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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May 03. 2021

저렴한 취미

북한산 의상능선 등산기

 영화 보러 안 간지 꽤 오래되었다.

 쇼핑 나가서 내 옷을 산 지도, 구두나 가방을 산 지도 오래되었다. 코로나도 극성이고 해서 딱히 놀러 나갈 데가 없다는 핑계로 소비를 멈춘 지 오래다. 인터넷 쇼핑이 쉽기는 한데 종이박스며 뽁뽁이 분리수거가 귀찮아서 차라리 구멍 난 양말도 꼬매 신는다. 

 딱히 돈이 모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최근 내 소비엔 소비 랄 게 없다. 

 예전에는 자잘한 인형도 사고 액세서리도 사고 옷도 사러 잘만 다녔는데, 요즘은 욕심이 나질 않는다. 목걸이는 거슬리고 반지는 갑갑하고 귀걸이는 자꾸 읽어버린다. 몇 년째 안 입어도 못 버리는 옷들을 보고 있자면 새 옷을 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근래에 가장 큰 지출은 그래서 병원비 아니면 등산용품 쇼핑이다.

토끼바위에서

 취미에는 돈과 시간이 든다.

 은 많이 드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짧다면 효용이 덜하다는 느낌이고 시간은 오래 걸리는데 은 얼마 안 드는 행위라면 일상과의 경계가 모호하다. 예를 들어 나에게는 피규어 수집처럼 돈만 있으면 해낼 수 있는 취미라던가, 전자책이나 심지어 도서관에서 수시로 빌려 읽을 수 있는 독서가 그러하다. 집안 곳곳에 수시로 먼지를 털어줘야 하는 크고 작은 미니언즈와 피카츄 인형이 그러하고 매주 한 권 씩 읽는 책들이 그러하다. 

취미 [趣味]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즐겨하는 일.             
(1) 취미 생활 
(2) 나는 이번 방학 때는 취미를 살려 보기로 했다.

 요가나 글쓰기는 업으로 삼았으므로 더 이상 취미의 영역에 들지 않는다. 여전히 좋아하고 즐겨하기는 하지만 여가생활과 구별되기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약간은 취미를 잃은 느낌이다. 삼시세끼 맨 밥에 배추김치만 먹을 것인가, 아니면 두 끼니를 거르는 대신 한 끼를 신라호텔 뷔페에서 먹을 것인가 묻는다면, 나는 두 끼 아닌 세 끼를 굶는대도 더 맛있는 걸 먹는 게 좋다. 

 취미의 '취(趣)'는 중국어에서 그 자체로 '재미'라는 뜻을 가진다. 즐거움의 맛. 코로나19의 후유증으로 미각이나 후각이 마비된 사람들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건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은 인간만큼 미각이 예민하지 않다. 

 그러니 하나뿐인 인생 맛대가리 없게 하루하루 보내지 않으려면 취미는 필수다. 

북한산초등학교에서 시작해서 북한산성, 용출봉, 용혈봉, 나월봉을 거쳐 문수봉까지 왔다

  진정 취미라면 돈도 들고 시간도 들어야 의미가 있다. 단 소비는 하되 소모적이지 않고 보람이 있어야만 한다. 유형의 보상도 좋지만 요즘 짐 늘리기가 귀찮아서 무형의 것이면 더 좋다. 전에는 그림 그리기도 좋았는데, 할 땐 재밌었지만 다 그린 그림 버리기도 아깝고 어디 둘 데도 마땅찮은데 이사 다닐 때마다 챙기기도 귀찮아서 그만뒀다. 

 여행이야말로 이리 보나 조리 보나 내 취향에 딱 맞는 취미였건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19년 이후로는 포기하고 지냈다. 해외여행도 물 건너갔고 국내에서도 멀리 놀러 다니기 눈치 보여서 전전긍긍하다가 


 요즘 등산에 정착해가는 중이다. 

. 문수봉에서는 다시 대남문으로 나와 구기계곡으로 하산했다.

 한두 시간이면 왔다 갔다 할 안산이나 아차산도 좋고, 도시 한 복판 남산이나 북악산도 좋다. 입장료가 없으니 2시간짜리 영화 한 편 값보다 싸다. 적당히 싸 간 간식거리로 끼니를 때우니까 밥값도 안 든다. 안 든 밥값으로 산에서 내려와 등산을 핑계로 맛있는 고칼로리를 먹으러 가면, 시장이 반찬이라고 곱절로 맛있다. 

 5-6시간 이상 산을 타기 시작하니까 슬슬 장비가 필요하긴 한데, 여느 스포츠나 이 정도 장비값은 든다. 요가만 하더라도 조금 더 나은 매트, 조금 더 친환경적인 옷가지를 고르려다 보면 수 십만 원은 금방이다. 스킨스쿠버나 골프에 비하면 그래도 등산은 꽤나 저렴한 측에 속하는 것 같다. 


 백신 다 맞고 팬더믹 종식을 외치면, 그 날이 오면 해외여행 다니느라 산을 잊을지도 모르겠다. 10년 뒤, 20년 뒤에는 등산이라는 행위에 흥미를 잃고 여러 아웃렛을 뒤져가며 마련했던 장비들을 방치할지도 모른다. 어렸을 땐 그렇게 맛있다고 먹었던 아이스크림을 이제는 찾지 않는 것처럼.


 취미는 바뀌어가기 마련이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당분간은 등산이라는 이 저렴한 취미를 즐겨보려 한다. 나중에 해외에 가서도 박물관이나 맛집 돌아다니는 것 외에도 할 게 더 생겼다. 현지의 산에 다니면 되니까, 그 또한 색다를 것 같다. 의상능선에서 마주친 외국인들을 보고 생각했다.


 나도 백신 맞고 나면 저렇게 다녀야지. 




커버 이미지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XMg8GBzNm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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