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 한 친구가 전학을 가게 되어 반 전체가 울음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처음엔 다들 무덤덤했지만, 전학을 가게 된 친구가 앞에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하다 눈물을 흘렸고 그제야 너도나도 울기 시작했다. 아마 순수한 마음에는 소중한 친구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꽤 큰 아픔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옛날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위와 비슷한 장면들이 있다. 졸업식 날이면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르며 울음바다가 되는 장면이다. 친구가 전학을 가게 되어 울었던 우리들처럼 졸업 이후에는 다시 얼굴 보기가 힘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새는 이렇게 울음을 터뜨릴 일이 없다. 헤어짐의 순간이 오더라도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든 쉽게 연락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종 채팅을 비롯해 전화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심지어는 영상통화도 가능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중고등 학교를 졸업할 때는 헤어지는 순간이 슬프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는 기술의 발전이 물리적인 거리를 극복할 수 있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거리로 인해 인연이 끊어질까 걱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거나 다툼으로 인해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걱정할 뿐이다.
마음에 거리에는 시간이 참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정말 친한 사이 같다가도 차츰 시간이 지나 서로 다른 길을 가다 보면 곧 잊히기 마련이다. 더구나 다툼 때문에 헤어진 인연도 상처가 아물듯이 시간이 지나며 점차 잊힌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 어른들의 인연은 어린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인연이면 다시 보겠죠'. 일을 하다 부상으로 입원하셨던 아버지가 퇴원하실 때 같은 병실을 쓰신 분이 하신 말씀이다. 같은 병실을 쓴 것이 인연이라서 하신 말씀은 아닐뿐더러 입원해 있던 시간이 길어서 그만큼 친분을 쌓았던 것도 아니다.
두 분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시다 보니 서로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셨고, 역시나 남자는 축구로 맺어진 인연이 크지 않은가. 알고 보니 오래전 조기 축구회에서 두 분이 꽤 자주 공을 차셨다고 했다. 오래전에 알고 있다 다시 보게 된 반가운 인연이었다.
그러나 '인연이면 다시 보겠죠'라는 말에는 정말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만나면 말고 아니면 아니라는 느낌이다. 다시 만난 반가운 인연임에도 굳이 잡으려고 애를 쓰지 않는다.
요새는 옷깃을 스칠 일이 참 많은 것 같다. 인연을 만들기가 쉽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인연 외에도 더 많은 인연을 맺고 싶어 한다. 특히 앞서 말한 기술의 발전을 통해 우리는 물리적 거리를 극복해 각지에 사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 쉽게 맺는 인연인 만큼 쉽게 헤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그만큼 억지 인연으로 인해 굳이 받게 되는 괴로움도 빈도도 높아진다. 그래서 나는 한때 이런 괴로움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했고, 억지 인연을 만들기 위해 매달리지 말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찾게 되었다.
문제는 내가 스님의 말씀을 완전히 잘못 이해해 더 큰 괴로움에 직면하게 된 적이 있었다. 스님께서는 억지 인연을 맺는 것에 매달리지 말라는 말씀 외에도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인간관계에 대한 기준을 높여 정말 소수를 제외하면 억지 인연이라는 억지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혀 맺은 인연조차 끊었다.
그리고 이렇게 억지로 인연을 끊는 행위는 억지 인연을 맺으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 더욱더 괴로운 것이었으며, 이런 사실을 알게 돼서야 내가 괴로워한 만큼 그들도 괴로웠을 시간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알 수 없는 것은 '그렇다면 어떤 인연이 진정한 인연인가'라는 의문이다.
아마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오로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만이 답해줄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순간 새로운 인연을 만들 때 생기는 '잡고 싶다'라는 마음보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진정한 인연에 조금은 가깝지 않을까. 법정 스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일기일회 개인의 생애로 볼 때도 이 사람과 이 한때를 갖는 이것이 생애에서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생각한다면 순간순간을 알차게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이고 만날 수 있다면 범연해지기 쉽지만, 이것이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아무렇게나 스치고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놓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법정 스님-
물론 정말로 끝인 죽음을 당장에 앞두고 있지 않은 이상 인연을 맺을까 혹은 스쳐 지날까, 더 나아가서는 이어갈까 끊을까 하는 끊임없는 고민이 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유명한 노랫말처럼 인연이라면 정말로 먼 길을 돌아서 다시 만나게 될지만을 궁금해한다. 마치 '인연이면 다시 보겠죠'하는 어른들의 말처럼.
다만 어느 순간에도 분명한 사실은 억지로 인연을 끊는 것은 언제나 괴롭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인연의 확률은 참으로 희박하다. 오히려 희박한 정도를 넘어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몸은 별이 폭발할 때 퍼진 다양한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상상조차 안 되는 광활한 우주를 떠돌던 별 가루들이 태양계 속 작디작은 지구에서 뭉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더구나 이런 우리들이 같은 시대에 같은 곳에서 한때를 보낼 수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확률이다. 그래서 억지로 인연을 끊는 행위는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을 거스르는 불가능한 행동이라 괴로운 것이다.
자연재해로 인해 뉴스에 슬픈 소식이 전해질 때면 우리는 아픈 마음을 경험할 수 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소식이지만, 어쩐지 내 일인 것 같다. 그리고 각종 사건 사고들을 비롯해 인재에 의해 비보를 접할 때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이미 우리가 이미 인연이라 그런 것 아닐까. 설명할 수 없는 확률로 맺어진 지금의 지구 속 우리는 이미 인연이라, 이 확률을 거스르는 행위를 접할 때면 그토록 괴로운 마음이 드는가 보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서로 미워하며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통과 기쁨과 사랑을 함께 나누어 가지기 위해 찾아서 만난 이웃이요 겨레다. 사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 가질 때 진정한 인간이 된다. -법정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