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 라오산에서 얻은 깨달음
"나 거의 다 왔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그래 그럼 내가 언니 찾아서 갈게! 주변에 뭐가 보여?"
"어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어.. 다른 건 뭐 있어?"
"전봇대하고 횡단보도"
"아니 언니 그런거 말고, 아냐 됐다, 언니 찾았어"
"왜 차가 안 보이지?"
"언니 차 주변에 뭐 있었는지 기억 나?"
"응, 기둥 옆에다가 댔어!"
"언니 여기 기둥이 여러개인데..."
"그러게, 미안해 내가 기둥번호를 잘 기억했어야 하는데... 아 근데 이 층이 아닌가봐!"
"그래? 그럼 한 층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하나?"
"응 그런가봐 피곤할 텐데 미안해.."
"으응 괜찮아 괜찮아"
길치여서 동생에게 정말 미안하다.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스스로 길치인 걸 아니까 어딜 갈 때면 미리미리 길을 꼼꼼하게 찾아보고는 한다. 스마트폰이 아직 없던 시절, 생애 첫 유럽여행을 같이 떠난 친구들은 내가 길치라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매일 밤마다 다음 날 돌아다닐 동네 골목 이름까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왼쪽, 오른쪽을 세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방향감각이 영 꽝인 나로서는 15분이면 갈 길을 1시간이나 헤매기 십상이다. 결국은 헤매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어쩌면 나 스스로에게 타협해버린 걸지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낯선 길로 접어들었을 때 너무 두려우니까.
그런데 인생의 갈림길에는 지도도 없고 핸드폰 내비게이션도 없어서 마냥 즐길 수가 없다.
두려워도 꾸역꾸역 움직이다보니 이제는 길치 나름의 길 찾는 요령이 생겼다. 앞에 놓인 길이 '맞는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쉽고 오래 가는 길'과 '어렵지만 빨리 가는 길' 사이에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내 컨디션과 상황을 정확이 파악하고 있다는 조건이라면, 두 갈림길은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니다.
갈 땐 걸어가고 돌아올 때 케이블카를 타자
갈림길을 대하는 방식이 비슷한 사람과 결혼해서 다행이다. 완벽하게 같지는 않지만, 대체로 비슷한 편이다. 올라 갈 때는 걸어서, 가능하면 조금 가파르더라도 빠른 길로 가고, 반대로 내려 올 때는 가능한 한 편안한 길로, 시간이 오래 걸리고 조금 더 걸어야 하더라도 완만한 경사로 내려오자고,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다른 점은, 남편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정도. 그나마 한계에 달했을 때 오기부리지 않고 빨리 포기하는 사람이라 주변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피곤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출발했던 장소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면, 출발할 때 보다 돌아올 때에 더욱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터덜터덜 힘 없이 발을 내딛다가는 다치기 십상이니 갈 때보다 올 때 더 집중해야 하고, 소모품인 관절은 아껴서 오래오래 써야 한다. 다시는 여행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삶의 여타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마무리가 좋아야 좋은 기억으로 남고, 혹 당장에 해결하지는 못했더라도 나만 무사하다면 다음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 배수진 치고 덤비기에는 내 인생, 내 몸뚱이가 훨씬 소중하다. 생즉필사 사즉필생은 멋있어 보이지만 너무 책임감 없는 말이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영웅, 대단한 업적,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단함.
나는 절대로 가지 않을 길.
영웅이 필요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구원 받을 사람들이 없는 세상이라는 뜻이므로. 위대한 업적을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희생이 필요한데, 대개 자기 자신만의 희생으로 끝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우러러 본다는 말은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향한다는 뜻인데, 이는 즉 관계가 수평하지 않다는 의미다. 나는 그런 길을 바라지도 않고, 해쳐 나갈 자신이 없다.
'남자다움'이라는 집착을 하찮게 생각하는 우리 남편도, 건강하고 튼튼한 육체는 꿈꾸는 편이다. 고로 될 수 있으면 케이블카를 안 타려고 든다. 자연환경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해내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다.
해내도 좋지만, 글쎄.
나는 라오산 트래킹 내내 거의 30분에 한 번씩 케이블카를 타자고 노래를 불렀다. 덕분에 결국 하산길에는 케이블카를 탔다. 덕분에 지면에 붙어서 내려갔더라면 절대 만날 수 없었을 진풍경도 마주할 수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리고 여유도 있다면 '다른 길'로 떠나 '다른 경험'을 하는 것도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왔던 길을 그대로 다시 가는 건 익숙함 보다는 지루함으로 다가온다. 스무살에 여행 다닐 땐 돈 몇 푼 아낀답시고 무조건 걸어다녔지만, 주머니 사정이 빠듯하지도 않은 지금 굳이 색다른 경험을 돈주고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돈이 제일 중하지는 않다지만, 분명 돈으로 살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경제력은 내가 가는 길의 목적이 된다기보다는,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 지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표현도 많이 쓰이지만, 케이블카를 타면서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겠지. 중국인들은 케이블카를 정말 많이 탄다.
틀린 선택지는 없다.
편한 길, 좋은 길, 안전한 길, 길치인 나에게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지만, 그래도 종종 바위를 타고 나무에 묶인 등산회의 알록달록한 표시를 찾아 따라가는 길이 그립기도 하다. 중국의 여느 산이 그러하듯이 라오산에도 잘 포장된 계단과 데크길 외에는 길이 없어 흙을 밟을 일이 없다. 그래서 계속 한국이 그립다.
길을 헤맬 자유도 없는 것 같아서.
길치에게 동반자는 큰 위안이 된다. 결혼 전에는 아빠를 닮아 길눈이 밝은 동생에게 많이 의지했다. 결혼 훈에는 신랑에게 많이 의지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다.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했더니, 아무 생각 없이 의지할 수 없다는 부분이 가끔은 아쉽다. 사람 맘이 이렇게도 간사하다.
앞에 남은 인생 중 얼마나 긴 시간을 남편과 함께 하게 될 지 모르겠지만(?) 일단 발걸음을 내딛는 방향이 비슷한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신랑은,
내가 그대와 함께 험한 길도 같이 올라 갈 체력이 되는 사람이라는 점에 감사한 줄 알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