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스틱 필요 없다던 사람 어디 갔나

스틱은 과학입니다

by 티제이

등산스틱 완전 민폐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노인도 아니고 산에 가는데 지팡이를 왜 들고 간담. 지팡이 없이는 무릎 아파서 못 걷는다면, 이렇게 험한 코스는 안 다녀야 하는 것 아닌가? 대체 왜 주변 사람들 위험하게스리 기다란 폴대를 앞뒤로 휘휘 휘두르며 다니는지.

이런 오만한 판단은 딱 20대 때까지.


30대가 되어 노화가 시작되었다기보다, 운동을 좋아해서 그동안 많이 다치고 다녔다. 테니스 치다 테니스 엘보 나가고, 다친 팔 아끼다가 반대쪽 팔 나가고, 몇 시간씩 운전하다가 오른쪽 무릎이 슬슬 아파오기 시작하고, 그렇게 차곡차곡 통증을 저축해오며 살아왔으니, 꼭 노화나 등산 탓만은 아니다.

무릎 한쪽, 팔꿈치 한쪽을 쓰다듬으며 아프면 등산 왜 가냐던 20대의 나에게 조용히 속삭여본다.

야, 스틱은 과학이야, 임마

20대의 나도 원리는 익히 이해하고 있었다. 호모 에렉투스가 네 발 걷기를 포기하고 두 발로 일어선 순간부터 디스크를 비롯한 천형 같은 각종 질환이 시작되었으니까. 중력을 거슬러 차곡차곡 위로 쌓아 올린 직립보행은 너무도 불안전하다.

그러니 스틱을 써서 바닥으로 무게를 분산하면 마치 네 발 짐승처럼 안정적인 이동이 가능한 것이다.

몰랐던 건 아니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몸으로 체득하는 건 천지차이다. 그리고 몸으로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잘 쓰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무게가 분산되어서 허리나 다리는 물론 어깨까지 훨씬 편안하다는 건 알았지만, 처음 쓰는 도구가 어설픈 것도 사실이다.

처음에는 길이 맞추는 데에도 한참 걸렸다. 이만큼? 너무 긴가? 아니, 너무 짧은가? 이렇게 잡으면 되나? 요렇게 잡으라고 하던데 좀 불편한 듯도 하고...

그렇게 거치적거리기만 했던 폴대가 이토록 나를 자유롭게 하다니!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 심리적인 거부감만 극복하면 도구쯤이야 거뜬히 사용해 낼 수 있다. 그 복잡하다는 컴퓨터, 스마트폰까지 쓰는데 이까짓 막대기쯤이야.

폴을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라고 여겼던 나와는 달리, 신랑은 절대 쓰고 싶지 않는 축에 속했다. 우린 아직 젊고 관절도 튼튼한데 폴대를 쓰는 건 오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약간은 '자존심이 달린 문제'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짐을 더 늘리기 싫은 마음도 있었다. 내 몸뚱이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데 말이지.

한국의 산에는 폴대가 굳이 필요 없다느니, 그런 건 길 넓고 흙 많은 북유럽에나 적합하다느니, 거추장스럽다느니, 핑계는 많고 많았다. 직접 써 보기 전 까지는.

배우자는 이제 내 카본 스틱보다 약간 더 무거운 두랄루민 재질의 등산스틱, 잘만 들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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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코스, 그러니까 손으로 뭔가를 붙잡고 올라가야 하는 구간에서는 스틱이 불필요하기는 하다. 손목에 달고 가기도 위험하고 접었다 넣었다 하기도 번거로운 점, 인정한다. 암릉과 밧줄 구간만 계속되는 코스로 간다면 장갑만 잘 챙기고 폴대는 아예 포기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국의 산에 바위가 많기는 하지만, 입구와 출구 부근은 반드시 경사가 완만할 테니까 그 구간에서라도 스틱을 쓰느냐 안 쓰느냐는 천지차이다. 등산 초반에는 초반 체력을 아낄 수 있다. 혹은 같은 체력으로 조금 더 빠른 이동 할 수도 있다. 체력을 아끼거나 시간을 아끼거나 둘 중 하나는 얻는다.

후반부에서는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 하산길에 부상이 많은 이유는 오랜 산행으로 힘이 풀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발을 아래로 내딛을 때 하중이 더 많이 실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낮은 경사여도 터벅터벅 내딛다 보면 발목이나 무릎에 압박이 계속 가해질 텐데, 그 하중을 양 손에 잡은 스틱을 통해 지면으로 흘려보내면 안정적으로 부상 없이 귀가할 수 있다.


허벅지와 엉덩이, 코어가 워낙 좋아서 몸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근력이 된다면야 스틱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마는, 평범한 우리네로선 어려운 일이다. 다른 동물에 비하면 가히 허접하다 할 만한 육체를 타고났음에도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요로코롬 지구를 가득 채울 수 있었던 건 다 도구를 잘 썼던 덕분 아니겠는가.

우리 부부는 이제 스틱은 물론 무릎 보호대도 미리 차고 출발한다. 다치거나 무리하기 전에 미리미리 준비하고, 나는 심지어 복대(!)도 챙긴다. 데드리프트처럼 무게 칠 때 허리를 보호하기 위해 복대를 차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음에는 어느 장비를 마련해볼까.

쇼핑(?) 할 생각에 매일 밤 폰을 뒤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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