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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May 31. 2021

자기야, 가드 좀 올려줄래?

feat. 등산스틱

 등산에 스틱이 필수는 아니지만 장비빨을 세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근력 탄탄하고 관절 튼튼하면 뭐가 문제겠느냐마는 장시간 산을 타야 한다면 폴대가 있어야만 몸에 무리가 덜 간다.

 근데 폴 없이는 등산이 영 어려운 사람이라면, 코스 난이도를 제발 낮췄으면 좋겠다.

 소싯적 생각하고 꾸역꾸역 산에 발을 디딜 것이 아니라.


 길이 험할수록 스틱은 무용지물이다. 양 손으로 밧줄이나 지지대 등을 붙잡아야 하는 코스에서 폴대는 애물단지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번거롭더라도 난코스 앞에서 미리 폴을 접어 가방에 도로 집어넣고, 경사가 완만해졌을 때 다시금 꺼내면 된다. 

 문제는 스틱 넣었다 뺐다 하기도 귀찮을 만큼 힘이 빠졌을 때.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등산 폴이 갓 유행하기 시작했을 땐 접이식이 아닌 1단 스틱(!)도 꽤 많았다. 스키 폴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스틱 사용 요령도 익숙지 않던 시절이라 좁은 길목마다 얼마나 민폐였는지 모른다.

 곧이어 채널 돌릴 때마다 온갖 건강프로그램에서 쇼닥터들과 운동코치들이 나와 '노르딕 워킹'을 홍보했고,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해 양 팔을 번쩍번쩍 휘저으며 지구 한 바퀴 돌 기세로 곳곳을 누비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 

 남편은 오래도록 하이킹 폴을 쓰기 싫어했는데, 휴대성과 효율성이 명백한데도 '굳이 필요 없다'며 버티던 이유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민폐라고 손가락질하던 바로 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저 인간 완전 꼰대라고 수군댔는데, 내가 꼰대가 되어야만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아니 아니, 내가 꼰대일 리 없다는 마음에 애써 '노오력' 하는, 바로 그런 마음으로. 

꼰대인들 어떠하리, 스틱인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 들 어떠하리.

 나는 이미 '으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등산이 취미인 사람이거늘...

 고도가 높아질수록 등산로는 좁아진다. 가늘고 가파른 길목에서 배우자와 다정하게 손 잡고 나란히 갈 수 없으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보니, 그의 폴대가 어느 대목에서 왜 거슬리는지가 명확해졌다. 

"자기야 스틱 좀 앞으로 들어줄래? 팔꿈치 90도로 자기 앞에 보이게."

"자기, 스틱 좀 앞으로. 팔꿈치 구부려서. 그렇지 그렇게"

"자기, 스틱 좀 계속 앞으로 들고 있어 봐"

"야, 가드 올리듯이 좀 들어줄래"

야, 가드

 폴대를 항상 손에 들고 있는 게 아직 습관이 되기 전이다.

 UFC 선수들이 항상 가드를 올리고 있듯이 양 손을 항상 내 몸 앞쪽으로 들고 있어야 하는데 손에 아무것도 들고 다니지 않았을 때처럼 양 손을 편하게 아래로 떨구고 있으면, 자연스레 뾰족한 폴 끝이 뒤를 향할 수밖에 없다.

 평지라면 뒷사람의 발치에서 걸리적거릴 뿐이겠지만 경사면에서 앞사람의 폴은 뒷사람의 발치가 아닌 시야에 떨어진다. 대못 같은 모서리가 눈 앞에서 계속 아른거리면 아주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우리야 폴 사용이 아직 익숙지 않아서 그렇다지만, 5인 이상 집합 금지를 잘 지키고 있는 건지 의문스러운 몇몇 요란스러운 산악회의 경우 종종 스틱을 위협스럽게 들고 다니는 모습에 절로 눈을 흘기게 된다. 

 주로 가장 힘든 코스가 문제다. 체력이 달리는 바람에 폴을 자신의 몸 앞으로 계속 들고 있을 힘이 빠져서 뒷사람을 위협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폴을 잘 들고 있어도 좁은 길에서는 한 번 더 신경 써 줘야 한다. 바로 폴대를 옆으로 살짝 치워 주는 것이다. 

 좁은 길목에서는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 살짝 옆으로 비껴 서서 기다려 주는 것이 기본적인 등산 매너다. 근데 이때 옆.으.로. 돌아서지 않은 채로 폴대를 들고 있으면, 거기다 걸을 때와 마찬가지로 폴을 내 발 바깥쪽에 그대로 두고 있는 상태라면, 상대방이 지나갈 수 있는 폭은 여전히 좁을 수밖에 없다.

 왼쪽으로 비켜섰다면 두 폴대를 모두 왼쪽 끝으로 살짝 기울여주거나 오른쪽이라면 오른쪽으로 두고, 혹은 아예 옆으로 돌아서서 스틱을 들고 있는 양 손을 몸과 함께 옆으로 나란히 둘 수 있어야 한다. 가만히 멈춰 주는 것 만으로는 진짜 좁은 코스에서는 약간 부족하다.


 힘이 빠지면 배려고 뭐고 어떻게든 빨리 저기까지만 가서 쉬고 싶은 마음만 가득할 수밖에 없다. 얼른 이 구간을 빠져나가서 물도 마시고 잠깐 간식도 먹고 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주변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삼각산으로 불리는 이유. 저 뒤에 봉우리 세 개, 삼'각'이 보인다.

 가드도 힘이 있어야 계속 들고 있을 수 있다. "아 아직 3세트인데 벌써 점점 가드가 떨어지고 있네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체력을 기르던가, 체력을 기를 수 없다면 전략을 기르던가. 팔에 힘이 빠져서 자꾸 뒷사람을 공격하지 않도록. 




커버 이미지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WwrQnL0Gi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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