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에서 얻은 깨달음
[자기소개서]에 취미는 독서와 영화감상이라고 적던 시기는 지났다.
이제 내 취미는 '등산'이라고 적을 생각을 하니,
'으른'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
결혼 3년차, 신혼이라기엔 점점 아슬아슬하지만
아직은 당당히 초보라 주장할 수도 있는, 젊다면 젊고 어리다면 어린 우리 부부의 취미는 등산이다.
동갑내기 커플이 어쩌다 이런 아줌마 아저씨 같은 자기소개를 하게 되어버렸을까.
부부가 같은 취미를 공유한다는 건 참 '좋아'보여서, 이것저것 함께 도전해봤다. 같이 운동도 해 보고 뭐 만들어도 보고, 여행도 함께 많이 다녔다. 어렸을 때 독서모임에서 만났던 사이라 별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취미는 같아도 취향이 달라서
의외로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예를 들어 둘 다 책 읽는 걸 아무리 좋아해도, 좋아하는 장르가, 같은 장르 내에서도 선호하는 색깔에 차이가 있었다. 요가만 해도 그랬다. 신랑을 요가의 세계에 입문시킨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추구하는 수련과 내가 바라보는 수련의 모습이 또 달랐다. 먼저 요가를 시작한 지 좀 되었다는 이유 만으로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 이렇게 해라' 잔소리를 한참 하던 시기가 있었다.
'달라도 괜찮다'는 걸,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다.
파를 나눈 가족 간에도 의견이 다르고 개성이 다를진대, 서로 다른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고 해서 놀라고 실망하고 짜증 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말 한 마디 없이 조용이 밥을 먹어도 편안한 사이의 우리에게는
등산이 참 어울리게 되어 버렸다.
그러고보니 어릴 땐 '다르다'는 데에 되게 민감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는 S.E.S.팬이냐 핑클팬이냐를 두고 다투기도 하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는 '거절'을 수용하지 못해서 절교(?)를 하거나 너는 내 편을 들어야 한다며 너도 걔와 절교(!)하라던 시절도 있었다. 공부하느라 바빴던 고등학생 때도 이러저러한 오해와 불신과 집착이 난무했던 것 같다.
그 또한 성장의 과정이었겠지.
대학이나 회사에서, 성인이 되어서도, 아직도 상대방이 나와 다르면 당황하고 거부하고 방어기제부터 발동시키는 사람들 보면, 대체 얼마나 무난한 학창시절을 보낸 덕분인가 생각하게 된다.
회사 정도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인간관계는 평생에 걸쳐 계속 익혀야만 하는 건가보다. 부부 사이의 관계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의 관계도 그렇다. 전에 누군가의 배우자고 부모였던 적이 없으니 또 새로 부딫혀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나와 피와 살을 나눈 존재라 하더라도 다를 수 있음을, 함께 해도 결국은 독립 된 개체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매 순간 스스로에게 타이르고 타일러야 하는데, 솔직히 그 어느때보다 쉽지 않다. 차라리 기대가 없고 거리가 있는 회사생활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혼의 난이도는 마치 등산의 난이도 같다. 한 봉우리 너머 그 다음 봉우리로.
산은 함께 올라도 되고 둘이 같이 올라도 된다.
둘이 아니라 셋, 넷, 여럿이서 오를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내 두 발을 움직이는 건 나 자신일 수 밖에 없다. 엄청 튼튼하고 성격 좋은 사람이 나타나서 내 짐을 대신 들어주면 좋겠지만, 험한 산 일수록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위험하다. 피치 못 할 사정으로 나 홀로 조난 당할 경우 수중에 아무것도 없으면 큰일이거니와, 자기 몫 이상의 짐을 짊어 진 사람에게도 부담은 곧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뒤늦게 사과해봤자 위험부담을 떠넘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산을 마주하려면, 물 한 병, 약간의 식량과 비상약 정도의 최소한의 짐은(그 밖에도 챙길 건 더 많지만) 스스로 이고 간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더 멀리, 더 험한 코스를 목표로 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부담을 나눠야 오래 갈 수 있다.
남에게 의지하려 해서는 안 되는 만큼,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을 해내려고 집착해서도 안 된다.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쉬거나, 도움을 청하거나, 혹은 '이번(생)엔 여기까지'를 외칠 수도 있다. 현실이 내 예상과 달랐다 하더라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부부의 첫 설악산 등반은
아주 만족스러운 성공이었음에도 약간의 예측실패, 그리고 약간의 포기를 곁들였더라고 말하고 싶다.
우선 코로나때문에 대피소를 폐쇄했다는 말을 매점도 닫았다는 말로 오해하는 바람에 너무 큰 짐을 챙겨갔다. 숙소에 돌아와 짐정리를 하면서 보니까 가져 갔던 먹을 거리의 1/3이, 마실 거리의 1/5이 남았다. 심지어 사과 두 알은 진즉에 버렸다. 이만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대청봉까지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산길에는 신랑이 무릎을 접지를 뻔 했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통증이 없는 건 아니어서, 결국은 지나가던 등산객에게 에어파스/스프레이를 빌렸다. 기꺼이 스프레이를 제공하고 사용법도 알려주신 분은, 사례로 드리겠다는 간식을 거절하셨다. 해가 빨리 저무는 산 속에서, 하산길은 최소한의 짐으로 가능한 빠르게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산에서는 '나중에'를 생각하며 욕심내는 것도 금물이다. 노련한 등산객일수록 짐을 비울 줄 알고, 확실하게 거절할 줄도 안다. 등산초보의 눈에 참으로 매너있고도 확고한 거절이라, '나도 언젠가는 에어파스를 들고 다니며 초보 무릎에 뿌려주되 과자는 거절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다짐했다.
내 맘대로 풀리지만은 않는 인생이지만, 등산은 원래 그런거라고, 설악산에서 깨달았다. 우리는 처음부터 늦게 출발했고, 짐 때문에 걸음걸음이 느렸으므로, 119 헬기타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무엇을 포기할지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도 괜찮았다.
아침에는 흐렸던 덕분에 시원하게 산을 탈 수 있었고, 구름 속을 거니는 경험도 만끽했다. 낮에는 해가 반짝 날이 개면서, 그 어느 때 보다 맑은 설악산의 진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늦는 바람에 해가 저문 하산길은 다행히도 데크와 포장을 잘 갖춘 넓직한 초급코스여서, 달빛과 별빛만이 고요한 와중에 도란도란한 우리 둘의 목소리만 가득했다. 사람이 만든 불빛 한 점 없는데도 하나도 두렵지 않아서 신기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우리 둘이 힘을 합쳐 한 코스 해내기는 했지만, 인생은 길고 봉우리는 많다. 게다가 등산이 취미라고 해봤자 그저 흥미가 좀 생겼다 뿐이지 아직 새파란 초보에 불과해서, 주변의 선배님들께 자주자주 조언을 구해야 할 것 같다. 무슨 장비를 갖추면 좋고 우리 수준에 어떤 루트가 적당할지 많이 묻고 준비해야겠다.
결혼생활이 조금 더 할 만 해진 느낌이다.
하산길에 빨간 베낭을 맨 키 큰 꽁지머리 객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네 다섯시간 가량을 함께 내려왔다. 틈틈이 쉬기도 하고 사진찍느라 멈추기도 한 우리와는 달리 아주아주 느린 페이스로 쉼 없이 꾸준히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처음 그를 지나칠 때는 우리 걸음이 빠른가보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앉아 멍때리고 있다보면 어느새 빨간 베낭이 눈 앞을 스스륵 지나갔다. 휘운각대피소에서부터 그랬다. 달팽이의 속도로 한 번, 두 번, 우리 앞을 지나칠 때 마다 조금씩 조금씩 그의 키가 더 커 보였다.
그는 우리보다 더 먼 출발점에서 더 일찍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지 못했던 대청에도 다녀왔을 분위기다. 서로에게 서로가 없었더라면 감히 여기까지 올 엄두도 못 냈을 우리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분명 몇 시간 동안 말도 한 마디 안 하고 묵묵히 걷기만 했겠지.
한참 부족한 초보들은 산이라는 역경 앞에서 찡찡대며 서로를 찾지만, 말 없이 홀로 차근차근 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처럼 홀로 가는 인생도 멋지다고, 홀로여도 외롭다거나 위태로워 보이기는 커녕 세상 부럽다고, 둘이 함께 입을 모아 이름 모를 그 '빨간베낭객'을 칭송했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