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방인
신혼여행지, 우리의 선택은 하와이였다. 꽉 막힌 공간에서 수백 명의 하객들 앞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느라 진이 빠진 우리에게는 지상낙원이 바로 이곳이었다. 6박 7일의 여정 동안 한 가지, 시어머니 남정숙의 말이 계속 귓가에서 맴돌아 강도는 약했지만 나를 옭아매는 어떤 것의 시작이 느껴졌다. '너, 두고 보자.' 계속해서 사라지지 않는 남정숙의 목소리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현우야, 우리 결혼식에서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었을까?”
“응? 아니, 무슨 잘못? 뭘 잘못했어?”
“아니, 나는 잘 모르겠는데, 혹시 그런 게 있었나 해서”
시어머니의 두고 보자는 이야기는 헛 들은 게 아니었다. 남정숙은 칠공주의 이벤트가 무척이나 거슬렸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연스럽게 공유되어 누구나 거의 비슷한 과정과 분위기로 이루어지는 우리나라 결혼식 문화가 문제였다. 결혼, 누구를 위한 하루일까? 결혼은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는 약속의 자리이며, 한 가정이 생기는 것. 나는 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결혼을 한 것이었다. 그 가정은 현우와 나, 우리의 독립된 가정이었다. 우리 부모님과 현우의 부모님, 안영웅, 장현호가 엮이는 가정을 원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물론 그들을 내 삶에서 제외시킨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적인 정서와 문화에 이미 길들여진 나는 그들이 엮어지는 가정이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도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것이다. 한국에서의 결혼은 그것이었다. 한국사회에서의 결혼은 개인 둘의 결합만을 원하지 않았다. 두 가족 간의 연합, 특히 결혼 당사자들에게는 끈끈한 연합을 요구했다. 그것은 마치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여겨지게 했다. 바로 며느리들에게.
내 결혼식은 우리 엄마의 축제 날이었고, 시어머니 정숙의 평생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날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화장을 하고 고운 한복을 입고 주인공 마냥 손님들을 맞이했다. 양 옆에는 두 아버지들이 자신들의 손님들도 맞이했다. 그러니까 결혼식에는 결혼 당사자의 손님, 당사자들의 각 부모들의 손님까지 총 6명의 호스트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목적은 한 가지,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인데 그날 가장 많은 축하를 받은 사람은 당사자보다도 살아온 세월만큼 결혼식 축의금을 많이 낸 양가 부모님들이었다. 이곳은 그랬다. 요즘 스몰웨딩도 있다고 하나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 웨딩홀이나 호텔 웨딩홀을 대관하여 똑같이 하얀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 화장을 하고, 신부대기실에 앉아 입장을 기다리는 결혼식들은 그들의 부모가 주인공.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결혼식은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제대로 된 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진정 어른이 되기 위한 시작을 함을 응원하는 자리여야 한다. 어떤 문화가 내려오고 또 내려오며 변질된 우리나라의 결혼은 그렇지 못했다. 분명 싹둑 잘려야 하는 불편한 우리만의 문화가 있다.
우린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첫날, 우리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엄마가 정성껏 만든 이바지 음식을 가지고 현우네로 갔다. 낯선 이방인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어머니, 저희 잘 다녀왔어요.”
“다녀왔습니다.”
불편한 한복쯤은 참을 수 있었다. 예쁜 며느리로, 사랑받는 며느리로의 시작에 한복은 필수라고 생각했다.
“고생했다.”
“좀 늦었네”
친정 식구들이 신혼여행을 다녀온 우리 부부를 보기 위해 다녀가는 탓에 시댁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좀 늦었다는 어머님의 말투에는 불편한 심기가 가득했다. 두고 보자는 어머님의 귓속말이 온 마음을 채웠고, 현우를 슬쩍 보았지만 그의 부모에게 집중하느라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머님의 시선도 온통 현우에게 쏠렸다. 한 번씩 아버님이 나에게 말을 던져주셨지만, 그 말은 어머님이 기다렸다는 듯 채 가셨고 이상하리만큼 그들 사이에서 나는 작아졌다. 자꾸만 작아졌다. 그들의 대화에 어떻게든 끼고 싶었다. 비록 주제도 없고 재미도 없었지만 존재, 그랬다. 나는 존재감을 느끼고 싶었다. 현우는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아버님은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하시고, 어머님은 내가 끼어들세라 계속해서 나를 그들과 단절시켰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들이 호명되며 그들만의 대화는 30분간이나 이어졌다. 마치 하루 반나절이 지난 느낌이었다.
“고운아, 가서 저녁 좀 준비하자.”
“네. 어머님”
나는 시댁에 와서 첫마디를 했다. 네, 어머님. 한동안 닫혀 있었던 말문이 열리며 정상적이지 않게 이상한 목소리가 나왔고 겸연쩍은 나는 헛기침을 했다. 어머님은 나에게 앞치마를 건넸다. “보자. 집에서 보낸 거” 마치 흠이라도 잡으려는 기세로 어머님은 찬찬히 이바지 음식들을 살펴보았다.
“개수만 많지 먹을 거는 없네”
“네?”
“함 봐라, 뭐 먹을 게 뭐 있니?”
“아.. 네”
갑자기 울컥했다. 요즘은 거의 주문을 한다고도 하고, 이바지 음식을 생략하기도 한다는 데, 엄마가 남을 시키기 않고, 혼자 손으로 공을 들이고 들여 만든 음식들이었다. 나를 위해. 딸을 위해.
“우리 딸, 가서 좋은 소리만 듣고, 사랑 많이 받아”
그러면서 안겨준 음식들이 천대받고 있었다. 현우를 쳐다봤다. 분명 이쪽을 보고 있던 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어지러웠다. ‘나는 누구지?, 여긴 어디지?’ 저녁 준비를 거들고, 밥을 먹으며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걸 꾹 참았다. 설거지를 하며 결국 터져버린 눈물은 서러움이었을까? 지금에서야 알 것 같다. 그것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 답답함이었다.
“어머님, 무슨 말씀이세요? 개수만큼 먹을 게 이렇게 많은걸요? 평소 이런 음식들 구경이나 해보셨어요? 저를 위해 엄마가 직접 만드신 거예요. 요즘 이바지 음식들 안 하는 추세라던데 이만큼 정성이 또 어딨겠어요. 말씀이 좀 섭섭하네요. 어머님”
평소 나는 관계가 좋든, 좋지 않든 시원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쉽게 주눅이 들거나, 작아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가, 내 아버지가, 새아버지가, 작은 이모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받은 사랑은 나를 단단하게 했고, 또 다른 사랑을 베풀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긴 이상하게 달랐다. 이상한 나라. 괜히 주눅이 들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현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나는 현우를 쳐다보지 않았다. 등지고 누워 소리 죽여 눈물만 흘리다 잠이 들었다.
갑자기 내 인생에 들어온 이 낯설고 불쾌한 상황들,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 결혼을 선택한 누구에게나 이와 같은 날은 있을 것이다. 내가 상상하던 결혼의 시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지만 나는 낯선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마음은 먹었지만 당장 집에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니 아침 8시. 벌써 주방에서는 투다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되었든 이번에는 시어머니의 어떤 말에 나는 꼭 하고 싶은 말을 할 것이라는 각오를 하며 방문을 열었다.
“어머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잠은 좀 잤나? 불편했지?” 어제와는 다른 태세다. 그럼 나도 태세를 바꾸어 다가가기로 작전을 바꾸었다.
“아니요. 너무 푹 잘 잤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댁을 시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네가 편해서 이래 늦잠을 잤네. 원래 시집 첫날 아침은 며느리가 준비하는 거다. 내 여기 앉아서 하는 거 좀 지켜보려고 하는데, 반찬 다섯 가지 정도 한번 해봐라”,
“네?”
원래 그렇다는 이야기에 나는 말문이 그만 막혔다. 분명히 남정숙 여사는 군기를 잡으려 함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귀 뒤로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 제대로 반찬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다섯 가지 반찬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켜서 레시피를 검색할 수도 없는 노릇, 된장찌개 재료를 준비해 찌개를 끓이는 동안 대충 콩나물을 삶아 무치고, 감자를 채 썰어 볶고 계란말이를 하며 계란 프라이를 생각했다. 벌써 40분이 지났으니, 나머지 두 가지는 계란프라이와 김치, 그리고..., 아침 밥상에서 혀 차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리고 거역할 수 없었던 단호한 두 마디.
“안 되겠다. 너희들 매주 주말마다 집에 와서 지내거라”
“내가 좀 가르쳐야겠다” 나는 독립된 자식의 가정을 인정하지 못하는 남정숙 여사와 결혼을 한 게 틀림없다는 것을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9년간 꽁꽁 숨겨둔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려하는 건 나아질 방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나는 현우의 아내로, 장현, 남정숙의 며느리로서의 삶에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는 이야기다. 9년간 조여온 숨통, 그 여파는 내 일에도 전염되었다. 6년을 애써 꾸린 미술학원을 정리해야 했다. 그 당시 내 상태는 지금보다 훨씬 심각해서 무기력함과 우울감이 내 정신과 몸을 온전히 채우고 있었다. 부당함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와 알고 있지만 내 세상 밖에서 관망하는 현우에 대한 미움이었다.
지난 3년간 나는 지나 온 6년을, 그리고 진행되고 있는 내 결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남자를 선택하여 결혼한 것뿐인데, 그 선택이 가져온 각종 사은품들은 주객이 전도되어 나를 가져갔다. 나를 가져갔다는 표현이 좀 마음에 든다. 결혼과 동시에 나를 조금씩 가져가려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나를 꿋꿋하게 지켰다. 우리의 관습 된 문화, 누가 출처인지 알지 못하지만 공유된 정서로부터.., 마침표를 찍을 그 마음을 먹고 나니, 학부모가 며칠 전 사다 준 화병의 꽃이 눈에 들어왔다. 감사한 마음으로 포장되어 온 것보다 빛나게 꽃을 다시 꽂아 화병에 두었지만, 한 번도 물을 갈아주지 않아 누렇게 변한 화병의 물, 그리고 시들어갈 준비를 하는 꽃. 조금 더 일찍 들여다봤다면,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제공하여 예쁜 꽃을 오래 볼 수 있었을 텐데.., 마치 오랫동안 묵혀둔 나의 결혼과도 같아 보였다.
나는 이제라도 내 결혼을 분석해야 했다. 분석하여 이유를 찾으려 했다. 그들이 하려는 연결의 이유를, 결혼의 의미를, 그리고 현우와 내 삶을. 결혼 후 현우는 결혼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다정했고, 집안일을 함께 했고, 먼저 퇴근하는 날은 저녁을 준비했다.
“현우야, 나 학부모 상담, 좀 늦어.”
“응 천천히 와.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너무 지쳤어. 입맛도 없어.”
늦은 퇴근, 집으로 들어서면 좋아하는 김치찌개 냄새가 폴폴 났다. 야채 듬뿍 넣은 계란말이에 매콤 달콤한 진미채 볶음까지 마요네즈를 발라 셀러리를 한입 베어 물고는 웃으며 현우를 봤다. 현우는 그런 남자였다. 결혼을 망설이기엔 아까운. 현우가 시작한 인테리어 사업은 꽤 잘 되었다. 카페 인테리어를 주로 하였는데, 그 당시 카페가 호황이었고, 프랜차이즈와 개인 카페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클라이언트를 고를 수 있는 상황까지 왔다. 급하게 오픈해야 하는 카페들은 아쉬워하며 다른 업체를 선정해야 했고 여유가 있는 사장님들은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나 또한 미술학원의 시스템을 잘 구축해가고 있었다. 미술학원 아르바이트 경험으로 알게 된 노하우로 유아와 초등 위주의 미술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개발하였고, 소수를 그룹으로 하여 수업에 퀄리티를 높이는 것에 힘을 쏟았다. 엄마들의 입소문이란..., 우리 미술학원 역시 대기하는 아이들이 생겨나고, 누군가 그만두어야 자리가 생기는 것이라 중도에 그만두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클래스를 몇 개 더 만들어 오랜 기간 대기한 친구들을 배려해야 했다. 아이들이 참 좋았다. 그리고 현우와 내 아이가 될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랬다. 우리 부부의 결핍은 아이였다. 서로의 일을 이해하고 지지하고, 서로의 삶에 적당한 자극이 되어주었고 함께 휴식하고 충전하며 다음 날을 준비하는 부부로서 완벽했던 우리에게 간절한 한 가지는 아이였다. 친정엄마 박정숙은 아주 용하다는 점집을 다니며 물었고, 나는 엄마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너무 용한데, 소름 돋아”
“고운아, 부적 한번 써볼래?”
“아니, 그건 싫어 엄마. 무서워. 부적.”
점집을 여러 군데 다녀왔는데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고, 누군가가 막고 서 있다고, 나에겐 아무 문제가 없는데, 현우 앞을 떡 하니 막고 있는 모습이 그냥 막는 정도가 아니라 옳아 매어 가두고 있는 형상인데 그걸 풀어야 일이 된다고. 엄마는 무척이나 흥분하며 말했다. 나는 단번에 알았다. 현우를 옳아 매고 있는 존재. 그건 남정숙이란 것을.
현우의 다정다감함과 섬세함은 그의 착한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꿈꾸지만 실천은 하지 못하는 내 남편, 부모의 말에 단 한 번도 노를 외쳐보지 못한 내 남편, 평온해 보이지만 속으로 늘 자유를 갈구하며 갈등하는 내 남편, 나는 어느 날 그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이번 생은 망한 것 같아. 내 어머니... 아버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돌덩이.’
내가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 꼭두각시처럼 늘 그들에게 이끌려 다니는 나약한 존재, 끊임없이 갈등하지만 결국 그들의 손을 들어주는 주체성 없는 인간.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부모에게 잘하는 자식인데, 왜 그러냐고. 뭐가 문제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부모에게 잘하는, 훌륭한 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의 일기장을 보기 전까진 나도 그랬으니, 지난 9년의 시간 동안 셀 수 없을 만큼의 상식적이지 못한 상황들과 만나기 전까진 나도 그랬다. 장현우, 그는 착하디 착한 사람.
아무렇지 않았던 그들의 일상에 나는 투척된 진흙 덩어리일지도 모른다. 그저 나는 낯선 이방인으로 그들의 어느 한쪽에 겨우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흔들어도 툭 떨어져 나가는. 나는 맞서고자 결심도 했었다. 결혼하지 않기엔 아까운 사람 현우와 내 삶을 위해.
이제 시어머니 남정숙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 시아버지 장현부터 살펴야 한다. 장현, 내 시아버지. 꼬장꼬장한 FM스타일, 유교문화의 집합체, 절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유교 의지를 가진 이 시대 보기 드문 조선시대 남자다. 그도 태어날 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그건 잘 모른다. 그랬을지, 아닐지도 그도 모를 것이다. 분명한 건 그가 입 밖으로 낸 이야기들이 그를 말해주었다.
“어디 여자가.” 이건 남정숙에게 자주 흔하게 하는 말이었다.
“가정이 뿌리야, 뿌리가 편안하려면 여자들이 조금 희생하는 거야” 이 말씀은 종종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가정이 편하려면 여자들이 잘해야지” 이건 남정숙과 나를 보며 자주 하는 말이었다.
장현의 말들에는 꼭 여자가 들어있었다. 뭐가 되었든 결론은 나와 시어머니 남정숙에게 많이 책임을 전가하고 희생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남정숙은 내가 시집온 날부터 자신의 책임들을 하나씩 나에게 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어디서부터 쌓였는지 알 수 없을 한집안에서 대를 물려 전해 오는 존재 없는 무거운 물건. 나는 남정숙이 던져주는 그것들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받아야만 했다.
남정숙, 그녀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심호흡부터 해야 한다. 가슴이 꽉 막혀오기 때문에 우선 산소가 오가는 숨구멍부터 확보해야 한다. 현우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 소중한 것까지는 당연한 일이다. 우리 엄마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니까. 소중하고 각별하게 여기는 마음은 어느 부모든 자식을 향한 특별할 것이 없는 것이지만 남정숙에게 현우는 그 이상이었다. 현우와 같이 살게 된 나에게 남정숙의 집착은 내 자유 의지를 구속하고 삶의 의지를 꺾이게 하는 무서운 존재였다. 애초부터 결혼한 자식을 독립시키거나 한 가정으로 인정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그런 종류의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것은 남정숙의 결핍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현우가 이해를 기대하며 꺼낸 이야기는 그녀가 자식을 독립시키지 못하는 이유를 알게 했지만, 나는 그 결핍의 피해자였기에 이해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이별, 동생과 함께 버려진 가여운 한 아이는 같은 한 동네 살고 있던 노부부의 손에 키워졌다. 그것은 좋은 의도가 아니었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폐지를 줍고 봉투에 풀을 붙이던 두 남매는 동생의 선생님을 통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보호기관으로 가게 되었다고. 남정숙은 동생을 돌보며, 공부를 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지독하게 공부를 하였고, 공부 하나는 일등, 그 시절 대학까지 입학했다고 했다. 그 사이, 몸이 약했던 남동생은 그녀가 대학 입학을 하던 해 세상을 달리했다. 남정숙의 첫 번째 결핍은 바로 가족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찍 결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곧장 층층시하 시집살이를 해야 했고, 바라던 가족의 상이 아니었다고. 지금의 남편, 장영은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어서 남정숙의 어려움은 돌보지 못했고 그와의 소통 불통이 그녀의 두 번째 결핍이었다. 자식은 남정숙의 유일한 어떤 것. 그 유일무이한 것 옆에 어느 날 낯선 이방인이 자신의 자리를 뺏으려 하니, 어떻게든 가까이서 지키고 싶은 것이었다.
“옛다. 나는 필요 없으니, 당신 가지세요. "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시원하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찾고 싶었다. 내 자유의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