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내면 에너지 통합을 위한 명상을 20년 이상 하면서 느낀 점
현재 제가 스승님 밑에서 지도를 받으며 수련하는 명상은 온전한 내면 에너지 통합을 지향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 에너지 통합은 본질적으로 내가 찰나에 낼 수 있는 진동수가 높아지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명상 세계의 아주 오래된 공공연한 비밀로 '일체유심조'를 언급하며, 마음이 찰나마다 내는 진동수에 따라 우리 현실은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인생의 거의 모든 순간과 현상을 진동수란 기준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요즘 끌어당김의 법칙이나,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수단으로써 진동수를 높여야 한다는 책과 유튜브 영상들이 예전보다 더 많아진 듯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강조되다 보니, 진동수가 무슨 신비주의를 말하는가 싶은데,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과정 자체가 진동수를 높이는 과정입니다. 결국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내면 에너지를 온전히 통합하여, 에고로 분리된 낮은 수준에서 더 높은 차원의 나가 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내 삶의 궁극적 목적을 이렇다고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 내면은 이것을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에 진동수를 높이기 위한 계기가 되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죠.
지금 생각해 보면 별 일 아닌 일들이 왜 그때는 그렇게 크고 무섭고 어렵게만 느껴졌을까란 말을 많이 하곤 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 일이 별일 아니게 느껴진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대응을 하며 살아오는 동안 진동수가 높아진 것입니다. 만약 시험이나 취직 같은 고민을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면, 해결이 될 때까지 온갖 노력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불안을 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씩 행동하면서 결과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과, 마음속 불안을 대면하고 넘어서는 과정에서 진동수는 높아집니다. 만약, 시험이나 취직 등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좌절과 실망을 일시적으로 겪습니다. 그렇지만 좌절과 실망으로 진동수가 낮아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회복탄력성을 발휘하여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대안들을 다시 찾아나갑니다. 그러면 다른 길들이 열리고, 또 그 길을 열심히 나아가다 보면 진동수가 높아집니다. (사실 나의 내면이 이 길을 이끌어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에고의 눈으로 볼 때의 좁은 선택지를 벗어나, 자신에게 더 맞고 훨씬 더 넓은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죠.)
인간관계는 우리 내면 속의 모든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어떤 관계 속에서 행복함, 든든한 지지, 고마움, 즐거움, 살아있는 기쁨을 느끼기도 하는데, 또 어떤 관계는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분노와 불안 등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가족이라고 해도 평생 똑같은 강도로 인연이 지속되지는 않듯이,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때가 되면 정리가 되곤 합니다. 적절한 때에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말이죠. 대신 눈앞에 그 관계를 지속해야 할 때,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정말 괴롭습니다. 아마 지금 그 관계가 내 인생에서 정리가 되어있다면, 그 관계를 지나는 동안 내 안의 엄청난 감정들을 일상에서 어떤 식으로든 대면하고, 내 방식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러는 동안 나의 진동수가 높아진 것입니다.
내 삶에서 진동수가 높아지는 순간을 살펴보았다시피, 진동수가 올라가는 과정이 보통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내가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을 때 나의 진동수는 내려가기 쉽습니다. 또한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일차적으로 내가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먼저 남 탓으로 돌리는 경우에도 진동수는 내려가기 쉽습니다. (이 부분은 오해하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내 삶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내가 겪는 일이 나의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내가 옳고, 상황이 그른 경우가 대부분이겠지요. 그런데 옳고 그름의 시비 是非에 대한 얽매임을 넘어서야 진동수가 높아집니다. 그렇다고 부당함을 지속적으로 당하고 있으란 말도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나의 내면의 시비 是非에 대한 얽매임을 넘어선 후, 고요한 상태에서 올라오는 밝은 지혜로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고요하지만 단호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내면의 시비 是非에 대한 얽매임을 넘어서지 않은 채, 일차적으로 올라오는 나의 분노와 불안으로 대응하려 하곤 합니다. 이에 대해 내 몫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나의 진동수를 높이는 기회로 삼는 겁니다.)
그러면 긍정적 확언을 하고, 진동수가 높아진다고 주장하는 주파수 음악 등을 활용하는 건 어떨까요? 긍정적 확언은 분명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무의식은 부정적 사고를 하고 있을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의식적인 긍정적 확언을 통해 적어도 진동수가 내려가는 것을 많이 막아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긍정/부정에 대한 얽매임도 넘어선 고요함을 지향해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긍정 확언만을 좇는 것은, 내면의 불안과 부정적 사고에 대해 눈감아버리고 도피하는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이 경우 불안과 부정적 사고는 열등감, 그림자 에너지로 남아있습니다. 이마저 대면해서 온전히 통합한 후에, 고요한 상태에서 긍정적 태도를 갖고 사는 것이 진동수를 높이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그림자 에너지를 통합하지 않고, 무조건 긍정적인 것만 좇다 보면, 분명 삶에서 그림자 에너지가 자신의 통합을 요구하는 순간이 옵니다. 이건 내면 에너지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자 에너지까지 통합해서 넘어서야만, 에고로 분리된 자아로부터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동수가 높아진다고 주장하는 주파수 음악은, 그걸 통해 스스로 불안을 덜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지금껏 살펴봤다시피, 내면의 진동수는 외부의 음악을 듣는 걸로 쉽게 올라가지 않습니다.)
온전한 통합을 지향하는 명상 수련은 진동수를 직접 빠르게 높일 수 있는 방법입니다.
지금껏 진동수 높이는 게 쉽지 않다고 해놓고, 겨우 앉아서 명상 수련 하는 게 가장 빠르게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니요?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일체유심조. 애초에 내 현실에 일어나는 문제는 내 마음의 진동수에 따라 펼쳐집니다. 그러니 명상을 통해 진동수를 높일 수 있으면, 내 앞에 펼쳐지는 현실의 문제가 달라집니다. 한편으로는, 진동수를 높일 계기를 위해 우리 내면 에너지가 내 삶에 어떤 문제를 펼쳐놓기도 합니다. 그러니 명상을 통해 진동수를 높이면, 현실의 문제 역시 더 빠르게 해결되기도 합니다.
'명상'이란 이름으로 여러 방법이 통용되곤 하는데, 온전한 통합을 지향하는 명상 수련을 고도의 집중력을 통한 몰입으로 레이저처럼 한 지점에 에너지를 모읍니다. 명상 표현으로는 '직접 단전을 주시한다'라고 합니다. 단순히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들여다보고 기분을 좋게 하는 명상을 넘어서서, 직접 단전을 주시하면서 고요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시도해 보시면 알겠지만, 우리가 어떤 형태의 명상을 시도하든, 처음에는 온갖 잡다한 생각과 감정이 올라옵니다. 그런 것들을 억지로 누를 필요 없이, 알아차리되 자연스럽게 흘려보냅니다. 이때 온갖 감정이 올라오는데, 그 감정에 반응하지 않고, 단전을 주시하면서 녹여내는 과정에서 진동수가 높아집니다. 일반적으로는 분노 감정보다는 불안, 공포가 더 다루기 힘듭니다. 이 모든 감정들 속에서 내가 고요함을 유지하며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까 진동수가 높아지는 것이죠.
일반적인 명상과 달리, 제가 스승님께 지도를 받을 때는 두 눈을 뜬 채로 명상을 합니다. 육체의 눈은 자연스럽게 눈앞의 현실을 인식한 채로 마음의 눈으로 내면에 에너지가 고이는 지점을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내면세계로 치우쳐지지 않는 것이고, 두 번 째는 마음의 눈과 육체의 눈을 동시에 활용해서 쓸 줄 알아야 온전한 통합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 중 하나만 쓴다는 것은, 문장 그 자체로 아직 온전하지 않고, 분리된 상태니까요.
처음에는 어렵지만 훈련을 하면서 익숙해지면 나 자신을 메타적 위치에서 바라보는 게 쉬워집니다. 양자 물리학의 아이디어로 끌어당김의 법칙을 설명하는 김상운의 『왓칭』 등에서 이야기하는 관찰자 효과가 여기서 생깁니다. 다만 단순히 위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진동수가 오르는 효과까지는 보장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단전 주시를 함께 해야 진동수는 올라갑니다. 마음의 눈으로 단전 주시를 하면, 내가 바라보는 지점은 단전의 한 지점에서 출발하지만,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진동수는 멀리 증폭되어 퍼져나가며 현실을 창조합니다.
수련을 하는 입장에서는 진동수가 높아질수록 관찰자 효과를 체험적으로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제가 수련 초창기에 긴가 민가 하면서, 잘 와닿지 않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정화가 된다는 설명입니다. 호오포노포노를 비롯해서 무의식 정화를 강조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수련 초창기부터 스승님께도 그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여전히 의문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단전을 주시한 채로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점점 진동수가 높아지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련에 진척이 있다 보니 나중에는 반대로 분노,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정화가 되는 신체적 반응을 곧장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변이 밝고 머리는 맑고 마음은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 그 상황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면, 그 상황의 문제도 곧잘 해결되곤 했습니다. 수련이 진척될수록 일상생활에서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도 느낍니다.
내면 에너지는 자신이 직접 체험하면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폭을 넘어선 현상을 설명하려다 보니 복잡하게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명상에서 흰 것이 검은 것이요, 검은 것이 흰 것이라는 선문답 같은 표현을 듣곤 합니다. 아직 내면 체험의 폭이 일상생활 반경에 있는 사람들은 우주의 아이러니함에 대해 이론적 설명을 덧붙이려 합니다. 그런데 명상을 하다 보면 검은 점이 순식간에 흰 점으로 바뀌고 흰 점이 순식간에 검은 점으로 바뀌는 것을 체험합니다. 설명이 필요 없이 그냥 경험적 사실입니다. 가장 어두운 것이 가장 밝은 것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상 수련에 진척이 있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밝은 에너지 레벨, 가장 높은 진동수에 도달하면,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닿게 됩니다. 그곳은 동시에 가장 어둡기도 합니다. 마치 깊이 굴을 파고 들어가서 막장에 닿은 것과 비슷합니다. (신기한 건,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명상을 하다 보니 이런 비유가 떠오르는데, 스승님께 확인받으면 그러하다고 말씀해 주시더군요.) 그 지점에서 다시 내면에 빛을 비추면 또 가장 밝아집니다. 즉 이것도 비유가 아니고, 체험에서는 사실입니다. 가장 어두운 지점에 내면에 빛을 비추도록 마음을 쓰는 법처럼 구체적인 방법을 익히는 데는 명상 스승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혼자 내면을 바라보는 것 이상의 수련을 위해서는 어느 지점에서 스승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런 본격적인 수련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삶의 매 순간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고요하지만 단호하게 직시하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진동수는 높아지고 통합됩니다. 그러니 내 방식대로 나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은 자신의 내면의 온전한 통합을 위한 하루를 잘 살아내고 계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