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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Jun 07. 2021

LUSH 비누의 배신 아닌 배신

feat.  부부, 그리고 5월의 등산


 요즘 저녁에 제과제빵학원에서 제과를 배우고 있는데 애매하게 시간이 뜰 때가 있다. 남이 늦는 건 괜찮아도 내가 늦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성격이라 이리 서둘, 저리 서둘 하다 보면 기본 10분에서 길게는 30분까지 남아도는 것이다.

 커피를 사 마시거나 책을 읽기에는 애매하게 짧고, 핸드폰을 또 들여다보고 있기에는 피곤할 때면 주로 올리브영을 찾는다. 뚤레뚤레 매장 안을 돌다가 립밤이나 핸드크림을 집어 드는 식이었는데,

 학원 근처에는 러쉬(Lush) 밖에 없는 바람에.


 러쉬 매장은 근처만 지나도 비누향이 아찔하다. 자연에서 얻은 정직한 재료,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윤리적 기업, 비건, 핸드 메이드, 다 좋다. 다 좋고, 비싸다. 좋은 건 알지만 내 돈 주고 사기에는 솔직히 좀 아까운 게, 녹기는 또 엄청 빨리 녹는다. 무궁화표 비누마냥 하염없이 쓸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서도...

 향이 너무 세다는 핑계로 피해 다니던 러쉬를 언제부터 턱, 턱 사게 되었던가. 수입도 적은데 한 덩이에 몇 만 원씩 하는 비누를 사는 건 역시 과시적 소비성향에 해당하는 걸까. 

https://unsplash.com/photos/XT1BJhMkHy4

 러쉬를 선물하고, 선물로 받으면서 시작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내 돈 주고 사기는 아깝지만 내가 갖고 싶은 걸 선물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에게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이냐는 고려하고 반영하기 쉽지 않아서, 대개 자기 기준에서 좋은 걸 선물하고는 한다. 내가 냄새나거나 더러워 보여서는 아니었다고 믿고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써 보니까 좋기는 좋다. 예쁘기도 예쁘지만 무엇보다 피부 자극 걱정이 없다. 워낙 피부가 얇은 탓에 지문이 다 닳아서 허구한 날 물건을 떨어뜨리고, 마스크 끈 닿는 자리 그대로 곪아 터져서 피 보기 일쑤다 보니, 병원비와 약값 아낀다는 핑계로, 어느덧 좋다는 건 가격 불구하고 사는 소비 요정이 되었다. 

난 이 향이 더 좋은데...

 향? 솔직히 고를 수만 있다면 무향이었으면 좋겠지만, 러쉬에서 무향을 기대할 순 없다. 피부 때문에 쓰는 거니까 향 정도는 남편 취향에 맞춰서 살 수 있다. 

 그래도 그 향을 고를 줄은 몰랐지...

https://unsplash.com/photos/5BfKhN6tkTY

 신랑의 눈빛은 확고했다. 달큼하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꿀까지 들었다니까 피부에는 또 얼마나 좋겠냐며 이번에는 이걸로 꼭 사고 싶다고 꿍얼거렸다. 실은 처음부터 이 비누를 원했던 거다. 한 번 구경이나 갈까? 뭐 사고 싶은 거 없어? 딱히 없다는데도 굳이 들어오더니만...

 신랑은 한 동안 악명(?) 높은 강남 러쉬에서 열심히 사 온 일명 '꿀비누'를 신나게 써댔다. 달큰한 향기가 화장실은 물론 안방과 거실까지 가득 채우던 나날들이었다. 러쉬 비누 자체로 향이 강하기도 강하거니와 꿀비누가 특히 유난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전에 쓰던 비누와 달리, 그 강렬한 꿀 냄새가 배우자 몸에서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산만 아니었더라면 아직도 꿀 냄새를 풍기며 다녔을 텐데.

https://unsplash.com/photos/bCRUH6mXiq0

 그날의 등산 이후로 우리 집 꿀 비누는 찬밥신세로 전락했다. 이 비누가 향이 얼마나 강하냐면 저녁에 소파에 앉아 배우자 어깨에 살짝 기대기만 해도 아침에 씻고 나간 그 꿀 냄새가 아직도 풍길 정도다. 그만한 향기를 풍기며 산에 갔으니 벌이 안 꼬일 리 만무하다. 

 그랬다. 5월의 산은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보다도 생명력이 넘쳐났다. 잘 보이지도 않는 하얗고 작은 꽃들이 덩치에 맞지 않는 향을 공기 중에 가득 실어 보내는 계절,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 나면 생명의 소리가 가득했다. 벌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도 물론.


 따스한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너럭바위에 자리를 잡고 땀 좀 식히려면 벌은 물론 큼지막한 파리들까지도 반갑다고 모여들었다. 세탁세제며 섬유유연제며 다 무향만 쓰는 데 겨우 비누 주제에 이토록 치명적인 향이라니. 쉴 때 마다 남편한테 신신당부했다. 꿀비누는 아니야, 아니야.

 달콤했던 꿀 냄새는 심지어 반나절 동안 뿜어 낸 땀냄새와 섞여 여태껏 맡아보지 못한 느끼한 체취로 탈바꿈했고, 그날 부로 꿀 비누는 녹는 일이 없다. 나도 신랑도 다른 비누만 쓰는 바람에 러쉬 꿀비누는 건강한 비건 방향제로 전락했다. 


 꿀비누 사용을 그만뒀는데도 한 동안 그의 몸에서는 단내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았다.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온 몸뚱이에서는 묘하게 묵은 단내가 나서, 신랑은 킁킁 제 냄새를 맡더니만 배신당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내 몸에서 이런 냄새가 나지, 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북북 몸을 닦는 모양새가 웃겨가지고,

 그래, 돈 값 했다, 하는 마음도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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