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의상능선 등산기
영화 보러 안 간지 꽤 오래되었다.
쇼핑 나가서 내 옷을 산 지도, 구두나 가방을 산 지도 오래되었다. 코로나도 극성이고 해서 딱히 놀러 나갈 데가 없다는 핑계로 소비를 멈춘 지 오래다. 인터넷 쇼핑이 쉽기는 한데 종이박스며 뽁뽁이 분리수거가 귀찮아서 차라리 구멍 난 양말도 꼬매 신는다.
딱히 돈이 모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최근 내 소비엔 소비 랄 게 없다.
예전에는 자잘한 인형도 사고 액세서리도 사고 옷도 사러 잘만 다녔는데, 요즘은 욕심이 나질 않는다. 목걸이는 거슬리고 반지는 갑갑하고 귀걸이는 자꾸 읽어버린다. 몇 년째 안 입어도 못 버리는 옷들을 보고 있자면 새 옷을 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근래에 가장 큰 지출은 그래서 병원비 아니면 등산용품 쇼핑이다.
취미에는 돈과 시간이 든다.
돈은 많이 드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짧다면 효용이 덜하다는 느낌이고 시간은 오래 걸리는데 돈은 얼마 안 드는 행위라면 일상과의 경계가 모호하다. 예를 들어 나에게는 피규어 수집처럼 돈만 있으면 해낼 수 있는 취미라던가, 전자책이나 심지어 도서관에서 수시로 빌려 읽을 수 있는 독서가 그러하다. 집안 곳곳에 수시로 먼지를 털어줘야 하는 크고 작은 미니언즈와 피카츄 인형이 그러하고 매주 한 권 씩 읽는 책들이 그러하다.
취미 [趣味]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즐겨하는 일.
(1) 취미 생활
(2) 나는 이번 방학 때는 취미를 살려 보기로 했다.
요가나 글쓰기는 업으로 삼았으므로 더 이상 취미의 영역에 들지 않는다. 여전히 좋아하고 즐겨하기는 하지만 여가생활과 구별되기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약간은 취미를 잃은 느낌이다. 삼시세끼 맨 밥에 배추김치만 먹을 것인가, 아니면 두 끼니를 거르는 대신 한 끼를 신라호텔 뷔페에서 먹을 것인가 묻는다면, 나는 두 끼 아닌 세 끼를 굶는대도 더 맛있는 걸 먹는 게 좋다.
취미의 '취(趣)'는 중국어에서 그 자체로 '재미'라는 뜻을 가진다. 즐거움의 맛. 코로나19의 후유증으로 미각이나 후각이 마비된 사람들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건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은 인간만큼 미각이 예민하지 않다.
그러니 하나뿐인 인생 맛대가리 없게 하루하루 보내지 않으려면 취미는 필수다.
진정 취미라면 돈도 들고 시간도 들어야 의미가 있다. 단 소비는 하되 소모적이지 않고 보람이 있어야만 한다. 유형의 보상도 좋지만 요즘 짐 늘리기가 귀찮아서 무형의 것이면 더 좋다. 전에는 그림 그리기도 좋았는데, 할 땐 재밌었지만 다 그린 그림 버리기도 아깝고 어디 둘 데도 마땅찮은데 이사 다닐 때마다 챙기기도 귀찮아서 그만뒀다.
여행이야말로 이리 보나 조리 보나 내 취향에 딱 맞는 취미였건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19년 이후로는 포기하고 지냈다. 해외여행도 물 건너갔고 국내에서도 멀리 놀러 다니기 눈치 보여서 전전긍긍하다가
요즘 등산에 정착해가는 중이다.
한두 시간이면 왔다 갔다 할 안산이나 아차산도 좋고, 도시 한 복판 남산이나 북악산도 좋다. 입장료가 없으니 2시간짜리 영화 한 편 값보다 싸다. 적당히 싸 간 간식거리로 끼니를 때우니까 밥값도 안 든다. 안 든 밥값으로 산에서 내려와 등산을 핑계로 맛있는 고칼로리를 먹으러 가면, 시장이 반찬이라고 곱절로 맛있다.
5-6시간 이상 산을 타기 시작하니까 슬슬 장비가 필요하긴 한데, 여느 스포츠나 이 정도 장비값은 든다. 요가만 하더라도 조금 더 나은 매트, 조금 더 친환경적인 옷가지를 고르려다 보면 수 십만 원은 금방이다. 스킨스쿠버나 골프에 비하면 그래도 등산은 꽤나 저렴한 측에 속하는 것 같다.
백신 다 맞고 팬더믹 종식을 외치면, 그 날이 오면 해외여행 다니느라 산을 잊을지도 모르겠다. 10년 뒤, 20년 뒤에는 등산이라는 행위에 흥미를 잃고 여러 아웃렛을 뒤져가며 마련했던 장비들을 방치할지도 모른다. 어렸을 땐 그렇게 맛있다고 먹었던 아이스크림을 이제는 찾지 않는 것처럼.
취미는 바뀌어가기 마련이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당분간은 등산이라는 이 저렴한 취미를 즐겨보려 한다. 나중에 해외에 가서도 박물관이나 맛집 돌아다니는 것 외에도 할 게 더 생겼다. 현지의 산에 다니면 되니까, 그 또한 색다를 것 같다. 의상능선에서 마주친 외국인들을 보고 생각했다.
나도 백신 맞고 나면 저렇게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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