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이란 정글의 포식자들
코리아 노마드 3부. 그들은
'2 F 1P이론'
지난 8년여 간 싱가포르의 미국계 다국적 기업에 다니면서 지어낸 지극히 주관적인 이론이다.
여기서 F는 '프리라이더 (Freerider)'와 '폴트 파인더 (Faultfinder)'를 뜻하고, P는 '폴리티션 (Politician)'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인들이 다국적 기업에 다니게 될 경우 가장 경계해야 할 조직 인간 유형이다. 내가 정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공감할 것이다.
지금까지, 외국에 있는 다국적 기업 하면 으레 '자유'와 '평등', '고액 연봉', '성공' '선진적'...이런 이미지만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상 어디를 가도 밥벌이는 지겹고 처절한 싸움이다. 그곳에 다양한 인종과 문화, 정치적 성향, 국적을 가진 인간 군상들이 모인다면, 그곳은 이내 총성없는 전쟁터가 된다.
나는 오늘 화려한 이미지 뒤에 가려진 다국적 기업의 민낯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FREERIDER
프리라이더. 한 마디로 '날로 먹는 인간들'이란 얘기다. 다국적 기업엔 이런 인간 유형이 참으로 자주 발견된다. 한국이었으면 실력이 들통나면 바로 아웃 감인데, 다국적 기업에선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구멍들이 꽤 많다.
프리라이더들은 특히 실무가 아닌 사람 관리만을 전담하는 일부 매니저 이상 급의 직원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해외 글로벌 기업 가운데 상당수는 조직 구조가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 일선에서 진짜 일을 하는 '필드워커 (Field Worker)'와 그 위에서 피플 매니지먼트 (People Management). 즉 사람 관리만을 담당하는 '매니저', '디렉터'가 바로 그들이다.
보통, 그 회사가 하는 '일'에 대해 아는 전문가는 필드워커들이고, 매니저급 이상은 필드 경험이 전무한 낙하산인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내가 경험한 2개의 글로벌 기업을 토대로 분석한 지극히 개인적인 가설이니 참고 바란다.
내가 지난 8년여 간 글로벌 기업을 다니면서 모신 10여명의 매니저와 디렉터 중에 필드워커 출신은 달랑 5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5명은 인접 분야, 혹은 아예 상관없는 일을 하다가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다국적 기업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조직 문화에 있다. 한국 같으면, 상사가 업무의 1도 모르는 '깜깜이'라면 매니저급 이상으로 승진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조직을 통솔하기도 어렵다.밑에 직원들이 말을 듣지 않을거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갖춘 다국적 기업의 경우, 이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많다.
예컨대, 이들은 중요한 의사결정이 필요한 과정에서 매니저, 디렉터의 직급이라 하더라도 절대 단독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이들의 프리라이딩 전략 중에 가장 흔한 것은 '물귀신 작전'이다. 자기들의 수하에 있는 지식이 출중한 직원들을 비롯하여 조금이라도 업무가 연결되어 있는 인접 팀의 부서장들을 죄다 불러 모은다. 이도 모자라, 자신들 위에 있는 글로벌 헤드 두어명까지 포섭한다. 그렇게 다국적 컨퍼런스 콜을 진행한다.
그리고 이때 얘기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바로 지식을 갖고 있는 필드워커다. 바로 나같은 시니어 애널리스트들이 가장 손 쉬운 포획감이다. 그렇게 밑에 있는 시니어급 필드워커에게 구구절절 썰을 풀게 한 뒤, 은근슬쩍 인접 부서장 혹은 자기 위에 있는 글로벌 헤드로 하여금 '의사결정'을 하게 유도한다. 이들이 회의 중에 하는 업무는 '진행' 정도가 전부다.
결론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이 필요할 때, 위험은 다수에게 분산된다. 일이 잘못 되더라도 책임은 깜깜이 매니저와 디렉터의 몫이 아니다. 모두의 책임이다. 이렇게 해서 지식이 1도 없는 '깜깜이' 매니저나 디렉터도 밥그릇을 지킬 수 있는 구조다.
혹자는 얘기할 것이다. 한국처럼 매니저가 업무를 잘 알면 아랫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의사 결정을 해 버리고 찍어 누르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오히려 수평적인 관계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오가지 않느냐고.
맞다. 그런 긍정적 측면도 물론 있다. 그래서 나같은 '할 말은 하는' 캐릭터도 외국에선 눈총 안 받고 '사차원' 소리 안 듣고 소신껏 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다. 업무를 적당히 모르는 매니저와 디렉터라면 조곤조곤 설명해서 이해시킬만 하다. 근데 문제는 업무를 아예 모르는 '깜깜이' 매니저, 즉 프리라이딩을 하고 있는 상사들 때문에 종종 '빡침주의보'가 발동한다는 거다.
게다가 작은 사안 하나 결정하는 데에도 이해관계자들을 우후죽순으로 꿀어 들이는 바람에 업무 진척은 지지부진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서로 다른 업무 지시를 내려 밑에서 일하는 사람을 멘붕에 빠지게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거다. 이럴 때면, 난 항상 언제나 나보다 많이 알고, 점쟁이를 방불케하는 촌철살인의 사리판단 능력과 사골국물처럼 뼛속 깊이 우러나온 직업 정신을 시전했던 한국의 보스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 앞에선 내가 바로 '깜깜이' 였기 때문.
다국적 기업에서 목격되는 프리라이더들은 필드워커 중에도 많다. 이들은 대부분 지식이 일천함을 커버하기 위해 큰 소리로 전화를 돌려 대거나, 자기가 무슨 업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동료나 매니저에게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데 혈안이다. 일을 열심히 하고 있노라는 '헐리웃 액션'인 셈이다.
나는 이런 거저 먹는 프리라이더, 무임승차자들을 여전히 못 견뎌 한다. 하지만, 더 최악인 건 어처구니 없게도 이들이 승진을 했단 소식을 종종 접한다는 점이다.
FAULTFINDER
폴트 파인더(Faultfinder). 한 마디로 '남의 뒤를 캐는 인간들'이란 얘기다. 나는 한국에서 이런 류의 조직 인간을 아주 드물게 봤었다. 예컨대 200명이상의 조직에서 1-2명정도? 하지만 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특히 싱가포르라는 나라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폴트 파인더'들이 매우 흔한 조직 인간 유형이란 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는 어쩌면 싱가포르라는 나라 자체의 문화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다국적 기업이란 정글의 흔한 사냥법일 수도 있겠다.
각설하고. 남의 헛점을 승냥이처럼 파헤치는 이런 폴트 파인더들의 바탕에는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업무 능력이 떨어진다. 그건 자신도 알고 조직도 안다. 하지만 대신 이들은 남의 헛점과 실수를 지렛대 삼아 자신들의 업무가 조직의 기강을 확립하고 회사의 퀄리티를 콘트롤하는 것인 양 보스처럼 행동한다. 사명감 내지 로열티로 포장된 '헐뜯기'를 통해 조직 내에서 뭔가 일을 하고 있는 듯한 이미지를 풍기는 전략이다.
이들은 동료들의 작은 실수나 헛점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예컨대 한번은 내가 데일리 리포트를 쓰고 편집 부서에 '보내기' 버튼을 깜빡하고 안 눌렀던 적이 있다. 이럴 경우, 한국 같았으면 편집 부서에서 나한테 개인적으로 '조용히' 연락이 오거나, 편집 부서에서 연락을 받은 동료가 다시 '조용히' 나에게 연락을 취하거나, 상사가 나를 '조용히' 깨면서 연락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런 실수가 폴트 파인더들의 레이더망에 걸리면 이들은 먹잇감을 절대 놔주지 않는다. 이들은 곧장 팀원 전체가 들어가 있는 왓츠앱 (Whatsapp) 단톡방이나 팀원 전체가 첨부되어 있는 전체 이메일로 이런 사실을 알리며 작은 실수를 마치 대형 사고인 마냥 침소봉대와 부풀리기에 앞장선다.
이들이 염두에 둔 것은 두 마리 토끼를 사냥하는 거다. 하나는 일 잘하는 경쟁자를 공개 처형 시킴으로써 흠집내기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인들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조직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 안가는 이런 치사스럽고 잔인한 흠집내기가 이곳 싱가포르의 다국적 기업에선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만약 해외 취업을 앞둔 한국인들이라면 다국적 기업의 업무 현장이 더러는 총성 없는 전쟁터, 칼만 안 들었지 강도들이 들끓는 중상모략의 소굴이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물론, 어느 조직이 그렇듯 안 그런 곳도 있을 게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은 나 혼자만의 개인적 에피소드가 아니라, 싱가포르에서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는 친구들에게서도 여러번 들어본 내용들이므로 참고해서 나쁠 것이 없다. 다국적 투자 은행에 다니는 한 친구는 심지어, 업무는 안하고 다른 동료들의 뒤를 캐는 '살생부'를 엑셀 파일로 정리하는 폴트 파인더를 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피도 눈물도 없는 곳이 다국적 기업이다.
POLITICIAN
마지막으로 정치인이다. 막강한 정치력과 사람을 홀리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에서 승자가 되고 우두머리가 되는 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의 조직 내 '정치인'들은 적어도 필드워커에서 출발해 회사 일에 잔뼈가 굵었거나, 지휘 능력이 특출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지극히 개인적 관찰 결과를 공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국적 기업의 정치인들은 색깔이 좀 다르다. 이곳의 정치인들은 일단 회사 내 직원들 모두와 격의 없는 '친구'가 되려 혈안이 되어 있다. 'Friendship, 우정'이라는 가치는 다국적 기업, 특히 미국계 다국적 기업에서 가장 중시하는 조직 융화 기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국적 기업에서 글로벌 헤드나 CEO로 출세하는 사람들 가운데선 '스몰토크'에 능한 철판 캐릭터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스몰토크(Small Talk). 한 마디로 잡담. 가벼운 대화다. 네이버 영어사전에 따르면 '사교적인 자리에서 예의상 나누는 대화'이다. 한국 같으면 그렇게 비업무적인 실없는 대화와 잡담을 늘어놓는 사람에게 관운이 따를 리 만무하다. 한국의 우두머리는 오히려 과묵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국적 기업에서 만난 대부분의 우두머리들은 일단 실없는 농담을 주로 한다. "Hi. Michelle. How are you doing?"이러면서 시작해서 각종 썰렁한 유머와 개그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그런 사람들이 조직의 대빵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난 사실 이렇게 격의 없는 농담을 말단 직원들에게까지 건네는 친근한 헤드나 CEO들을 싫어하진 않는다. 오히려 좋아한다. 다만, 조직의 수장이 되는 것에 눈이 멀어 일은 안하고 정치만을 염두에 둔 일부 야심에 눈먼 직무유기 동료들이 눈에 거슬린다는 거다.
이들은 업무 시간에도 오지랖을 부리면서 이 팀, 저 팀 온 사방을 돌아다니며 농담 따먹기와 잡담을 즐긴다. 스몰토크다. 일부 매니저나 디렉터 가운데서도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친구맺기로 커버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나는 다국적 기업이든 한국 기업이든 간에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고, 그 조직원들은 생산성 향상을 통해 이윤 추구에 기여해야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야심에 찬 정치꾼들을 내가 정의한 '다국적 기업'이란 정글의 포식자들 명단에 추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해외 취업의 환상과 장밋빛 전망만으로 다국적 기업의 문을 두드린다면 엄청난 문화충격과 실망에 빠질 지도 모른다. 무작정 해외 취업이 정답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이같은 조직 인간과 조직 문화가 본인의 성향과 잘 맞는 지를 먼저 따진 후에 문을 두드리는 게 어떨까 하는 조언을 남기고 싶다.
다국적 기업이란 정글의 포식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https://www.nationalgeographic.com/magazine/2010/12/explorers-jour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