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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Jun 19. 2021

한없이 작고 소듕한 나의 마음

설악산 대청봉 정복기

 설악산 대청봉.

 최근에 TV에 Three Peeks challenge(24시간 내에 3개의 서로 다른 산의 정상을 완주하는 챌린지)로 등장하면서 새삼 인기를 끌고 있다나보다. 하지만 대청봉 정복기로 거창한 영웅담을 꾸며내기엔 내 마음은 여전히 조막만 하다. 도망치고 회피하고 방어적으로 핑계를 둘러대는 작은 마음 그대로다.

 산의 정기는 개뿔.


 설악산 등반을 목적으로 속초로 떠나는 날, 모든 게 완벽했다. 날씨, 엄청 좋았다. 컨디션, 때마침 생리도 딱 끝나서 뭐 나쁘지 않았다. 장비도 다 챙겼겠다 어쩌면 공룡능선을 완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북한산에 오를 때마다 생각했다. 정말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설악산에 오르기로 한 날이 한 밤 한 밤씩 다가올수록 나의 자신감은 한 뼘 한 뼘씩 가라앉았다. 코로나19 때문에 대피소에서 숙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두려웠다. 대피소 숙박이라니, 처음 들었을 땐 상상만으로도 너무 싫었다. 씻을 수도 없고 모르는 사람들이랑 한 공간에 구겨져서 잔다고? 절대 싫다. 근육통을 감내하고 무릎관절을 희생해서라도 쾌적하고 아늑한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오, 이 정도면 잘 만 하겠는데?

 설악산 중청대피소를 보자마자 내가 한 소리다. 그래, 이 정도 피로감이면 잘 만 하다. 너무 힘들어서 어디라도 널브러질 기세인데, 벽과 지붕까지 갖춰졌다면야 분명 행복하게 잠들 수 있다. 중청대피소 앞에 놓은 너 댓 개의 벤치에라도 드러눕고 싶어 하는 몸뚱이를 애써 추스르며 저 멀리 반짝이는 대청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음... 안 되겠는데?  

 그날 우리는 중청에서 일정을 접었다.

 중청까지 가 놓고 코 앞의 대청을 못 가고 하산한 게 바로 작년이었다. 작년에는 분명 중청에서 대청까지도 못 가는 체력이었지만, 올해는 다르다. 다를 것이었다. 그런데도 두려움은 시들 줄을 몰랐다. 그때의 힘들었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해서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굳이 무리할 필요가 있을까, 공룡능선이 뭐 대수인가, 내가 뭐 언제부터 산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작게 작게 옹그라 든 가슴속에서 작고 작은 보신주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 내 도가니는 소중하니까,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

 

그래서,

공룡능선 가기 무서워서 대청으로 갔다.

 나, 아직 대청 못 가봤다고, 이번에 대청 가고 공룡은 다음에 가면 안 되겠냐고.

 공룡 무서워서 쫓기듯 올랐던 대청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쉬웠던 건 아니다.

 6월 초 답지 않은 온도에 바람도 유난히 잠잠한 날이라 체온관리가 좀 어려웠다. 그리고 전 날 밤 숙소에서 TV 보다가 늦게 잠들어버렸다. 타이타닉이 이렇게 재밌는 영화였던가. 홀로 살아남은 로즈가 구명정에 누웠는데 수평선 너머로는 날이 밝아오는 장면에서, 나도 함께 호텔 창문으로 비쳐오는 아침햇살을 만끽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핑계다.

 나는 무의식 중에 핑계를 만들고 싶었던걸 지도 모른다.

 내 등산 실력은 어느새 남편보다 못 한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 실력이 퇴보했다기보다는 그의 성장 속도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린 탓이다. 내가 가뿐하게 산을 오르는 스타일이라면 그는 힘으로 산을 오르는 식이었는데, 그동안 두둑이 비축 해 둔 에너지를 등산으로 차곡차곡 불태우면서 정말 짱돌마냥 건강한 뚠뚠이로 거듭나고 있었다.

 깡마른 체구에 적합한 작고 옹졸한 마음으로 나는 그의 성장에 눈을 흘겼다.


'내가 잡아주고 알려줘야 끙끙거리며 올라오던 녀석이 말이야, 언제 이렇게 컸지.'


 옆에서 맨날 보는 비교대상만큼 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 소듕하니까. 그렇다고 배우자를 원망할 구실도 없고, 그를 깎아내릴 구실은 더더욱 없었다. 우리는 같은 브랜드의 같은 라인 등산화를 신었고, 그의 가방과 폴이 나의 그것보다 훨씬 무거우며 심지어 나는 운동도 꾸준히 해 오다 못해 운동 가르치는 사람인데.


 자신을 반려동물 기르듯이 어여삐 여겨달라던 신랑은 어느새 정말 개가 되었는지, 결혼 생활 삼 년 만에 집사의 속마음을 읊는다.

"여기, 여기 이 구간, 소청까지 올라가는 구간에서 내가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네. 우리 다른 구간에서는 속도 엄청 빨랐는데? 여기 국립공원 지도에서 제시하는 시간보다 한 시간 반이나 빨리 탔다구. 나 원래 산 잘 타. 근데 통통이가 되어서 힘들었던 거지. 근데 이제 살이 좀씩 빠지기 시작하니까."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고,

 우리 집 판다도 결혼 생활 삼 년 만에 풍월을 읊는다. 집사, 아니 반려가 듣고 싶은 말만 쏙쏙 골라 재잘댄다.

 대청에 오르는 내내 공룡능선을 옆에 끼고 걸었다.

 다시 한번 확신했다. 대청도 이렇게 힘든데 저 멀리 보이는 공룡은 아무리 봐도 내가 갈 곳이 아니라고. 봉우리 하나 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그다음 봉우리로,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봉우리를 넘고 넘고 또 넘어야 하다니...!

 그러다 다치기라도 한다면?


 헬기 불러서 각서 써야 한다.


구조대원님께.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다시는 설악산에 발을 들이지 않겠습니다,

 하고.

 공룡능선 대신 탄 대청봉 코스에서도 우리는 시간이 딸렸다. 원점회귀로 설악동에 위치한 호텔에 돌아와 뱃때지에 기름칠 좀 하려고 했는데, 이 속도로는 절대 예약 시간까지 도착하기 어려워 보였다. 아니, 밥이 문제가 아니라 해 떨어지기 전에 내려갈 수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 안 돼...! 우리가 얼마나 맛있는 밥을 예약해놨는데!'


 이걸 놓칠 수는 없지. 대청봉 정상에서 우리는 지글지글 따끈따끈 바비큐 세트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오색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리막 일색에 볼거리도 딱히 없는 오색 구간을 3시간 만에 내려와 재빨리 택시에 올라탔다. 오색은 속초가 아닌 양양이라 고속도로 타고 시 경계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택시비가 5만 원이나 나왔지만 기쁜 마음으로 현금 한 장 안겨 드리고 후다닥 숙소로 돌진했다.

  산이 다 무어냐, 나에겐 밥이 더 중한 것을.

 설악산 정상에 올랐어도 나는 영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의 몸뚱이는 여전히 간사해서 지치면 멈추고 싶고 배고프면 먹고 싶고 이왕 먹는 거 가능하면 더 맛있는 걸 먹고 싶을 뿐이다. 육신에 갇힌 마음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광활한 풍경에 무-야호를 외치며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기도 성가셔서 그저 가만가만 발 밑의 돌을 살피기 바쁠 뿐이다.

 육즙 가득한 구운 버섯을 입 한 가득 우걱우걱 씹으면서 생각했다. 대청 가서 좋냐고? 응, 좋아. 이번 여행에서 뭘 느꼈냐고? 음... 좋다..?

 아, 속초에서 먹은 전복해삼물회랑 아바이순대가 정말 맛있었다는 거?

 산을 아무리 다니고 등산 실력이 일취월장.. 은 아니지만 어쨌든 좀 나아져 봤자, 나라는 인간은 여전히 언어는 딸리고 표현력은 부족하고 번뜩이는 영감이 스쳤다던가 하는 계기마저도 없다.

 해외여행이나 유학도 그렇다. 외국물 좀 먹는다고 견문이 트이고 철이 들고 사람 됨됨이를 갖추게 될 리가 있나. 산 좀 탄다고 심신이 안정되고 만병이 치유되어 껄껄껄~ 하고 무병장수 하게 될 리가 있나.

 사람이 변한다면,
아마 산이 변하는 속도 정도로, 딱 그 정도로 변해가는 것 같다.

 계절이 바뀌어도 설악산은 여전히 설악산이듯, 제 아무리 옷을 갈아입고 변덕을 부려도 알맹이는 변하지 않는다. 내 알맹이는 비록 콩알만 하지만, 콩알이던 팥알이던 작은 것도 유용하니까.


 요즘 양자역학을 다룬 책을 읽고 있는데, 입자니 아원자니 하는 걸 보니, 거 봐, 작은 게 중요하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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