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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Jun 22. 2021

프롤로그

제가 왜 산에 가게 되었냐면요

 이래 봬도 산 타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제가 어쩌다 K2 아웃렛에서 수 십 만원씩 쇼핑을 하고 주말마다 산에 다니게 되었냐면요..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곧 '싫어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순두부를 두고 '맛이 없어요' 하는 게 '정말 맛이 별로다'는 뜻이 아니라 '맵고, 달고 짜고, 쓴, 그런 종류의 맛'이 없다는 뜻인 것처럼, 딱히 엄청 좋다고 할 만한 요소가 없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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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야외활동을 꺼리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자연인으로 살고 싶은 로망은 눈곱만치도 없지만, 자연은 좋아합니다. 이것저것 심고 가꾸길 좋아하는 걸 보고 신랑이 '그린떰Green Thumb(초록색 엄지손가락,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 하는데요. 송충이는 징그러워도 무당벌레는 귀여우며 벌도 몇 번 쏘여봤더니 이제는 그렇게 무섭지 않습니다. 붕~ 소리가 나면 펄쩍 뛰면서 놀라기는 해도요. 

 하지만 계곡보다는 바다가 좋고, 바다에 가서도 짠물에 뛰어들기는 슬슬 귀찮습니다. 깊고 푸른 하늘빛 반짝임은 에어컨 바람 밑에서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거든요.

 생전 산에 발도 들이지 않았냐면 그건 또 아닙니다. 여느 어른들이 그러하듯이 저의 부모님도 등산을 참 좋아하셔서 머리가 좀 크고 나서도 곧 잘 부모님 따라 산에 다니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재미를 느꼈느냐고 묻느냐면, 

 글쎄요, 지금도 뭐 딱히...

 부모님의 등산은 취미지만, 

저의 등산은 취미의 탈을 쓴 '살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습니다.

 '자신으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또는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우리 부부가 각 잡고 등산을 다니게 된 계기는 중국에서부터였습니다. 베이징에서의 첫 1년은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든 시기였습니다. 우선 말도 안 되는 천식성 증후군이 시작이었고, 놀라울 정도의 최저 몸무게를 경신하면서 정신적으로도 지쳐갔습니다. 남들은 다 멀쩡하게 잘만 살아가는데 나만 자꾸 이리저리 아프니까 그게 참 억울하고 속상했거든요.

 베이징의 환경적인 문제 외에도, 제 자신에게서 기인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타고나기를 한 군데 머물러 있을 성격이 못 되어서요. 출장 잦은 분야에 종사하면서도 틈만 나면 여행을 다녔습니다. 친구들이 '길바닥에 돈 뿌리고 다니냐'라고 할 정도로 삶의 형태마저도 정주와는 거리가 멀었고요. 그런 자유로운 영혼에게 갑자기 직장도 관두고 집에서 꼼짝 말고 있으라니, 병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던 거죠. 

 그렇다고 신혼부터 떨어져서 살고 싶지는 않아서, 평일에는 베이징에 꾹꾹 몸을 눌러 담았다가 주말마다 튕겨 나오듯 여행을 떠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어.쩔.수.없.이. 산도 타게 된 거죠. 의외로 다닐 만하다는 생각에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다니자고 했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울로 돌아오면 유야무야 되리라 기대했습니다. 환경도 환경이거니와 훨씬 더 즐길 거리가 쌔고 쌨는데, 제가 왜 힘들게 산엘 또 갑니까.


 근데 코로나가 터졌지 뭡니까.


 여행도 못 가고, 문화생활하러 가지도 못하고, 수영도 못 가고, 멀리멀리 놀러 다니기에도 눈치 보이고, 친구들과 만나서 마음껏 놀 수도 없고. 집구석에서 책 읽고 게임하고 요가하고 책 읽고 밥 해 먹고 게임하고 홈트 하고 게임하고 핸드폰 하다가 게임하고.

 방구석 건어물도 하루 이틀이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어디라도 뛰쳐나가 보겠다고 간 곳이 결국 산이었습니다. 호캉스나 근교 여행에 비하면 돈 안 들이고 엄청나게 긴 시간을 때울 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제 발로 가기는 갔는데, 진짜 좋.아.서. 간 건 아니라는 거죠. 


 비자발적으로 시작한 등산이지만, 살면서 정말 내가 '진짜'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게 몇이나 될까요. 직업? 결혼? 전공? 심지어 태어난 것도 내 선택이 아니었는데? '자유의지'까지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2000년대에 태어나겠습니다! 뿅!
아이고, 잘못된 선택이었나 봐요 하지만 제가 선택한 일이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얍!

 그래서 원망하고 후회하려 한다면 그것 만큼은 실패 없이 해낼 수 있죠. 

 인간은 모두 어느 정도 비자발적으로 사는 법입니다.

 근데,

 자발적이지 않아도 괜찮더라고요. 

 T.P.O.를 맞춰 태어나진 못한 삶이라도 마냥 구리기만 한 건 아니듯, 비자발적으로 시작한 등산마저도 나쁘지 않았다고, 작게 웅얼거려 보았습니다.

 불평없는 인생이라고 행복하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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