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화 속으로 (71-Into the Fire, 2010) 리뷰
폭풍 224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은 암호명 ‘폭풍’이라 불리는 기습적이고 불법적인 남침을 강행한다. 전쟁이었다. 선전포고 없는 무차별적인 공격에 남한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개전 후 불과 2개월이 안되어 국가의 존망을 건 최후의 방어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영화는 낙동강 방어선 속 포항에서 펼쳐진 학도병들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곳에서 그들은 가족과 고향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다. 지금은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71명의 학도병은 우리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개인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학도병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포항을 사수하던 3사단의 강석대 대위는(김승우 분) 포항을 떠나 낙동강 전선으로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포항을 비워둘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71명의 학도병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총 한번 잡아본 적 없는 71명의 학도병들은 각 총 1정과 실탄 250발을 지급받고 전투경험이 있던 오장범(최승현 분)이 중대장으로 임명된다. 그들은 강 대위에게 묻는다. "여를 지키라는 겁니까. 우리끼리만요", "포항을 꼭 지켜야 합니까", "언제까지 지키면 됩니까", "안 가면 안 됩니까", "빨갱이들 쳐들어오면 우예합니까", "도망치면 안 되지예".
이 모든 질문을 듣고 강대위는 그들에게 묻는다. "학도병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너희들의 조국이다 반드시 지켜낼 거라고 믿는다". 이내 3사단의 병력은 낙동강 전선으로 이동하고, 학도병들은 고작 실탄 한 발씩을 쏘는 훈련을 마친 채 강 대위의 부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학도병은 군인이다
포항은 비교적 안전하다는 정보상황과 다르게 박무랑(차승원 분)이 이끄는 766부대는 포항으로 향한다. 그들은 포항을 거쳐 최단 시간 내에 부산을 함락시키려 한다. 강 대위의 부대는 북한군의 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다리를 폭파했지만, 766부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맨몸으로 도강하여 전진한다.
학도병들은 포항여중에 도착한 766부대와 마주치고 몇 차례의 교전을 벌인다. 그 와중에 학도병 중 한 명인 달영(신현탁 분)이 766부대의 포로로 잡히게 되고, 달영은 고문과 취조를 당한 끝에 포항여중에 학도병들만 남아 그곳을 지키고 있음을 털어놓는다.
이야기를 듣고 박무랑은 달영을 데리고 포항여중으로 향한다. 이내 포항여중에 도착한 박무랑은 그를 보고 우왕좌왕하는 학도병들을 향해 정확히 12시 정각에 공격할 예정이며 게양대 위 태극기 대신 백기를 걸고 투항하면 전원 살려주겠다 말하고 돌아간다.
술렁이는 학도병들 사이에서 구갑조(권상우 분)는 항복하자고 말하고 이에 중대장 장범은 그만하라며 소리친다. 곧 갑조와 장범의 주먹다짐이 벌어지고 둘은 피가 터지도록 싸운다. 그때, 운동장 한편에서 총성이 들려온다. 일전에 총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다 그냥 죽여달라는 동생 용만(김혜성 분)의 부탁을 듣고 형 용배(문재원 분)가 그를 총으로 쏜 것이다. 운동장은 잠잠해지고 갑조는 결국 친구 풍천(김윤성 분)과 함께 떠난다.
갑조와 풍천을 뒤로하고 남아있는 학도병들은 전투를 준비한다. 창고를 뒤져 화염병을 만들고 수류탄과 반합을 묶어 부비트랩을 만든다. 철조망과 드럼통으로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총기를 손질한다.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 '포화 속으로'라 쓴 태극기를 머리에 묶는다.
장범은 전투를 준비하는 학우들에게 싸우자고 외치며 그들에게 묻는다. "강석대 대위가 우리에게 물었다. 학도병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그리고 다시 외친다. "학도병은!". 이에 학우들은 대답한다. "군인이다!". 그렇게 학도병들은 죽기를 다짐하고 최후가 될지 모르는 싸움을 준비한다.
* 감동적인 반전과 그들의 장렬한 최후는 영화를 통해 확인하자.
포항여중 전투가 꿈에 나와 그때마다 온몸이 흠뻑 젖는다
영화와 실제 역사는 다른 점이 많이 있다. 71명의 학도병이 모인 과정과 그들의 구성도 영화와는 다르다. 학도병은 실제로는 15~22세의 중학생과 대학생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실제 포항여중에서의 전투도 오후가 아닌 새벽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손주형(전 손용길) 옹은 당시 학도병으로서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영웅이다. 그는 과거 언론들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전쟁을 경험한 세대조차도 가슴 아픈 역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며 “자라는 세대에게 ‘우리는 이렇게 싸워 나라를 지켰노라’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다 담을 수는 없지만 그의 인터뷰에서 유난히 사무치는 두 가지 내용이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전우가 다가오는 북한 정찰병에게 총을 쏘았을 때 적막 가운데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나 슬프고 답답했다고 한다. "아이고, 어머니!". 그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족의 짐승의 외마디 같은 비명이 평생 그의 마음속에 사무친 것이다.
새벽 3시부터 오후 2시까지 장장 11시간 30분 동안의 혈전 끝에 전사자 48명, 포로 13명, 행방불명자 4명, 후송자 6명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포항시민은 안전하게 피난을 갈 수 있었고 병력의 철수에도 도움이 되어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손주형 옹은 “먼저 간 전우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한 달에 한두 번은 포항여중 전투가 꿈에 나와 그때마다 온몸이 흠뻑 젖는다.”라고 말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날의 피 비린내와 총성은 아직도 여전한 것이었다. 옆에 있는 우리에게도.
이름 석자의 의미
겨레에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 조국을 지키는 보람찬 길에서 우리는 젊음을 함께 살으며 깨끗이 피고 질 무궁화 꽃이다 -전우 (군가)-
어릴 적에 참전기념 박물관이나 참전비를 방문할 때면 '얼굴도 모르는데, 이름을 왜 적어 놓은 걸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곳에 적힌 이름을 보면서 내가 알고 있는 이름과 비슷한 이름이 나오면 신기하기도 하고 그 사람이 참전했다 상상하니 감정이 이입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참전영웅이 불리는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평범한 우리가 누군가 내 이름을 기억해 주면 좋아하듯 그들 또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준다면 좋아할 것이다. 남은 것이 이름밖에 없으니.
기억할 것이 이름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 석자 안에 담긴 인생을 생각한다면 추모비의 무게는 비석의 자체의 무게보다 더 크게 쿵 하고 마음을 덮쳐온다. 또한 아직 적히지 못한 이름이 남아있다. 그 역시 기억할 수 있도록 찾는 것도 중요하다.
기억하는 것에는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일단 할 수 있는 것은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다. 잊고 살다가도 문득 기억하는 것은 평범한 우리가 우선 할 수 있는 일이다. 나 역시 손주형 옹과 아래 소개드릴 분의 성함 석자를 시작으로 한 명씩 기억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
김춘수 시인은 말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겨레의 무궁화로 태어나 포화 속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그들의 이름 석자를 불러보며 기억한다면 그 아련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불리지 못하는 이름의 씨앗 또한 꽃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영화 속 장면의 모티브가 된 학도병 이우근이 쓴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다. 처음 읽고서 들었던 생각은 중학교 3학년 나이의 학생이 전쟁터 한가운데서 썼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숙하다는 것이었다. 나라면 목숨을 건 전쟁의 공포 속에서 이런 생각을 담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이 편지가 눈물 나게 사무치는 이유는 평범한 중학생 남자아이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이는 문득 상추쌈이 먹고 싶고 옹달샘의 차가운 냉수를 마시고 싶다 말한다. 우리가 ‘엄마 나 고기 먹고 싶어’ 하듯 내뱉는 것처럼 평소 먹던 것이 생각난다는 평범한 아이의 말을 부디 천천히 그리고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한다.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학도병 이우근
-1950년 8월 10일, 쾌청-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十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二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님,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저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 글을 씁니다. 괴뢰군은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괴뢰군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들은 겨우 七一명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비눗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제가 빨아 입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 한 내복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壽衣)를 문득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 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천주님은 저희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어머님!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거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어머님!
아, 놈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살아서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싸,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이우근은 1950년 8월 11일 전사하였다. 이 편지는 그의 주머니에서 발견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8siKj6UHRE - 이 영상은 영화와 실제 역사가 다른 점을 설명해 준다.
***실제 역사는 손주형 옹을 인터뷰한 기사 두 편을 참고했다.
"어머니"하고 내 총에 쓰러졌던 그는 같은 말 쓰는 동족이었다 < 사회종합 < 사회 < 기사본문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joongboo.com)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포항여중 전투 학도병들, 그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