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숨은벽코스등산기
부모님이 '이번 주말 우리 가족 다 함께 산에 가자..!' 했을 때 냉큼 따라가는 자식이 몇이나 될까.
물 맑고 공기 좋은 데 같이 놀러 가자고 해 봤자 먹히지 않는다. 건강 생각해서 좀 움직이라고 아무리 쑤셔봐도 컴퓨터가 더 재밌어서, 폰 붙잡고 있는 게 더 편해서, 친구들과 놀기 바빠서 산에는 절대 안 가는 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참 크나큰 오산이다.
요즘 젊은것들은 다 끼리끼리 모여 등산 다닌다.
남산이야 워낙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다 쳐도, 요즘 정말 아차산이며 인왕산이며 곳곳마다 앳된 얼굴들이 참 많이 보인다.
코로나19 때문에 실내 운동을 못 하게 된 젊은이들이 산에 다니게 되었다고들 한다. '산스장'은 '산에 있는 헬스장'의 줄임말로, 야트막한 동네 뒷산의 간단한 공공 운동시설을 부르는 신조어다. 근손실이 두려운 청년들이 그동안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전용시설로만 여겨지던 '약수터'까지 몰려들었다나.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유행의 조짐은 몇 년 전부터 조금씩 보였다. 몇 년 전부터 캠핑이 유행하고, 애슬래져룩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전염병 이전에도 건강은 중대한 관심사였다. 특히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이라는 차원에서 건강조차도 스펙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으므로, 수 십 년 만에 젊은이들이 다시 산을 타기 시작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인스타며 유튜브며 SNS에는 젊고 탱탱한 친구들의 등산 인증샷이 넘쳐난다. 그들의 낭만과 추억은 막걸리와 컵라면, 김밥과 도시락과는 거리가 멀다. 쫙 빠진 몸매, 어글리 슈즈 느낌으로 살려 낸 코디, 그리고 유산소+무산소 운동이 동기부여다.
산의 기백을 느껴보자던가, 자연을 만끽하고 오자는 식의 설득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니 내 자식이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다던가 폰만 보고 있다던가, 여전히 죽어도 산에는 절대 안 갈 상이라면, 만약 그렇게 보인다면, 부모의 접근법이 잘못된 건 아닐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습관처럼 속여먹는 거짓말이 문제다. 딱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고, 30분만 가면 된다고 뻥치고 끝까지 끌고 가놓고서는 '야너도(할 수 있어)'를 시전 해봤자 신뢰는 이미 잃은 뒤다. 다시는 산에 같이 안 오를 셈이라면 그런 식으로 해도 된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올라오니까 좋지?
글쎄, 그때는 먹힐 수도 있다. 못할 줄 알았는데 해내서 기분이 좋을 수는 있다. 결과가 좋으니 선의의 거짓말인 셈 쳐도, 속인 건 속인 거다. 별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반복되면 무의식 중에 관계 자체의 본질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스스로의 의지가 결여된 상태로 정상에 도달하면 결국은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다시 내려갈 거, 뭐하러 힘들게 올라온 거야?
가치의 방점을 찍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함께 해냈다는 성취감, 단결력 강조가 먹히는 세대가 아니다. 결과가 좋으면 뭐든 좋다는 식의 논리로 폭력과 비리, 부조리가 용인되던 시대를 책으로 배운 세대다. 미투, 학폭 논란, 내부고발이 협동이나 집단주의보다 익숙하다. 하물며 정상에 올라 뭐가 좋다는 지도 알 수 없다면야. 잠실 롯데타워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더 아찔하니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저기까지만 가서 쉬었다 가던가, 돌아 내려갈 줄도 알아야 한다. 반드시 정상을 찍어야만 '결과'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등산은 '등산'일뿐 '정(복하자)산'이라 하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애인과 산에 가고 싶은데 상대가 너무 싫어한다면, 건강에도 좋고 요즘 유행이고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느니 설득하기 전에, 먼저 무엇이 왜 싫은지 물어보자.
나처럼 벌레를 극.혐.해서 산이 싫다고 한다면 겨울산행을 우선 권해볼 수 있다. 힘들어서 싫다고 하면 인스타 명소 둘레길도 괜찮다. 버스 타고 한 방에 갈 수 있다. 그냥 산이 왜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면, 좋아하는 걸 들고 가자. 맛집을 찾아놓아도 좋고 신상 운동복이나 신발을 선물하는 것도 방법이다.
나의 부모님은 힘들면 중간에서 돌아가는 게 낫지, 하산길에 다치면 다 소용없다는 주의였다. 뭐 여차저차 쉬엄쉬엄 가다 보면 어떻게든 정상에 다다르고는 했지만, 만약 30분만 더 가자고 해놓고 1시간 가서도 도착하지 않았으면 배신감이 엄청 컸을 것이다.
딱히 산이 좋았던 건 아니지만 외국에서 둘이 할 게 워낙 없다 보니 남편과 그럭저럭 산이라도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접근성 좋은 산들 먼저 다녔고, 유명 먹거리를 찾아다니는 김에 산도 한 번 들려보는 식이었다. 가볍게 다니다 보니 또 할 만한 듯 싶어 져서, 어느새 내로라하는 산들을 찍고 다니게 되었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신랑에게 살살 말을 지어내는 "나쁜 버릇"이 있다는 점이다.
지레 겁부터 집어먹는 탓이다. 거절당할까 봐, 싫어할까 봐 말을 안 하거나 없는 소리를 덧붙인다. 20km를 가던 5시간이 걸리던 어차피 같이 가기로 한 거 그렇구나 하고 갈 텐데, 날 향한 신뢰가 그것밖에 안 되나 싶어 매 번 나 홀로 속상하다.
불만이 몇 년씩 되면 이제 좀 짜증이 난다.
동행해주는 사람을 구태여 속여먹어야 속이 후련한가. 종종 "내가 말 안 했으면 몰랐지? 또 속았다~"라는 말을 육성으로 뱉는 꼴을 보고 있자면 그 동그란 마빡을 씨게 갈겨야만 할 것 같은 충동에 휩싸인다.
산이 좋아 가는 거면 진즉에 홀로 다녔겠지.
나물캐고 나무하고 할 것도 아닌데 산에 가는 이유는 오로지 동행하는 사람 때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