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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기 Aug 06. 2020

자긍심과 저항심의 사이



1. 자긍심


몇 달 전 한참 국뽕에 취해 있던 시절, 어느 유튜브 영상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영상의 내용은 한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생활하면서 겪은 기이한 체험에 대한 소개였다. 그 외국인이 지적한 내용들은 이런 것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외출한 상태로 택배가 오면 그냥 집 앞에 두고 가라고 한다. 심지어 공동주택인 아파트에서는 택배를 한 곳에 하루 종일 진열해 두고 알아서 찾아가라고 하기도 한다. 더 심각한 건, 동네 작은 마켓들이 마켓 앞 도로에 물건을 내놓고 판매를 한다는 것이다. 카페 테이블을 지갑으로 선점하는 나라도 한국이 유일할 듯하다. 자신의 모국에서는 바에서 자신이 마시던 술을 들고 화장실에 가야 한다. 누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제 술을 훔쳐갈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그 영상을 보며 나는 머리가 띵 해지는 경험을 했다. 한국인 때문이 아니라, 그 외국인 때문에. 택배건, 슈퍼마켓 앞 진열된 물건이건, 심지어 카페 테이블 위의 지갑일지라도 한국 사람이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내가 이해가 안 됐던 건, 그걸 마음껏 가져갈 수 있다는 외국인들의 사고 때문이었다. 왜 일까? 왜 이렇게 다른 사고가 존재하는 걸까? 내게 있어 그 이유는 자긍심 때문이다.

나는 나의 가치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다. 쓸데없는 짓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니, 내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결론은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다.


나를 돈으로 환산한다고? 얼마를 줄 건데? 얼마에 바꿀 수 있는데?


그러니까 테이블 위의 지갑을 몰래 가져가지 않는다. 그건 나의 자긍심과 지갑의 가치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인데, 그 지갑이 얼마짜리 명품이든, 그 지갑 안에 얼마의 현금이 들었든, 내 가치보다 지갑의 가치가 높을 일은 절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왜 그 외국인들은 그런 사고를 갖게 되었을까?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 같은 건 원래 없었을까? 아니면 푼돈에 팔아 넘겨도 될 만큼 자긍심이 작은가? 그도 아니면,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비도덕적 경제 행위는 아무 관련이 없는 거라고 생각하나? 난 아직도 그 답이 몹시 궁금하다.

백만 원이 든 지갑을 훔쳐 얻는 이득이 자신에 대한 믿음과 애정보다 정말 더 절실하고 소중한 건지, 혹은 자신이 행하는 비도덕적 행위와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권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인지, 그들의 생각을 진심으로 알고 싶다.

결국 나를 나로 살게 하고,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나를 옳게 만드는 자긍심이다.


2. 저항심


나는 2남 1녀 중 둘째로 자랐다. 아들들 사이 독녀로 아빠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았지만, 엄마에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자라면서 나는 엄마에게 참 모질게 많이도 맞았다. 맞다가 기절한 일도 부지기수였으니, 내가 생각해도 우리 엄마가 나를 참 독하게 때렸구나 싶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혹시 계모인가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다. 친모이고, 내 엄마가 나를 학대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최소한 그 당시에는.

이 말은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는 뜻이다. 사고나 의식이라는 건 사회 환경에 따라 변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친부모일지라도 아이를 가혹하게 때리면 아동 학대가 되지만, 내가 자라던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 세끼 먹이고 안전히 잘 자리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부모의 역할에 부족함이 없다 여겨지던 시절이었고,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 건 당연한 훈육이었다. 아동 학대라니, 당시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토록 숱하게 맞았지만, 맞았던 고통이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다만, 다른 고통이 남아 있기는 하다. 그 고통의 이름은 억울함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맞으면서 내가 엄마의 화풀이 대상이 되고 있다는 자각을 종종 했다. 내 잘못보다 엄마의 심기가 좋지 않아서, 귀한 큰아들, 너무 어린 막내아들에 비해 때리기 만만한 게 나라서. 그보다 더 나빴던 건, 때리면 맞아야 하는 내 입장이었다. 반항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약자인 아이가 강자인 부모에 대항하겠나? 그냥 맞아야지.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내 마음에 억울이 쌓였다. 나를 때리는 사람이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으니까.

엄마와 나 사이는 점점 비틀어졌고, 당연히 나는 엇나갔다. 엄마가 무섭지만, 미웠다.  


그래서? 더 맞았다, 물론!


고등학생이 되고 머리가 굵어진 다음엔 나도 엄마에게 죽어라 반항했다. 당시의 나는 엄마와 싸우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그 결과 엄마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하나 흐르게 됐다. 그 강은 여전히, 유유히 흐른다.


나는 지금도 억울한 감정을 잘 못 참는다. 어느 날 문득 갑자기 찾아온 오래된 억울함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그게 내 것이 아니더라도, 저거 억울하겠구나 싶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건 성장 과정의 영향 때문이라 생각한다. 마음에 쌓였던 억울이 풀리지 않아 독기가 되었고, 그것이 내 마음 밑바닥에 깔려 약하나마 스물스물 그 기운을 피어 올리는 것이다. 그 환경 아래 마음이 자라, 난 억울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내게 있어 저항이란 내 삶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3. 자긍심과 저항심 사이, 인간애.


자, 그럼 나는 나를 낳고 키워준 엄마를 미워해야 하는 걸까? 끊임없이 저항하고 싸워야 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나는 내 엄마가 자신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나를 키우던 시기의 엄마가 많이 힘들었고, 그걸 스스로 해결하기엔 성숙하지 못했던 사람임을 인정할 뿐이다. 물론 아직도 가끔 옛 기억에 울컥울컥 하고 자식으로서의 나는 여전히 엄마와 풀어야 할 것이 많고 많다. 하지만 같은 여자로서, 아이를 바르게 키워내야 하는 부모로서의 나에겐 내 엄마가 애틋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모든 감정은 결국 인간애를 기본으로 해야 옳다.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도, 옳지 않은 것에 대한 저항도, 그 감정과 사고가 ‘인간애’라는 길을 걸어야 목적지까지 바르게 갈 수 있다. 나에 대한 믿음도, 너에 대한 싸움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위에서 결코 벗어나서는 안 된다. 원하는 최종 목적지에 닿고 싶다면.


그렇게 나는 오늘 내가 가야 할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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