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차차 육아 육아 #17
짧은 육아의 역사 중 패러다임이 전환된 사건이 있다. 이렇게 말하니 너무 거창한데, 별 건 아니고 육아의 주체인 부모가 행복해야 한다고 우리 철학을 정한 거다.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듯 보이지만, 실상 쉽지 않은 얘기다. 부모가 되면 자신의 충족보다는 아이의 만족이 우선이니까. 우리 역시 그렇듯 강요된 희생의 삶을 살았지만, 말 그대로 전환점을 맞았다. 그리고 그 계기가 된 건 괌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2017년 여름, 둘째가 20개월, 이제 겨우 사람 유사한 생명체이던 시절이었다. 운영하는 업장의 내부 수리를 맞아 일주일의 짬이 났다. 그전까지 신혼여행 외에는 해외로 나가본 적이 없었던 우리 부부는 급히 계획을 짜서 나갈 궁리를 했다. 당시 여기저기 돈 나갈 데가 천지라 결코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다. 갑작스럽다 보니 비행기며 호텔도 죄다 비싼 데다 많이 컸다고는 해도 아직 첫째가 해외로 나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게다가 둘째는, 그랬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행을 감행할 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내부 수리가 마치면 나는 영업시간이 마구 늘어날 처지였다. 앞으로 휴가도 마땅치 않았고 기약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해 여름을 놓치면 둘째도 이제 온전히 한 사람 몫의 비행기 삯을 내야만 할 참이었다. 부담은 돼도 그만큼 가치가 있는 여행이었다. 며칠 동안 머리를 맞대던 우리는 그만 확 질러버렸다. 목적지는 태평양의 미국령 섬, 괌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교적 싸고 가까웠고 적은 시차에 정보 얻기도 수월했다.
그런데 정작 여행은 쉽지 않았다. 아이 둘을 동반한 여행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어, 욕심에 그득그득 욱여넣은 일정은 반도 채 소화하기 어려웠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라 뭘 해줘도 반기질 않았으니 이래저래 너무 일렀고, 또 무리한 여행이었다.
대표적인 놀잇거리인 해양 스포츠나 바다 수영 자체가 여의치 않았다. 마음먹고 탄 돌핀 크루즈는 돌고래가 보이질 않았고 해변 근처에 가면 멀쩡하던 첫째가 무섭다고 자지러졌다. 하릴없이 쇼핑몰이나 마트를 방황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만족도는 떨어졌다.
총 4일의 짧은 일정 중 하루 반 만에 기진한 우리에게 남은 이틀 반은 고난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쳤다고 이것들을 데리고 바다 건너온 건가. 현실을 돌아볼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 지끈거렸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호텔에 딸린 수영장에 가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는 않았던 건, 둘 다 아직 물에서 혼자 있을 수는 없다 보니 인당 하나씩 붙들고서 유아용 풀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수영장에 다녀왔건만 머리가 전혀 젖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면서 시간만 죽였다. 하나도 안 즐거웠다. 그렇게 지쳐가던 우리에게 무언가가 보였다.
그 호텔은 작게나마 자체적으로 워터파크를 운영 중이었다. 저기 너울거리는 인공 파도와 거대한 슬라이드가 불행한 어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놀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미끄럼틀이라도 한 번 타고 가면 소원이 없을 거 같았다.
퍼뜩, 생각이 지났다.
왜? 그냥 하면 안 돼? 번갈아 다녀와도 되잖아.
마음먹은 나는 선발대를 자처했다. 심상치 않은 내 표정에 걱정하던 아내는 홀로 두 아이와 남겨졌다. 그 모습을 보고 마냥 여유 부릴 수는 없어 난 곧장 커다란 슬라이드로 서둘렀다. 그리고 가드의 지시에 따라 내려왔다. 불과 5분도 안 걸린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나는 진짜 괌에 다녀왔다. 그래, 이게 여행이었다. 신나고 행복했다.
당장 아내에게 달려갔다. 여전히 영문 모른 채 있는 걸 일으켜 내가 탔던 슬라이드를 가리켰다. 얼른 다녀오라고. 처음에 주저하던 그녀는 달뜬 내 표정을 보고는 조심히 길을 나섰다. 그리고 몇 분 후, 나와 같은 얼굴이 되어 돌아왔다. 흥분의 기운이 가라앉질 않았다. 미친 사람들처럼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린 번갈아 가며 어른들만의 유흥을 누렸다.
뚜껑 달린 슬라이드 안 닫힌 슬라이드 가리질 않았다. 괌까지 와서 천혜의 자연을 두고 고작 워터파크에서 노는 건 아무래도 촌스러운지 마침 사람도 별로 없었다. 궁금해하는 큰 아이도 몇 번 함께 타기에 이르렀으니 온 식구가 알차게 잘 즐긴 셈이었다. 비록 바닷속의 살아 숨 쉬는 생물과 만나고 산호초 해변의 낭만을 즐기는 건 아니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그 미끄럼틀이 휴양지 최고의 프로그램이었다.
정확히 그 시간을 기점으로 우리 여행의 전체 분위기가 달라졌다. 부모는 아이들의 칭얼거림을 기꺼이 감수했다. 너그러워지고 들뜬 부모의 분위기에 아이들도 덩달아 잘 놀았다. 모두가 만족스럽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했다.
지나고 보면, 분명 운이 좋았다. 대기 줄이 없어 육아 전담의 부담이 한결 덜했고 유아용 풀장과 슬라이드 사이의 동선도 멀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로 다른 여행에서 비슷한 상황을 만들려고 해도 이때만큼 잘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일 덕분에 이후 작은 것이라도 우리의 놀이를 찾아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하게 된 건 분명한 변화였다. 그게 아이를 동반한 여행의 건강한 방식이라는 걸 몸소 깨달은 거다.
어디 여행만 그렇겠는가. 당연한 소리겠지만, 돌보는 사람이 즐겁지 않고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잘 될 리 없다. 아무리 근사한 걸 계획해도 부모가 괴롭고 허덕인다면 좋은 것 그대로 전해질 리 만무하다. 게다가 그런 경우라면, 아이들도 눈치가 뻔하다.
실상 아이를 위한다는 희생은 때론 그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바로 우리가 절실히 체득한 진리다. 일단은 부모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 이게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언젠가부터 여행의 일정 중에 아내와 내가 원하는 걸 꼭 집어넣는다. 아이들이 많이 자라기도 했지만 그래 봐야 전체 중에 일부라 큰 무리도 없다. 아이들이 못할 건 애초에 배제하니 아직은 우리 욕심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스레 지겹다거나 힘들다는 볼멘소리는 나오곤 한다. 애들은 자기 위주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투덜거림에 이제는 당당하게 말해 준다. 어찌 보면 일종의 세뇌일지 모르지만.
“얘들아, 엄마 아빠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한 거야. 엄마 아빠 원하는 것도 하는 게 맞는 거야. 그러니 조금만 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