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순례자로 통하는 마음
2024년 9월 7일 토요일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 Day 4
토요일의 순례자 사무실은 정말 바쁘구나
오늘도 아침 일찍 준비하고 길을 나서는데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가 낀 도시를 보니 작년 산티아고 순례길 마지막 날 언니와 길을 나서던 때가 생각난다. 그날도 안개가 정말 겹겹이 껴있는 게 산티아고까지 꿈길을 걷는 듯한 신기한 시간이었는데 말이야. 감정이 묘하다. 그립기도 하면서 지금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내 모습에 감동스럽기도 하고, 언니가 여기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침 8시 반 굴다리에서 들리는 백파이프 소리는 없지만 벌써 도착한 몇몇의 순례자들을 보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이곳이야 말로 잠들지 않는 도시가 아닐까 싶었다.
오늘은 또 다른 한국인 현지 봉사자 M 선생님을 뵈었다. 이곳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에는 오랫동안 일을 해오신 지영언니(aka. KIM)를 포함해 뒤이어 합류하신 E 언니 그리고 M 선생님 총 3분의 현지 한국인 자원봉사자가 계신다. 오늘 만난 M 선생님도 순례자들 한 명 한 명에게 동기와 느낀 점을 물어보며 마음을 다해 봉사하시는 걸 보니 정말 이곳의 한국인 봉사자들은 다 닮아계신 것 같다. 모두가 밝고 친절하시고, 순례자들을 위해 봉사하시는 걸 즐거움으로 하시는 분들이다. 세 분 다 스페인어를 잘하시기 때문에 더 많은 순례자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시는 걸 보며 나도 스페인어를 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영어로는 문제가 없지만 이곳에 오는 절반 이상의 순례자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하기에 내가 조금 미안한 느낌까지 드는 거 있지. 물론 나에게 왜 스페인어를 못하냐고 불평하시는 분은 단 한분도 없었고, 나 또한 최소한의 소통을 위해 스페인어로 인사나 물어봐야 하는 질문들을 다 정리해서 대화하긴 하지만 더 깊은 대화, 그분들의 여정에 진심으로 공감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한편으로는 아쉽다. 그래도 한국인 자원봉사자 선배님들이 스페인어로 멋지게 봉사하시는 모습을 보며 내가 다 자랑스러운 이 느낌이 싫지만은 않다. 많이 배우고 가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왜 이렇게 바쁘지? 토요일인 건 알겠다만 지난 3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초짜 봉사자라 아직 느린감이 있었겠지만 하루에 60~80개 정도의 콤포스텔라를 발급해 드린 것 같은데 오늘은 가뿐하게 100개를 넘겼다. 아주 바쁜 와중에도 순례자들과 조금이라도 대화를 이어가고 농담과 때론 웃음과 눈물을 함께하는 봉사자들의 역량이 빛나는 토요일이 아닐 수 없다.
조안나, 그녀가 돌아왔다
업무 끝나기 한 시간 전쯤인 오후 1시경에 너무나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원래도 12시 미사 전후는 순례자가 가장 많이 몰릴 때라 사무실이 시끌벅적 해진다. 여러 소음 속에서 내게 오는 분들과 나름의 대화를 이어가려 정신이 없었던 찰나였다. 그런데 어제 내게 처음으로 비카리에 프로를 부탁했던 쿠바인 조안나가 어느새인가 내 앞에 서있는 게 아닌가! 너무 반가워서 벌떡 일어났다.
“어제 너무 고마워서 다시 인사하려고 들렸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그녀를 다시 본 기쁨에 테이블 위로 한껏 몸을 당겨 그녀를 안아 주었다.
“나도 어제 네 생각이 계속 났어. 찾아와 줘서 너무 고마워.”
순례자들은 계속 오고 있었지만 이대로 그녀를 인사만 하고 보내면 어제처럼 후회할 것 같아서 급하게 전화번호를 물어보려다 아니다! 그걸 물어볼 시간도 없으니 그냥 약속을 정하자 싶어 말했다.
“너 혹시 약속이 없다면 내가 점심 대접해도 될까? 나 1시간 안에 끝나니까 이 사무실에서 다시 보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너무 좋다고, 자기도 내 생각이 참 많이 났다고 한 시간 뒤에 그럼 앞에서 보자고 한다. 너무 다행이다. 우리는 순례자로서, 아내로서, 비슷한 나이의 두 여자로서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제 만났을 때도 내가 그녀를 안아주었을 때 참 오래 알아온 사람처럼 그녀의 슬픔과 행복이 고스란히 전해진 참 특별하고 강렬한 만남이었다 생각했었다. 어제 너무 아쉬웠는데 오늘날 이렇게 다시 찾아와 주다니 어쩜 우리는 어제 한 번으로 끝날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그녀와의 약속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지막 한 시간은 더 즐겁게 순례자들과 콤포스텔라를 발급해 주며 보냈다. 일을 하면서도 조안나가 나를 다시 보러 왔음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너의 산티아고 완주를 위해 건배
오늘은 자원봉사 근무가 끝나자마자 사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다행히 어제와 다르게 오늘 산티아고의 날씨는 아주 맑음이다.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조안나는 더 이상 순례자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일반 여행자 같았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을 지나 타파스 바에 가려고 하는데 무슨 카니발 같은 행렬이 한창이네? 알고 보니 ’Festas da Ascensión‘라고 갈리시아 지역 전통을 기념하는 행사라고 한다. 그래서 ‘가이타’라는 전통 백파이프 연주도 하고 잘 발달되었던 농업 관련한 의상들도 입고 그런 거라고 한다. 축제 분위기로 한껏 들떠있는 대성당 앞에서 조안나와 함께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며 맑은 날씨의 산티아고를 제대로 즐겨본다. 성당 앞에서 그녀와 함께 순례길을 걸었던 몇몇 사람도 만나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사진도 찍으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늘의 점심은 내가 신랑이랑 함께 가서 너무 재밌고 맛있어했던 타파스 바로 조안나를 데려갔다. 일단 축배를 들기 위해 그녀가 아직 안 마셔봤다고 하는 띤또 데 베라노를 두 잔 시키고 타파스들을 고른 뒤 그녀가 좋아한다는 문어도 하나 따로 주문해 본다. 드디어 어제 못했던 그녀의 순례길 완주를 축하하며 ‘짠’하고 잔을 부딪히는 이 순간. 참 특별했다.
나보다 여려 보이던 조안나는 실제로는 위로 4살이 많은 언니였다. 44살이지만 그래도 신랑을 잃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기에 이야기를 듣는 내 가슴이 다 아프다. 그녀는 24살 어렸을 때 신랑을 만나 일찍 결혼하고 스위스에서 자리를 잡고 20년을 함께 했다고 한다. 15살의 예쁜 딸이 있는데 언젠가는 이 딸과 순례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그녀는 오늘도 행복과 확신에 차있는 당당함으로 빛이 난다. 비엔나에 사는 그녀에게 내가 9개월 전에 비엔나에 갔었다고 하니 다음번에 다시 오게 된다면 꼭 자기 식구들을 만나라고 한다. 작고한 신랑의 사진도, 너무나 예쁜 딸과 지금 비엔나에 함께하는 남동생 내외와 엄마 사진도 내게 보여주며 신랑이 병원에 입원하고 가장 힘들 때 가족들이 모두 자기만을 위해 쿠바에서 스위스까지 단걸음에 달려와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역시 가족의 힘과 사랑은 대단하다. 우리는 그렇게 앉아 우리의 순례길과 가족과 외국에서의 삶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순례자와 사석에서 즐겁게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실감이 안 났다.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에서의 경험은 매일이 정말 내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인 것 같다.
내가 그녀에게 대접해주고 싶었던 식사였기에 계산을 하니 그녀가 내일은 꼭 같이 술 한잔 하자고 자기사 사겠다고 자기의 산티아고 친구들과 함께 만나자 한다. 함께 걸었던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기에 초대는 정말 고맙지만 선약 있는 친구들과 최고의 시간을 보내라고 조심스레 말하고 돌아서는데 우리가 나눈 대화들로 이미 마음은 한껏 따뜻했다.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조안나가 나를 찾아와 주고 어제의 아쉬웠던 느낌을 오늘 함께 풀며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에 정말 감사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특히나 인연에 대해 연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편인데 오늘 보면 결국 만날 사람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있다. 우리의 의지가 더 중요할까 아니면 타이밍일까. 아마 둘 다 일수도.
맛있게 마무리하는 하루
순례길을 반대로 걸어 숙소로 가는 길 내내 그녀와의 만남에 대해 생각하였다. 정말 오래된 베스트 프렌드처럼 거리낌 없이 우리의 인생사를 나눌 수 있었다는 건 우리 둘 다 순례길을 걸었기에 가능했던 거였겠지. 내가 순례길을 걷고 또 그 이끌림에 다시 순례자 사무실의 봉사자로 와있었던 거, 조안나는 남편과 함께 걷기로 약속했었던 순례길을 혼자라도 걸어 완주하고 왔기에 만날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살면서 무조건 오래되었다고 더 친한 친구도 아니고, 나이 들어 만났다고 얕은 감정만 나누는 것도 아니라는 걸 느꼈다. 중요한 건 얼마나 깊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거다. 우리는 맞는 시간, 맞는 장소에서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맺어준 인연들은 참 다 소중하고 특별한 고유성이 있는 것 같아. 짧아도 깊고 진하다고 할까. 조안나는 그렇게 나에게 임팩트 있는 강렬한 친구가 되었다.
숙소에 와서 잠시 쉬다가 까르푸가 있는 몰로 다시 산책 겸 쇼핑을 나갔다. 벌써 5일 차 숙소 생활에도 아직 필요한 것들이 하나 둘 생기는 게 이놈의 날씨 탓을 해본다. 온도가 제멋대로라 도톰한 맨투맨이랑 잠옷으로 입을 운동복 바지를 하나 더 샀다. ‘설마 9월에 날씨가 그리 춥겠어’하고 날씨를 무시한 나의 멍청비용이라고 부르는 이 지출들은 한 때 승무원이었던, 지금도 여행을 자주 가는 프로 여행러로서 아주 창피한 수준이다. 거참 나 평소에 날씨 맞춰 기가 막히게 옷들 잘 챙기는데 말이야.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요즘 가끔 판단력이 떨어질 때가 생기는데 영 마음에 안 든다. 그래도 다행히 어딜 가던 다 같은 사람 사는 곳이라 멍충비용이란 이름 하에 지출로 그 부족함을 메꿀 수 있어 다행일 뿐이다.
쇼핑을 마치고 참새가 지나갈 수 없는 방앗간인 내 사랑 까르푸에서 신선한 과일들도 샀는데 우와 단돈 1.79유로(한화 2600원)였던 포도가 너무 맛있다. 거진 샤인 머스캣 급으로 맛있는데 씨도 없는 품종이라 2600원에 행복을 산 것 같았다. 소소한 걸로도 기뻐하는 날 보며 가끔 ‘그래, 이렇게만 살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은 내가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또 2600원짜리 포도에 행복을 느끼는 내 삶에 감사했던 날로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