탕을 준비할 때 내 마음 같아서는 내가 콤포스텔라를 발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고 싶었는데 실제로 무리일뿐더러( 나는 오늘만 약 60개 정도의 콤포스텔라를 발급했다.)  약 16개의 테이블이 있는 순례자 사무실에서 나만 이렇게 무얼 가져가 나눠주면 너무 다른 직원과 봉사자들에게 민폐가 되거나 분위기를 흐리게 되는 거 아닌지 많이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직원분들도 그렇고 나를 가르쳐주시는 한국인 언니들도 그렇고 마음이 착하다며 오히려 귀여워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너무 다행이었다. 정말 이곳은 도착하는 순례자들과 소통하고 감정이 이입되는 순간들을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도록 모두가 응원해 주시는 신기한 곳이다. 다행히 오늘 꽉 채워온 사탕 주머니에 사탕이 몇 개 남긴 했다. 휴 부족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오늘 근무 5시간은 정말 빠르게 후다닥 지나갔고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입술이 바짝 말라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뿌듯하게 사람들과 소통하며 일했던 적이 언제였나 까마득한 게 아마 6~7년 전 비행을 했을 때가 마지막이었던 같다. 정말 비행할 때 승객분들이랑 소통했던 그때의 추억이 많이 떠오른다. 그땐 특정한 여행지로 향하는 비행의 설렘을 바탕으로 소통했다면 지금은 순례길의 여정과 완주의 짙은 감동을 바탕으로 소통하고 있다. 정말 오랜만에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며 내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번쩍 든다. 내가 이래서 비행을 좋아했었지, 나는 사람들에게서 충전받는 그런 사람이었음을 다시 깨닫는다.


에너지 10배의 선배님, 선생님, 언니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너무 재밌다고 하는 지영언니 (a.k.a. Kim, 김 선생님)는 스페인어와 영어, 한국어로 모든 순례자들과 긴 대화를 나누시는 에너지 넘치는 분이시다. 길은 어땠는지, 어떤 이유로 순례길을 걷게 되었는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지 때로는 친한 친구처럼 때로는 가족처럼 순례자 한분 한분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모습이 옆에서 보면 감탄이 나올 정도다. 나도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에 자신 있고 나름 호기심도 많은 편인 데다 내가 경험한 순례길과 관련된 열정과 희열을 공감하니 재밌긴 한데 그 에너지 수준이 이 언니를 못 따라간다. 적어도 내 열 배 정도의 에너지? 이건 내가 따라갈 수준이 아니라는 게 몇 시간 안 된 나에게도 확연하게 느껴진다.

 내가 작년에 콤포스텔라를 받을 때 순례자 사무실의 직원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이 언니는 모든 사람들과 이리 진심으로 긴 대화를 나누시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원래 이렇게 대화하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언니가 당연하다듯이 대답해 주신다.

 “이렇게 긴 길 걸어오신 분들 우리가 이야기 들어줘야지 누가 들어주겠어, 난 정말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아… 이 언니는 다르다. 콤포스텔라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랜덤으로 발급 창구, 즉 테이블을 배정받는데 이 언니에게 배정받으시는 분들은 참 행운이겠다 싶을 정도로 개인의 이야기를 말하게 만드는 힘이 있으신 분이다. 내가 긴 순례길을 걷고 지영언니에게서 콤포스텔라를 받았더라면 아마 울지 않았을까? 힘들었던 일, 기뻤던 일 꼭 자신의 일처럼 같이 기뻐해주시고 속상해주시는 이 언니에게서 순례자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배운다.

 가끔 내가 정말 필요한 순간, 맞는 장소에 서있는 듯한 순간들이 인생에 몇 번 있었는데 오늘도 그중의 하나다. 원하던 순례자 사무실에서의 콤포스텔라 봉사활동을 시작하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멘토를 만나 순례자들에게 더 뜻깊은 순례길이 완성되는 순간을 드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가지게 된 오늘이 참 특별하게 다가왔다. 늘 사람을 통해 사람에 대해 배우는 경험은 소중한 것 같다.


첫 콤포스텔라를 나눠줬던 오늘의 감상
자원봉사자로서의 첫 순례자 사무실 출근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5시간 동안 여럿의 순례자여권에 온 힘을 다해 공식 세요와 날짜 도장을 꾹꾹 눌러 찍었다. 내가 순례자였을 때도 순례자 여권에 도장 예쁘게 찍어주는 바나 알베르게, 교회 관계자분들에게 너무 고마웠었거든. 순례자들에게는 여권이 큰 의미가 있고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순례자 여권을 액자에 넣어 걸어두실 정도로 애착이 생기는 물건이 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장을 명료하고 반듯하게 찍어드리는 것! 오늘 두 손으로 꾹꾹 눌러 도장을 찍어드리며 “이게 마지막 세요예요, 축하드려요.”하고 함께 손뼉 치며 즐거워하다 보니 5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던 나의 자원봉사 첫날. 오래간만에 새로운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쉴 틈 없이 넘어간 것 같지만 그분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순간 그 자체가 나에겐 쉼이고 힐링되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오늘 말이야 너무 재밌고 너무 의미 있었어. 같이 일하는 분들도 너무 좋고 다 사랑스러우셨단 말이지. 사무실을 나와 다시 마주치는 오브라도이로 광장과 산티아고 대성당을 늦은 오후 나긋한 햇살 밑에서 바라보니 더 꿈같다.


오늘 행복했어! 내일은 더 열심히 해볼게! 내일 보자!

 마음속으로 대성당에 인사를 하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조개의 반대방향을 향해 걸어 나간다. 하루 종일 순례자들과 말하며 보낸 오늘은 벌써 꿀잠 예약이다. 오늘 나에게 콤포스텔라를 발급받은 모든 분들의 저녁이 행복하길 바라며 그분들 덕분에 나도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찰나의 시간들에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늦은 시간에도 들리는 우리의 그 백파이프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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