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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Oct 01. 2024

비카리에 프로(Vicarie Pro)를 아시나요

Day 3 순례자의 손을 잡고 펑펑 울다

2024년 9월 6일 금요일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 Day 3


비 오는 날 츄로에 카페 콘 레체 한 잔
비가 와도 순례자들을 막을 순 없지

 

 기온이 뚝 떨어진 데다 굵은 비까지 내리는 아침이다. 순례길을 걸으며 순례자 사무실로 걸어가는 하루의 시작이 너무 좋았는데 오늘을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도시로 들어왔다. 2시부터 근무 시작이지만 3시간은 더 일찍 숙소를 나서 산티아고 시내에서 간단한 아침식사 혹은 브런치를 즐길 생각에 즐겁지 뭐야. 비 오는 날을 참 좋아하는 나이지만 순례길을 걸을 때는 이런 비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말이야. 일 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비순례자로 평소와 같이 오는 비를 즐길 수 있음에 행복하려던 찰나 오늘 도착할 순례자들이 걱정된다.

 ‘아… 순례자들! 오늘 그분들 걷는 거 쉽지 않겠는걸. 성당 앞에서 사진 찍을 때 앉으실 수도 없겠네. 이거 비가 서서히 멈춰야 할 텐데.‘

 평소 이탈리아에서 살 때는 이런 생각까진 못하는데 나름 지금 산티아고에 있다고, 또 순례자 사무실에서 자원봉사하고 있다고 바로 순례자들이 걱정된다. 역시 나는 확신의 F인 순례자 예비군이다.


 오늘의 브런치로는 츄레리아 La Quinta에서 간단하게 커피에 츄로스를 먹기로 결정했다. 스페인 하면 어느 곳에서나 츄로스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의외로 아니라는 거 나만 느끼는 건가? 마드리드에서도 그 유명한 산히네스 말고 딱히 적당하게 먹을 곳도 없고 바르셀로나도 정말 작고 심플한 전통 있는 곳 한두 곳 빼고는 너무 흔하진 않단 말이지. 작년 31일간 순례길을 걸으며 츄로스 집을 만난 건 단 한번, 대도시 레온에서 스페인의 유명 초콜렛 브랜드 발로르에서 운영하는 카페에서 먹은 게 다였다. 이곳 산티아고도 마찬가지로 츄레리아를 검색하면 평 높고 좋은 곳은 겨우 두 곳 정도로 추려진다.

 

구글 평점 4.7의 츄레리아 La Quinta


 비를 뚫고 도착한 La Quinta는 깨끗하고 모던한 인테리어에 딱 봐도 한국인 스타일인 곳이었다. 테이블도 많고, 화장실도 깨끗한 데다 곳곳에 사람들이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는 게 오 이거 완전 한국 카페 스타일인 게 마음에 든다. 카페 콘 레체 큰 사이즈에 속을 필링으로 가득 채운 커다란 츄로스 중 종업원의 추천을 받은 초콜렛 커버에 바닐라 크림이 들은 츄로를 아침 식사로 선택했다. 예쁜 카페 언니에게 추천을 해달라고 하니 자기라면 무조건 초코 츄로에 바닐라 크림을 먹을 거라는 그 확신에 찬 목소리가 마음에 쏙 들었지 뭐야. 나도 비즈니스 클래스에서 일했을 때 가끔 손님들이 메뉴나 와인을 선택해 달라고 물을 때 저리 확신을 갖고 이야기했었거든. 사실 우리가 정말 베스트를 선택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을 때 관련된 사람의 확신을 주는 말을 들으면 내 고민을 덜어줘서, 또는 그 사람이 당당한 태도가 즐거워서 웃음이 날 때가 있었든. 그냥 그녀를 보며 내 옛날 생각이 나는 게 기분이 좋았다.

 

 

바닐라 크림으로 속을 채운 초코 츄로와 카페 콘 레체, 아메리카노와 미니 츄로


 자리로 배달된 츄로스는 종업원 언니가 추천한 대로 정말 맛있었다. 바삭한 초콜렛 코팅의 달기도 적당했고, 속에 바닐라 크림이랑 어울려 고급진 맛이었다. 생각보다 스페인 사람들 음식을 너무 달게 해서 먹지 않는단 말이지. 부드러운 카페 콘 레체까지 더해져 완벽한 브런치였다. 내 기준으로 커피는 살짝 연한 느낌이었지만 아메리카노로 마시면 딱일 것 같아서 조금 더 머물며 스페인어를 공부하다가 아메리카노도 한 잔 시켰지. 그런데 귀엽게도 기본 추로스가 하나 함께 나왔다. 아마 오후시간대에 커피 주문을 하면 추로스 하나가 맛보기로 나오는 것 같다. 이리 귀여울 수가. 이곳에서 여유롭게 머물며 오늘 순례자들과 대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짧은 스페인어들을 정리하고 내친김에 이탈리아어로도 써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밖에 비는 오고 내 손에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비 오는 날의 평온한 오후이다.


비카리에 프로(Vicarie Pro)라고 아시나요?

 오늘도 다행히 지영언니가 봉사를 하시는 날이라 옆에 앉아 많은 것을 배웠다. 이야기를 해도 끝이 없는 재밌고 친절하신 언니 덕분에 봉사를 하는 게 두어 배는 더 즐겁게 느껴진다.

 오늘 새로운 걸 배웠는데 바로 비카리에 프로(Vicarie Pro)라는 것. 난생처음 듣는 거였는데 비카리에 프로는 순례자가 다른 사람, 특히 병으로 아프거나 고인이 된 사람을 대신해 순례를 걸었을 때 콤포스텔라에 추가되는 문구로 이는 중세부터 이어진 전통으로, 타인의 영혼을 위한 기도나 헌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콤포스텔라를 발급받을 때 누군가 비카리에 프로로 발급해 달라고 하면 그분은 순례길을 어떤 특정한 분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추모하며 걸으신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 순례자 사무실에서는 순례를 하신 분의 이름이 적힌 콤포스텔라에 검은색 펜으로 비카리에 프로라 적고 헌정 대상이신 분의 성함을 정성껏 적어드린다. 아… 이렇게 순례길이 누군가를 추모하면서 걷는 길이 될 수도 있지! 작년에 프랑스길을 함께 걸었던 영국신사 이안이 생각난다. 어머님을 몇 년 전에 잃고 그분을 기억하며 걷는 길이라고 하셨는데 이안도 비카리에 프로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콤포스텔라에 비카리에 프로를 잘 받아가셨길 바라는 마음이 짧은 순간에 훅 지나갔다.

 

 지영언니가 어느 순례자에게 비카리에 프로를 발급해 드리며 내게 설명해 주신 덕에 잊지않게 잘 메모를 해놓았는데 세상에나 퇴근을 한 시간 남긴 6시 남짓 내가 비카리에 프로를 발급해드려야 하는 순간이 와버렸다. 쿠바인인 젊은 여성 조아나는 정말 밝고 환한 얼굴로 내 테이블에 왔다. 순례자 사무실이 더 일찍 문을 닫는 줄 알았던지 급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정말 내가 이걸 해낼 줄 몰랐다며, 믿기지가 않는다며 기쁨에 차 중얼거리는 조아나를 보며 난 여느 젊은 순례자의 환희와 안도감을 보았단 말이지. 그런데 순례자 여권을 확인하고, 콤포스텔라 발급을 시작하면서 그녀가 죽은 사람에게 헌정하고 싶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바로 비카리에 프로를 언급하는 거였다. 그때부터 울기 시작한 조안나를 보며 나도 같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일어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누구를 위한 거냐고 물어보니 그녀의 대답에 내 마음이 무너져버렸다.


 내 남편을 위한 거야.

  

  아… 나보다 더 어려 보이는 이 젊은 친구가 죽은 남편을 애도하며 그 먼 길을 걸어온 거라니… 짧은 순간에 이탈리아에 있는 우리 신랑이 생각나며 남편을 잃고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걸었을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슬픔의 무게를 지고 걸었을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한참을 울었다. 그런데 조안나는 슬픔에서 우는 게 아니었다. 정말 행복한 얼굴로 울면서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남편과 2년 전에 함께 오려고 했었는데 암으로 인해 못 왔고, 나 혼자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해냈다고 행복하다고 계속 말한다. 너의 신랑이 널 지금 엄청 자랑스러워하고 있을 거라면서 그녀를 안아줬다. 나는 테이블 건너 반대편에 서있는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따뜻하게 내미는 손과 다정한 말이 다인 줄 알았는데 지영언니가 긴 게 늘어진 테이블들을 돌아가 그녀를 안아주는 모습을 보고 ‘아 우리도 그렇게 해도 되는구나!‘ 너무 다행이다 싶었다. 나도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 싶어 조심하고 있었으니까. 너무 인간적인 지영언니 덕분에 나도 마음 가는 대로 테이블들을 돌아 나가서 그녀를 안아줄 수 있어 너무 다행이었다.

 

 이때 조안나가 고맙다며 우리와 사진을 같이 찍고 싶다고 했다. 나는 또 초짜 봉사자로서 요 며칠 배운 ‘사무실 안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라는 조항이 번뜩 생각나 지영언니를 쳐다봤더니 언니가

”그래, 얼른 찍어도 돼. “

 라고 해주신다. 조안나와 함께 사진을 찍고 헤어진 뒤 나중에 알고 보니 언니가 테이블을 돌아 다시 자리로 돌아가실 때 이미 직원들에게 조안나의 상황을 이야기해 둔 것이었다. 비카리에 프로는 하루에 몇 건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매일 받는 이삼천명의 사람들의 수에 비하면 극소수이고, 그들의 슬픔과 헌정에 대해 사무실 사람들은 연민과 존중으로 그분들을 대하고 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리가 서로 마음을 나누고 이해받으며 동시에 응원을 받은 흔치 않은 온기 가득한 경험임은 분명했다.

 그녀의 콤포스텔라에 남편의 이름을 검정펜으로 써주며 예전에 한참 꽂혀 연습했던 카퍼플레이트 캘리그래피를 더 공부해 둘걸 후회가 막 몰려왔다. 원래 서체, 팬맨쉽에 관심이 많은데 한글은 아주 마음에 잘 들게 써도 매번 사용하는 게 아닌 영문체는 아직 약하거든. 덜 배운 캘리그래피에 대해 지금 산티아고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후회를 하게 되다니 세상일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오늘 저녁은 숙소에 가서 영문 필기체 특훈이다! 순례자들의 소중한 비카리에 프로에 더 바른 글씨로 나의 존경하는 마음도 담고 싶은 생각에 의지가 불타오른다. 그녀를 떠나보내는 건 쉽지 않았으나 조안나가 우리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공유해 줘서 어찌나 감사하던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누군가와 속을 터놓기 어려운데 먼 길을 걸어와 생판 모르는 남인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거. 매 순간이 마법 같은 이곳이 바로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인 것 같다.


 와인 대신 커피로 대신하는 인사

 5시간의 근무를 마치고 의미 있었던 하루를 마무리한다. 순례자에게 첫 비카리에 프로를 발급한 날이었고, 한 순례자가 다른 순례자의 지갑을 발견해 사무실에 가져다주는 선함을 본 날이기도 하다. 작년 순례길에서 함께 걸은 J 씨도 잃어버렸던 핸드폰을 다른 순례자가 찾아 준 적이 있는데 순례길의 선함은 돌고 돌아 베풀 때도 받을 때도 있는 무한한 행복의 고리인 것 같다. 사진을 찍고 싶어 했던 조안나에게 예외를 허락했던 순례자 사무실의 착한 직원분들도, 순례자의 지갑을 어느샌가 경찰서에 달려가 잘 전달하고 온 지영언니도 나는 참 선한 사람들 안에서 정말 행복한 인생 공부를 하고 있는 선택받은 봉사자구나 오늘도 감사할 뿐이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을 지나갈 때 조안나 생각이 다시 났다. 한 시간 정도 뒤에 내 근무가 끝났을 텐데 와인 한 잔이라도 하자고 권할걸 그랬나 봐. 그녀의 벅찬 완주를 축하해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 오늘은 나 혼자라도 그녀의 완주와 돌아가신 그녀의 남편을 위해 어디선가 술 한잔을 들어 올리자 생각이 들어 띤또 데 베라노를 맛있게 만드는 타파스 집을 찾아갔는데 이런 아직 영업 전이다. 다른 타파스 집은 크게 안 당겨서 결국 언젠가 한 번은 들려야지 했던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 집 Lisbon Natas Ateliê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에 나타 두 개를 시켜 비 오는 날의 커피로 대신하며 아쉬움을 달래 본다.

 비록 술은 아니었지만 커피잔을 받아 들고 조안나와 그녀의 남편 프란츠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앞으로 그녀가 더 행복하길, 본인도 믿기 힘들 정도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순례길 완주를 한 그녀 앞에 더 큰 즐거운 기쁨과 놀라운 성취들이 있길 바라본다.


Lisbon Natas Ateliê


  일할 때는 긴장도 하고 집중해서 그런지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있다가 순례자 사무실에서의 일과가 끝나면 갑자기 배고픔이 말 그대로 도적떼처럼 몰려오는 기분이다. 커피를 마시며 잠시 생각을 하다 나타를 먹기 시작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허겁지겁 끝내버렸다. 그래 매일 5시간 동안 순례자들과 마음을 담아 소통하는 게 보통일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그나저나 나 에그타르트 정말 좋아하는데 이 집  나타 좀 만들 줄 아네? 배고플 때 말고 배 적당히 차있을 때 한 번 다시 와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아일랜드인 캐슬린이랑 프랑스인 마리도미닉, 이렇게 두 할머니와 함께 부엌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오늘의 일과에 대해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마리도미닉은 베트남에서 왔다는 매너가 매력적이었던 남자분과 이것저것 콤포스텔라의 기록을 바꿔달라고 했던 이상했던 중국인 이야기를, 나는 조아나의 비카리에 프로 이야기를 공유했다. 처음에 차가워 보였던 이 할머니들도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이야기를 함께 하니 금세 가까워진 느낌이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순례길을 경험한 사람들이고 지금 여기서 또 다른 방식으로 순례자들과 소통한다는 공통점에 무슨 이야기를 해도 참 재미있다. 같은 사무실에 있어도 각자가 맞이하는 순례자들도 너무 다르고, 우리가 얻은 감동과 교훈 또한 다른 게 신기하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더 늦기 전에 각자 잠을 청하러 들어가기로 했다.

 

 오늘도 참 감동이었던 하루였지 싶다. 많이 울었기에 내일 아침 부은 눈을 하고 출근하겠지만 정말 행복한 마음으로 잠을 청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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