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금오름 등산기
빳빳하게 뽀시락 거리는 호텔 침대에 누워 오름을 생각했다.
저 째깐한 금오름도 산이랍시고 구름을 끼고 노는데, 나라고 못할 건 뭐야.
한 달 전, 비행기표를 예약할 때만 해도 그즈음엔 날이 맑을 예정이었다. 꽤 덥고 꽤 가물기까지 한 나날들이 이어졌는데, 왜 하필 내가 제주도에 간다니까 비 소식도 덩달아 따라오는지.
근데, 마음속 한 켠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한라산, 사실은 그렇게 내키지 않았다고.
한 해에도 몇 번씩, 제주도에 그렇게 자주 가 놓고선 단 한 번도 한라산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피해 다녔다는 뜻이다. 뭐하러 힘들게 산에 간담. 굳이 비행기 타고 제주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산은 도처에 널렸는데.
자고로 제주도라면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스무 살, 유럽에서 시간 단위로 스케줄을 짜고 동선별로 플랜 A, B를 짜던 티제이는 이제 내 작고 작은 마음속에만 더욱 작게 작게만 남아있다.
덩치는 산만하나 내 마음 씀씀이만큼은 정말 내로라하게 작다고 자신한다. 무던해 보였다면 그건 내가 진짜 너그러워서라기 보단 그저 기억력이 나빴을 뿐이다.
혹은 지쳤거나.
마음에도 체력이 있다면, 요즘 내 체력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부실하기 짝이 없다. 얼마나 부실하냐면, 조금만 움직여도 힘이 들고 의욕만 앞세우기에도 숨이 턱턱 막힌다. 사람이 밥은 못 먹어도 물은 마셔야 하고, 물은 못 먹어도 숨은 쉬어야 하는 법인데,
그 숨이 막힌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가만히.
이 마음이란 것도 근육을 단련하듯 늘렸다 줄였다 운동을 해야겠지. 허나 마음 운동은 몸뚱이 운동보다도 버겁기만 하다. 귀찮고 피곤해서, 마음 쓰는 게 성가셔서 가만히 있다 보면 그런 오해를 사기도 하는 것이다. 너는 사람이 참 차분하고 진중한 구석이 있구나, 하고.
몸뚱이야 디스크가 터지고 목이 안 돌아가기 시작하면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다 위기감이라도 들지만, 마음은 티가 안 난다.
밴댕이 소갈딱지만 한 거, 안 보이게 어딘가 쑤셔 넣으면 그만이다.
작은 마음은 병든 마음과는 조금 다르다. 사실 작으면 작을수록 잘 아프지도 않다. 지름이 한 1m 되는 크고 널찍한 과녁 정도 되어야 맞추기 쉽지, 10원짜리 동전 만한 과녁에, 그것도 렌즈 없이는 보이지도 않을 저 멀리에 있는 과녘에 뾰족한 다트를 딱 꽂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작은 마음은 그래서 상처 받지 않는다.
작고 앙증맞은 내 마음, 어디 내놓기엔 한없이 초라한 내 마음. 게으른 나, 부족한 나, 지랄 맞은 나를 호주머니 속에 꽁꽁 숨겨놓고, 숨겨놓았다는 사실조차도 또 한 번 부끄럽다. 그래서 제주도 가서 늘어지게 쉬고 싶다는 얘기는 차마 못한 채 센 척 오지게 한라산 간다고 큰소리치는 것이다.
근데 하늘이 내 작은 마음을 도우사 비가 오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거 진짜 작대. 작은데 괜찮대. 우리 여기 한 번 가보자.
금오름.
나는 처음 들었지만 인터넷에서는 '이효리 오름'으로 유명세를 탄 곳이라고 했다. 그문오름, 금악 등으로도 불리는 아주 작은 오름이고, 정상에 오르면 아주 작은 못도 있다고, 여기서 멀지 않다고 신랑이 검색해줬다.
운전도 못 하는 게 자꾸 여기 가자, 저기 가자 하는 것이 작은 마음에겐 참 귀찮은 요구사항이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안개는 감내할 수 있다.
금오름 도착하기 몇 백 미터 전부터 갓길엔 차량이 즐비했다. 뭐야? 대체 뭔데? 한눈에 봐도 별 산 같지도 않은 언덕 앞에 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당황스러웠다. 코로나19 때문에 제주도가 과포화 상태라더니, 갈 데가 얼마나 없으면 이런 오름까지 찾아온담?
"우산 갖고 가, 말아?"
"난 젖어도 돼, 너 혼자 써."
"아 근데 바람이 이래서 될까?"
"어, 이거 우산 펴는 순간 바로 메리 포핀스 각인데"
날은 흐리지, 제주도 아니랄까 봐 바람은 또 엄청 불지, 꼴에 산이랍시고 꼭대기에는 구름까지 걸쳤지, 이런데도 이 작은 오름에 올라가겠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라간다고?
포장도로를 따라 십몇 분 만에 정상에 도착해서, 뭘 할 건 없었다. 한 가득 내려앉은 구름에 볼 건 더 없었다. 회색빛 구름은 바람을 따라 살짝 걷히나 싶다가도 도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배우자는 날씨만 좋았으면 바다도 보이고 바람개비(풍력발전소)도 보인다고 아쉬워했지만,
재잘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오름을 타고 휘몰아치는 바람에 쉬이 흩날려서 이내 웅웅 거리는 바람소리 밖에 남지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사람의 흔적이 자꾸만 지워지는 그런 묘한 공간이어서, 이대로 숑~ 하고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지는 않을까, 키득거리며 그런 허튼 생각도 나누게 되는 것이다.
오름 가장자리를 둘러 난 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자 금세 나와 그, 둘 밖에 남지 않았다. 밖에서 볼 땐 한눈에 다 들어오는 정말 작은 오름이었는데, 안에서 걸으려니까 끝이 없었다. 축축하게 감싸안는 젖은 바람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잔뜩 젖은 바람에 추울까 봐 뒤집어쓰고 왔던 싸구려 인조가죽재킷은 진즉에 벗어버렸다. 눅눅해진 외투를 힘겹게 벗겨내면서,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던 태양과 먹구름의 힘겨루기를 떠올렸다. 따스한 햇살로 나그네가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든 태양이 이겼으니 태양이 더 힘이 세다는 내용이었지.
이번에는 먹구름이 이긴 것 같다.
옷을 벗긴다고 생각하니 금오름을 휘어 감고 몰아치는 바람이 먹구름의 거친 숨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 작디작은 오름은 혹시 먹구름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을까. 바튼 호흡에 몸을 맡기고 젖으면 젖는 대로, 잔뜩 헝클어진 풀밭 속속 까지 젖어들도록 그렇게 깊숙하게 구름을 끌어안고 있는 걸까.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축축한 손을 마주 잡고 높이 자란 풀숲 사이로 계속 계속 걸어가고 싶은 걸까.
좀 작으면 어때.
멀찍이서 평평하게만 보면 별 볼일 없어 보일지 몰라도 실은 그 속은 은근 은근히 깊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작지만, 오늘도 사랑을 하고,
오름도 산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