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민주주의, 수평적 조직 구조, 꼰대 프리, 프렌드십 등등...온갖 좋은 이미지로 포장되어 있을 게다. 하지만 지난 8년여 간 미국계 다국적 기업을 다니면서 내가 발견한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제국주의다.
'다국적 기업에는 여전히 제국주의의 피가 흐른다.'
나는 지난 2월 중순 싱가포르가 락다운에 버금가는 서킷 브레이커 (Circuit Breaker)에 들어갔을 때부터 신규 시장 론칭 프로젝트를 떠 맡았다. 내심 기대했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이 아수라장 속에 설마 나한테 신규 시장 론칭 플젝을 그대로 진행하라고 하진 않겠지?" 하며...
하지만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당초 한국, 일본, 대만 3개국 장기 출장을 3월에 앞두고 있었던 난 졸지에, 출장은 날리고 대신 프로젝트는 그대로 진행하는 이중고에 처하게 됐다.
뿐만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로 각종 경제 지표, 주가, 환율, 에너지, 원자재 가격이 요동을 치면서 나는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왜비나 (Webinar)를 무려 3개나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시장 여파와 전망을 다루는 온라인 프레젠테이션 말이다.
덕분에 나는 친구도, 동료도 못 만나는 은둔형 외톨이 생활과 더불어 그야말로 제대로 '일폭탄'을 맞아 버렸다.
지난 4개월 간의 삶은 마치 감옥에 갇혀서 꾸역꾸역 쏟아지는 노역을 해야하는 고행의 연속이나 다름없었다.
스트레스는 하늘을 찌르고 멘탈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난 그래서 조깅을 시작했다. 새로 이사온 집 근처가 마리나베이 공원이라 바다도 볼겸 땀흘리며 스트레스도 날릴겸 매일매일 공원을 찾았다. 그리고 미친듯이 뛰었다. 매일 업무를 마치고 1시간씩. 땀을 흘리고 뛰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고행의 시간이 무르 익어 지난주 금요일 드디어 나는 신규 마켓을 성공적으로 론칭했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영국인 글로벌 헤드와 싱가포르에 있는 뉴질랜드인 아시아 헤드로부터 엄청난 칭찬을 받았다.
아시아 헤드는 이 어려운 시기에 신규 마켓을 론칭한 나를 치하하기 위해 사내 SNS 블로그에 홍보팀 검수까지 받은 사내 기사를 올렸다. 신규 마켓 론칭을 위해 화상회의를 하는 글로벌 프로젝트팀의 얼굴들이 나란히 나온 사진까지 함께 올렸다. 거기에 글로벌 70여개 오피스에 흩어져 있는 얼굴도 모르는 동료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다들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서킷 브레이커 기간동안 나 혼자 집에 갇혀서, 사람과의 왕래와 커뮤니케이션조차 금지된 철저한 고립 속에서 내가 지난 4개월간 얼마나 '개고생'을 하며 이뤄낸 성과인지를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에 파키스탄계 매니저에게 양해를 구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면대면 리서치가 불가능해 퀄리티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코로나 이후로 연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싸늘했다. 아니, 거기에 더해 내가 커버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마켓까지 덤으로 떠넘기면서, 나의 '비명'에 일폭탄으로 응수했다.
가뜩이나 정신적으로 힘든 고립 생활 속에서 일만 점점 늘어나자, 나는 그 위의 뉴질랜드 출신 아시아 헤드에게 'sos'를 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더욱 황당했다. 그녀는 파키스탄계 매니저를 내가 요청한 상담에 동석하게 했다. 결국, 나의 도움 요청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철저히 묵살되었다.
결과적으로 난 꾸역꾸역 온라인으로 리서치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신규 마켓 론칭이 100% 버추얼로 진행된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결국 나의 피와 땀이 모여 프로젝트는 기적적으로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대외 홍보용 기사엔 내 이름이 한줄도 나오지 않았다. 매주 열린 글로벌 컨퍼런스 콜에서 리서치 결과를 업데이트한 건 나 혼자 였고, 나머지 9명은 '감놔라 배놔라' 시어머니 노릇만 한 게 전부였는데. 결국 재주는 곰이 부리고 과실은 그들이 따 먹는 구조가 된거다. 뭔가 엄청나게 착취를 당하고, 성과를 갈취당한 기분 때문에 난 매우 화가 났다.
문득 '제국주의'란 단어가 떠올랐다. 제국주의. 사전적 의미로는 '특정국가가 다른 나라, 지역 등을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책, 또는 그러한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을 가리킨다. 엄밀히 정의하면 영향력, 즉 패권보다는 영역의 지배를 확대하는 정책 또는 사상을 가리킨다'.
난 내가 다니고 있는 다국적 기업이야말로 제국주의의 사상을 21세기까지 이어가고 있는 유일한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미국, 영국 등 서양권에 본사를 두고 있는 다국적 기업은 제국주의의 DNA가 가장 뚜렷이 관찰되는 식민지의 축소판이나 다름 없다.
이 먹이 사슬의 가장 꼭대기엔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있다. 그리고 그 밑엔 약간 변방 서양나라 출신의 지역별 헤드가 있다. 우리 팀 같은 경우엔 뉴질랜드 출신의 아시아 헤드가 있다. 그리고 그 밑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과거 영국 등 서양나라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름 영어권' 출신의 매니저가 있다. 그리고 그 밑엔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영어가 잘 통하는 아시아 나라의 매니저가 있고, 그 밑을 깔아주는 건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 출신이다. 이들은 오로지 실력으로 다국적 기업 문턱을 넘었으나 영어가 조금 달리는 관계로 유리천장에 부딪혀 착취당하는 필드워커 신세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영미권에서 오랜 이민이나 유학 생활로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 실력과 네트워킹 능력을 갖춘 아시안들은 제외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향된 사견임을 강조한다.
제국주의는 20세기에 끝났지만, 제국주의의 DNA는 '다국적 기업'이란 이름으로 21세기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지금의 다국적 기업의 모태는 영국의 동인도회사 처럼, 식민지에 회사를 설립하고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는 제국주의 국가의 '척식회사'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또 다른 형태의 '고급' 노예가 아닐까 싶은 씁쓸한 생각이 든다. 꼰대와 상명하복을 피해 나온 외국의 다국적 기업엔 또다른 형태의 불합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지구상 어디를 가든 밥벌이는 고통스럽고 치열한 '밥그릇 전쟁'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주문을 외운다. "멘탈갑이 되자."
제국주의의 피가 흐르는 다국적 기업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내가 강해지는 방법밖엔 없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바닥에 있지만 지지 않는 강인함으로 내일도 이 지리멸렬한 밥그릇 전투에서 최소한 밟히지는 말자는 다짐에서다.
사진출처: https://pixabay.com/ko/vectors/%EC%98%81%EA%B5%AD%EC%9D%98-%ED%8C%8C%EC%9D%B4%ED%84%B0-%EC%A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