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다. 난 오늘 아침부터 그야말로 제대로 빡쳤다. 늘 그랬듯이 파키스탄계 매니저 때문이다.
지난 글(다국적 기업엔 제국주의가 흐른다)에서 썼듯이 나는 지난 4개월 간의 재택 감옥살이 동안 신규 시장을 론칭했다. 개고생을 하며. 근데 그 와중에 이 매니저는 기존 포트폴리오에 더해 신규 마켓까지 커버하라며 일폭탄을 던지기까지 했다.
결국 나는 다른 아랫것들이 기본으로 커버하는 일주일 2개 시장, 5개 리포트에 더해 일주일 3개 시장, 7개 리포트를 신규 프로젝트 및 각종 코로나 관련 왜비나(웹 프레젠테이션) 4개와 함께 꾸역꾸역 감당해야 하는 지옥 고생길을 걸어 왔다.
그리고 지난 주 금요일. 성공리에 신규 시장 론칭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나는 그래도 조직에서 어느 정도 입김이 생겼다. 그래서 그 위의 뉴질랜드 출신 아시아 헤드한테 'SOS'를 쳤다. 실상은 SOS 보다 더한 최후통첩이었지만.
"기본적으로 한명이 감당할 수 있는 시장을 커버하는 게 논리에 맞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왜비나 4개에 장기 프로젝트 1개까지 반년동안 진행하느라 너무 번아웃 됐다. 나는 너의 추진력과 매니징 스타일이 마음에 들고 너랑 같이 오래오래 일하고 싶은데, 업무 로드가 너무 과도하면 그럴 수가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 들었을 것 같았다.
왠일인지, 평소 같으면 내가 치는 프라이빗한 SOS에 파퀴 (파키스탄+마귀의 합성어로 내가 붙인 매니저의 별명이다)까지 면담에 동석을 시켜 나를 무안하게 할 법한 디렉터가 이번엔 매니저에게 일 좀 줄여 주라고 언질을 줬는지, 매니저가 나랑만 면담을 하잰다.
그게 바로 오늘 아침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파퀴의 궤변과 잔머리는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 상상을 초월한다. 이것은 필시 지구계가 아니라 천상계의 수준이다.
"너가 그동안 혼자 고립되어 재택을 하며 힘들었던 것을 안다. 너가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을 감안해서 상담 프로그램을 듣고 싶다면 얘기해라."
(응? 뭐라고? 웬 상담? 일이나 줄이라고 이 여자야.)
난 필요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조목조목 논리정연하게 왜 내 업무로드가 다른 애들보다 많은지에 대해 왜 마켓 하나가 내 기본 업무량에서 사라져야 하는지에 대해 반박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또 물타기 신공을 벌인다.
"왜비나는 누구나 하는 업무의 연장선이다. 너는 '타임 매니지먼트'(Time Management)가 잘 안되는 것 같다. 링크드인을 통해 진행하는 외부 교육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들어라."
(엥? 뭐라고? 일이 많다고 이 아줌마야.)
그녀가 업무 분배를 편파적으로 하고, 정량적으로 배분하지 않고 특정 자기가 미워하는 나 같은 아랫것들에게 몰아주기를 하는 거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본인의 편파적 매니징과 리더십 부재에 대한 성찰은 하지 못할 지언정. 결국 결론은 다 내가 잘못했고 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
'할많하않.'
난 그동안 이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난 한국에서 그 무섭다는 기자 조직에서 (여)기자로 각종 꼰대 취재원 및 꼰대 선배, 상사 등등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할많은 꼭 하는 (여)기자였다. 그게 내 별명이었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할말을 하지 않으면 몸에 소름이 돋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난 이제 이 말 뜻을 알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하지는 않겠다.
'난 파퀴. 당신에게 할 말은 많지만 하지는 않겠다.'
이 매니저 밑에서 고급 노예로 착취를 당한 지 벌써 1년 반이다. 원래 난 지금 회사의 경쟁사에서 워라밸과 좀더 상식이 통하고 덜 비열하고 덜 교활한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나름 평화로운 싱가포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뉴질랜드계 아시아 헤드가 링크드인으로 쪽지를 보내 "매니저 포지션이 오프닝 했으니 지원하라"며 나를 꼬드겼다. 연봉도 올려 주겠다며.
그.래.서.
반신반의 하면서 내가 지난 2016년 '이 더러운 조직, 다신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며 떠났던 이 회사에 다시 기어 들어 오게 된 것이다. 매니저가 되고픈 욕심과 연봉에 넘어간 것이다. 결국 원래 진행했던 매니저 포지션엔 이 파키스탄계 여자가 앉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녀의 견제도 시작됐다. 그녀는 옆팀에서 온 낙하산이었기에 업무 지식은 일천했다.
사실 싱가포르에는 다들 아는 불문율이 있다. 조직에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sub-continent계 인종이 많을수록 그 조직은 더러운 정치판이 된다는 것을...
나는 외국에 나와 다국적 기업에 다니면서부터 그들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 다들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변명과, 남의 업적 갈취와, 자기 방어와, 물타기에 능한 종족인지를...함께 일을 해본다면 다들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봤을 것이다. 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내가 만난 그쪽 지역 출신 사람들 중 99%는 이같은 성향을 갖고 있었다.
나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욕해도 좋다. 하지만, 한국의 상명하복, 말 안통하는 꼰대를 피해 나온 외국엔 또다른 형태로 날 괴롭히는 '인도파퀴'. 그들이 있었다.
그리고 대게의 경우 영어 말빨이 좋은 이들은 아시아권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에서 꽤 높은 요직을 독차지 하고 있다. 그 밑에서 일하는 괴로움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는 상상에 맡긴다.
여튼. 나는 시달려 왔고 앞으로도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내가 과민한건가? 그들이 너무한건가?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이들과 둥글둥글 잘 지낼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지난 8년간 싱가포르에서 다국적 기업을 다니며 내가 백번 천번을 묻고 또 물었던 질문들이다.
그리고 최근 읽은 어떤 책에서 엉뚱하게도 그 해답을 찾았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조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회사라는 건 원래 그런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오로지 '신경을 끄는 방법' 밖엔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그것 뿐이다.
원인을 찾고 무엇을 해결하려 할수록.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원망할수록
당신 자신만 괴로워진다.]
-책 '신경끄기의 기술'에서 발췌 후 내멋대로 다시씀-
결국 돈을 벌고 밥벌이를 한다는 건 나의 노동만을 돈과 교환하는 게 아니다.
밥벌이를 한다는 건 그 이상의 소중한 것들을 돈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나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스트레스가 하늘을 찌르고, 남의 헛점을 승냥이처럼 찾아 헤매며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 fault-finder들에게 찔리고, 일은 안하고 말빨로 나불거리며 회사를 정치판으로 만드는 politician 밑에서 할말을 잃고, 일은 안하고 친구맺기와 수다로 연명하는 free-rider 들의 뻔뻔함을 견디어 낸 인내의 '댓가'를 지불 받는 것이다.
그래서 밥벌이는 더럽고 처절하지만 숭고한 것이다.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빡침의 할당량을 묵묵히 소화해 냈다.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른 형태의 빡침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돈을 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다국적 기업이란 정글이다.
그리고 또 나는 이렇게 앓던 글을 내뱉으며 널 뛰는 마음에 마침표를 찍고,
신경을 끈다.
바로 이런 게 신경끄기의 기술인 걸까?
아직은 초보라 어렵지만 그래도 노력해본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시달리며 밥벌이를 해낸 나를 포함한, 모든 직장의 노예들에게 화이팅을 외친다.
"참. 수고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