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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Apr 28. 2021

목표는 공룡능선

북한산 족두리봉부터 시작하면

 오를 등(登)에 뫼 산(山)을 써서 등산.

 중국에서 하도 놀 게 없어 산이나 보러 다니던 것이 어느덧 그럴싸한 취미가 되었다. 한자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등산을 등산이라 하지 않고 '파산'이라 쓴다. 긁을 파(爬)에 뫼 산을 써서 'pashan'이다. '파충류' 할 때 그 '파'다.

  긁을 파    획수 8획   부수 爪(손톱 조, 4획)   
1. 긁다
2. 기다
3. 잡다
4. 바닥에 몸을 대고 기어감
5. 손톱으로 긁다

 '파산'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도 중국에서는 '산을 기어 오른' 적이 없다. 일반 대중에게 개방된 산들은 모두 데크길과 포장 보도가 완비되어 있어서다. 엘리베이터나 하늘다리 같은 관광요소도 다 갖추고 있어 스틱도 딱히 필요 없다. 

 태산이며 황산이며 형산이니 뭐니 다 돌아보고 뿌듯한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왔더니 이런, 

이정도면 정글 아닌가..? 갑자기 웬 대자연이...


 솔직한 심정으로 중국 황산은 미국 그랜드 캐년보다 멋졌고 설악산은 황산보다 멋있었다. 황산의 통제구역은 또 달랐겠지만, 적어도 공개된 범위 내에서 만큼은 그랬다.

대청봉을 코앞에 두고 도로 내려와야 했던 초보등산러 부부는 그래서 다짐했다. 설악산에서 제일 멋있다는 공룡능선을 목표로 삼아야겠다고.

 처음에는 동네 뒷산 격인 안산에서 체력 기르기를 시작했다.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세 시간 정도 걷는 식이었다. 다음에는 안산에서 북악산으로, 북악산에서 인왕산으로, 때로는 남산 방향으로 다녔다. 아스팔트로 다 포장해 놓은 줄 알았던 남산에서도 꽤나 숲스러운 구간이 있어 의외였다. 

 그 과정에서 우리만의 리듬이랄까, 패턴이랄까, 우리에게 딱 맞는 적절한 방식을 찾아갔다. 예를 들어 먹거리를 잔뜩 들고 가면 오히려 체력이 더 깎이고, 힘들다고 든든하게 먹었다가는 소화하느라 힘이 더 빠진다는 걸 알았다. 느긋하게 즐기는 산행이 맞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는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피곤이 가중됨을 느꼈다. 다음 날 일정을 생각한다면 아직 젊은 우리로서는 처지지 않는 수준에서 코스를 완주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를 더 먹으면 달라지겠지만, 우리는 아직 30대 초반이니까. 

 1년 여쯤 길이 잘 닦여진 작은 산들을 돈 끝에 본격적으로 북한산 입산을 시작했다. 둘레길 아닌 진짜 산 코스를 돌다 보니 또 새로웠다. 장거리 산행의 요령도 요령이지만 무엇보다 "장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몇 년째 유럽에서 사 온 등산화를 신던 신랑은 최근에 한국 브랜드 등산화를 새로 장만했다. 알프스 출신 등산화도 좋기는 좋았지만 한국의 화강암에서는 은근히 접지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탄력 받은 신랑은 그대로 밀착력과 통기성 좋은 등산용 배낭, 양말에 스틱도 새로 질렀다. 장비 빨 세우는 건 게임 현질(게임에서 판매하는 유료상품을 구매한다는 뜻)과 같다던 사람이었는데. 


 물론 하는 게임마다 현질 하는 사람이니까 딱히 놀랍다는 뜻은 아니다. 


 좋은 장비, 비싼 옷 없어도 산을 탈 수 있다. 하지만 '무리 없이' 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에게 맞는 아이템을 쓰니 무릎이 덜 아프고 지구력도 훨씬 좋아졌다. 내 체력을 아무리 길러봤자 템빨(아이템빨, 즉 아이템의 효과)이 더 극적인 변화를 선사한다. 정형외과 병원비로 쓰느니 등산용품에 쓰는 편이 낫다고 확신한다. 

 처음부터 산에 안 가면 돈 들 일도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시간 대비 가성비는 등산만큼 좋은 게 없다. 커플이 6시간 동안 함께 논다고 치면,

 밥 먹고(1시간) 차 마시고(1시간) 영화 보고(2시간) 나와서 쇼핑하고(1시간) 또 차를 마셔야(1시간) 

 어영부영 6시간이라도 채울 수 있다. 윈도쇼핑만 했다고 쳐도 밥값과 커피값, 영화값을 생각하면 6시간 등산에 비해 훨씬 돈이 많이 든다. 

 무엇보다 산 탈 땐 서로 얼굴도 안 보고 몇 마디 안 나눠도 돼서 엄청 편하다. 카페에 앉아 둘이 각자 핸드폰만 보며 시간을 허비하거나 없는 얘기라도 짜내서 대화를 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므로.


 불광역에서 족두리봉 방향으로 향로봉, 비봉, 승가봉을 거쳐 문수봉에 오르고 보니, 아무래도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수봉 정도까진 가 줘야 공룡능선에 엇비슷해질 것 같다. 그러려면 장비빨이 약간 더 필요할 것 같고 더 많은 요령과 그보다 더 많은 체력이 들 것 같아 구기계곡으로 내려왔다. 

 '파산'코스도 더 연습해야 한다. 설악산 공룡능선은 길기도 길지만 난이도도 만만치 않기로 유명하니까 북한산 의상능선같이 네 발로 기어가는 코스도 익혀두어야 한다. 


 당분간은 북한산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엄마 아빠가 다녀왔던 공룡능선, 언젠가는 나도 꼭 다녀와야지.


커버 이미지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xEdHijcVS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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