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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May 17. 2021

빵뎅이로 북한산 다 쓸고 왔습니다

의상능선 하산기(from 문수봉)

 입구만 수 십 곳인 넓디넓은 북한산에서도 제일 빡세다는 의상능선. 코스 곳곳에 밧줄이 늘어져 있고 철제 난간 구간도 많다. 튼튼한 다리는 물론 탄탄한 광배, 즉, 등근육까지 필요로 하는 코스로 이번에는 하산을 감행했다. 

 그래서 이번 일기는 '등산기'가 아니라 '하산기'다. 


 지난 번 등산 때, 의상능선으로 올라가 용출봉, 용혈봉을 지나 문수봉에서 구기계곡으로 하산할 때는 5시간 좀 넘게 걸렸다. 올라갈 때는 난이도를 최상으로, 내려올 때는 난이도 최하로 구성한 코스로, 덕분에 용기탱천한 초반에 스퍼트를 냈다가 하산시에는 안전하게 천천히 내려올 수 있었다.

 이번 등산은 사실 의상능선으로 하산할 생각은 아니었다. 원래 계획은 족두리봉-> 문수봉-> 백운대까지 풀코스로 돌고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문수봉에 도착해서 맘을 바꿔먹었다. 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였으나, 결과적으로 현관문 따고 돌아오는 시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의상능선은 오르기만 하는 걸로....

 백운대에서 하산할 경우 집으로 돌아오는 데에만 2시간가량 걸릴 예정이었다. 우이신설선 타고 환승하고 또 환승해서 귀가하는 길에 더 지칠 것이 분명했다. 반면 의상능선 쪽 입구는 워낙 길도 잘 트여 있고 구파발에서 지하철 타면 집 까지 1시간이 채 안 걸리니까, 내일 출근을 생각해서 북한산 주능선 종주는 2주 뒤로 미뤘던 것이다.


"어 잠시만, 뇌절(사고 회로가 정지했다는 뜻의 인터넷 용어) 옴"

"괜찮아. 거기서 오른발 디디면 돼. 아니 왼 발 말고 오른, 아, 그러면 다리가 꼬이, 아, 어, 잘했어."

"후...."


 의상능선을 오를 때 얘기하기는 했다. 여기로 내려오는 건 정말 어렵겠다고. 원래 길이 가파를수록 오르기는 쉬워도 내려오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오를 땐 아래가 안 보이지만 내리막길에서는 아래가 더 멀어 보이기 마련이고, 무엇보다 등산 내내 체력을 소모했으니 하산길에 다치기가 더 쉽기도 하고.

 그럼에도 굳이 어려운 길로 내려오기를 택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문수봉 어려운 코스를 무사히 해냈기 때문이다.

 사모바위를 지나 승가봉에서 문수봉까지 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으로 가면 '쉬움'코스, 오른쪽으로 가면 '어려움'코스다. 바로 그 갈림길에 서서 고민하고 있는 한 부녀를 만났을 때, 산악 동호회 아저씨들은 쉬움 코스는 지루하다며 어려움 코스로 가라고 설득했고, 반대로 우리 부부는 단호하게 아랫길로 돌아가시라고 주장했다.

 같은 딸내미로서 딸내미 말을 믿으세요.
비봉 가보셨어요? 네, 그 비봉보다 무서워요.
정 아쉬우시면 아버님이랑 따님이랑 다음에 또 오시면 되잖아요.
오늘은 쉬운 길로 가세요.

 신랑의 한 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저기는 어려움 코스가 아니라 무서움 코스예요,라고. 아빠 팔을 끌고 쉬움 코스로 진입하는 가족의 뒷모습에서 신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나 오늘 사람 하나 구한 거 아니냐는 말에 격하게 동의하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 무섭다는 문수봉 어려움 코스도 처음에만 덜덜 떨었지 길을 알고 난 지금은 그럭저럭 탈 만 해서, 의상능선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그래서 연습해야 한다는 책임감, 즉 우리의 목표인 설악산 공룡능선 하루 만에 주파하기를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두 번째 이유로, 의상능선을 하산길로 택하게 된 것이다.


 의상능선 하산길의 1/3 정도를 지날 무렵, 신랑은 말했다. 저 쪽으로 갔어도 시간은 똑같이 걸렸겠다고. 나는 여전히 귀갓길 짧은 게 낫다고 여겼을 뿐, 절벽을 기어 내려가야 한다는 공포감은 신랑의 체력을 급속도로 갉아먹고 있었음을 몰랐다.

 그때부터 신랑은 아기 판다로 변신했다.

에버랜드 유튜브 채널 캡처 :  https://www.youtube.com/watch?v=Uj9_WjRBH2k

 가파른 내리막길은 뒤로 돌아 내려가면 좀 낫다. 기어 올라갈 때처럼 돌에 붙어 기어 내려가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뒤로 돌면 뒤가 안 보인다는 점이다. 발 디딜 곳을 내려다보며 가야 하는데, 위를 보고 올라갈 때와는 달리 아래를 보면서 가야 하니 공포감이 커 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안 보고 디디자니 잘못 디뎌서 미끄러질까 무서워 오도 가도 못 하는 지경이 될 수밖에.

 뒤로 돌기는 무섭고, 앞을 보고 내려가기에는 너무 가파른 지형에서 신랑은 깨달았다. 아예 처음부터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가면 넘어질 일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끄럼 타듯이 바닥을 쓸면서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발이 착, 하고 지면에 딱 닿는 것이다. 

 

 그래, 모양새가 좀 우스우면 어떠니 안전한 게 제일이지.

 바닥을 쓸면서 오면 안전은 물론이고 무릎에도 부담이 없다. 속도가 좀 느리기는 하지만, 덕분에 인파에 속하지 않고 우리 둘이서만 오붓하게 우리만의 페이스로 하산하면 되니까 꼭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다. 


 이번 등산을 회고하노라면, 전날 온 비로 한껏 맑은 공기, 북한산에서 제일 험하다는 코스로 하산까지 마쳤다는 성취감에 한껏 밝은 표정, 그리고 한껏 진흙범벅이 된 등산복 바지가 남았다. 그러고도 또 또 등산 가자고 눈을 반짝이는 배우자 덕분에 몸무게가 쭉쭉 빠진다. 등산을 시작한 뒤로 다른 운동을 많이 줄였는데도 2kg이나 빠졌으니까.


 근데 나 말고 네가 어서 살이 빠져야 등산을 좀 덜 갈텐데...

 




커버 이미지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9gzEctBFd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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