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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횬 Oct 25. 2024

주말 도둑

#8. 주말 도둑         


                      

꽉 막힌 동굴 안에 살고 있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안 되겠다. 너희들 매주 주말마다 집에 와서 지내거라”      

“내가 좀 가르쳐야겠다”           


매주 집으로 오라는 말씀에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일주일의 주말은 다음 한주를 잘 시작하기 위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결혼 전에도 어느 주말 하루쯤은 혼자 시간을 보내며 쉼의 자유를 차곡 채워야 했었다. 아무도 곁에 두지 않고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에너지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충전의 방법이었다.



그 말씀이 떨어진 뒤 현우와 나는 평일 동안 지친 몸을 이끌고 토요일 오전이면 짐을 챙겨 시댁으로 와야 했다. 시댁과 우리 집의 거리는 한 시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현우는 매주 운전했고 그것을 3년간 했으니, 현우도 나도 참, 이걸 우직하다고 해야 하나?      

3년간 나의 주말은 없었다. 현우에게 주말은 그래도 쉼은 있었다. 나에게 주말은 숨이 막히는 지옥 같았으니, 그 답답함은 작은 이모와 은서에게 풀 수밖에 없었다. 동굴에 갇혀 있던 이혼 전 이모는 나에게 “어른들이 좀 너무하네. 너무 자기들 생각만 하는 거잖아. 고운, 그래도 네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조금만 참아보자.” 이혼 후 동굴밖으로 나온 이모는 “이건 아니지, 주말에 이제 안 온다고 당장 말해”  


이모는 덧붙여 “힘들면 정리해, 네 삶을 찾자”


내 삶이 있었던가? 나의 3년, 평일에도 어머님은 두세 번 전화를 했다. 밥은 먹었느냐, 반찬은 뭘 했느냐, 시시콜콜한 대화의 주제는 현우의 뒷바라지, 늘 허탈한 웃음으로 끊는 전화는 계속해서 나를 옥죄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이 되면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현우와 나, 우리 부부 사이가 궁금할 것이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현우는 내가 아는 현우가 되어 선택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고 사랑을 충분히 표현했다.


금요일 아침부터 나는 예민해졌다. 결혼 후 하고 싶었던 주말의 그림들을 하나도 그려보지 못한 채 내 의지와 선택과 상관없이 그들의 동굴로 들어가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을 왜 빨리 끊지 못했을까, 도둑맞은 내 청춘의 주말 시간들이 사무치게 서글펐다. 서글픔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현우를 향한 마음에 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은서야, 아무래도 내 선택은 오류였나 봐”      

“고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될까?”      

“네 삶은 너 거야, 당연히 되지”      


은서의 말을 진즉 들었어야 했다. 3년, 나의 주말 도둑, 현우의 부모님은 집안의 분위기, 가풍을 나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무척이나 가부장적 성격이 짙은 이야기들, 지금부터는 마음을 부여잡고 들어야 할 것이다. 특히 지금도 어느 동굴 속을 헤매고 있을 며느리들은.      


토요일 오전마다 우리는 짐을 챙겨 현우의 본가, 나의 시댁으로 향했다. 3년째 되는 어느 날, 차 안은 음악하나 없이 조용하다. 현우는 운전을 하며 괜히 내 손을 잡았다. 미동 없는 내 손,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내 머릿속과 마음, 그도 알고 있었다. 현우는 왜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오늘은 우리끼리 보내자. 어른들에게 못 간다고 이야기할게.” 왜 현우는 단 한 번도.      



우리는 점심 즈음 도착을 했다. 분명 서둘러 바쁘게 들어섰지만, 항상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늦었네, 다음부턴 좀 일찍 오너라”      


그리고 나는 손을 씻고 곧장 주방으로 가서 전용 앞치마를 걸친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친다. 몇 개월 동안은 어머님께 점심 메뉴를 묻고 준비를 했지만, 3년쯤 되니, 어머님이 장을 봐둔 재료들을 살피고 알아서 음식 장만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집에 도착하면 어머님은 주방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보통은 소파에 누워 뉴스나 드라마를 보며 혼잣말을 하셨고, 어느 날은 주방 식탁에 앉아 시금치 가격이 어떻고, 무를 샀는데 바람이 들어갔다는 장을 보러 가서 느낀 이야기들을 쏟아 냈다. 결론은 음식 재료를 낭비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적재적소에 쓰고 남은 재료는 잘 담아 두라는 이야기들.      


1년 차까지는 재료를 다듬은 것, 써는 것, 재료 보관하는 것, 그릇들 놓는 위치, 냉장고 정리 등등 본인의 스타일을 나에게 요구하며, 그것이 잘 실행되지 않았을 때는 무척이나 언성을 높이셨고 그 말투는 늘 상처였다.      


“왜 이러니? 이거 지난번에 알려주지 않았어?”     

“왜 한 번에 못 알아듣고 여러 번 말하게 하니?”      

“이건 이렇게 써는 게 아니라고, 썬 모양 한번 봐라. 아이고”      


내가 주방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현우는 방에서 쉼을 가졌다. 주로 잠을 자거나 주중에 못다 한 일을 하기도 했고, 내 눈치가 보여서인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치우고, 또 저녁을 준비했다. 밥이 다 차려지면 나타나는 남자 셋, 장현, 장현우, 현우의 동생 장현호. 다섯 식구의 밥을 하느라 나는 그 시절 살이 5킬로나 빠졌다. 그곳에서 먹는 밥은 양만큼 들어가지 않았고, 늘 답답한 속을 부여잡고 잠자기 전 소화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다.      


1년이 될 때까지, 2년이 될 때까지 나는 참았다. 누군가는 참 미련하다고 할 것이다. 누가 뭐라든 그때 나는 그것이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이라 생각했다. 3년째 되던 어느 날, 그날은 묘하게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다. 금요일 밤부터 채기가 있어 속은 답답했고, 닭백숙 거리가 들어 있는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구역질이 나왔다. 백숙을 푹 끓이며 식탁에 수저를 놓고 그릇을 준비하는 동안 아무도 주방에는 얼씬하지 않았다.      


“식사 준비 다 됐어요.”      


그날따라 그 말을 던지고 나니 내 존재는 사라지고 식당 주인이 된 듯, 혹 그들의 가사도우미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것은 곧장 비참함의 감정을 가지고 왔다. 현우네 가족들은 닭백숙을 참으로 맛있게도 먹었다. 그리고 그들이 먹은 그릇과 수저를 싱크대로 가져다 놓았고, 나는 주방 장갑을 양손에 꼈다.      


“얘야, 과일 좀 깎고 하거라”      


순간,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 올랐고, 얼굴은 시뻘게졌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벗어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아이 씨, 못해먹겠네”      


칠월의 뜨거움이 불타오르던 토요일 저녁, 식사 시간, 세제가 듬뿍 묻은 고무장갑은 내동댕이쳐졌다.


가여운 고무장갑, 잔뜩 거품 독이 오른 세제는 벽과 나무 바닥에 덕지덕지 묻었고, 순간 그의 가족들은 얼어붙었다. 정지 상태, 정적 속 어색한 공기 안에 내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계속 들리는 듯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짐을 챙겨 이 집에서 빠르게 벗어나는 것.     


마치 얼음이 된 듯 일시정지한 그들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후회보다는 통쾌함이 밀려왔다. 현관문을 열면 다시는 여기, 이곳에 오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한 가지, 그래도 시동생 장현호는 한 번씩 내편이 되어 남정숙의 행동과 말을 탓해주기도 했는데, 그에게 감사인사를 하지 못함이 맘에 쓰였다. 잠시 그에게 시선을 멈춰 고개를 끄덕했다.


그날 이후 나는 주말마다 현우네 집에 가지 않았다.

나는 그 말 한마디에 도둑맞은 주말을 되찾았다. 어쩌면 그것은 어려웠지만, 또 쉬운 일이었다. 뒤도 보지 않고 빛의 속도로 나는 그 집을 나왔다. 뒤따라 나오는 현우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 있지 않았다.     


“가서 짐 챙겨 나와”     

“어? 응 “     


현우 역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시간에 맞춰 빛의 속도로 짐을 챙겨 나왔고, 3년의 주말도둑에게서 내 주말을 돼 찾았다. 현우는 분명 내 행동이 못마땅할만한데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아지 마냥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걸음이 꽤나 경쾌했다.     


“현우야, 화나지 않아?”     

“응? 너 이해해, 미안해”     


고무장갑을 집어던지며 이 남자와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나를 이제와 이해하겠다니, 더 괘씸해졌다.     


“현우야, 잠시 우리 시간 좀 가질까? 지난 3년간 난 너무 지친 것 같아. 생각을 좀 해야겠어 “     


그렇게 우리의 잔잔한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나는 곧장 이모에게 갔다. 내 삶을 찾으라 했던 이모는 나를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모의 고된 6년의 세월이 그만한 혜안을 주었나 보다.     


”잘했어. 괜찮아, 잘한 거야 “     


나는 이모가 생각하는 답이 아닌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모, 나는 한국의 가부장 문화, 한국에서의 결혼 문화, 한국만의 가족 정서와 맞지 않나 봐 “


3년째 주말, 시집살이를 하며 내 감정은 시어머님에 대한 분노도, 시아버님의 가부장적인 말들에 대한 반항도 아니었다. 내가 느낀 부당함은 바로 한국사회에 뿌리내려 있는 가부장 문화, 결혼을 했지만 독립된 가정을 허락하지 않는 우리만의 정서였다. 내가 만난 시댁이란 곳은 남들보다 조금은 더 별났지만, 주변을 보면 결혼의 스트레스, 대부분의 결혼 불화의 원인은 시댁이었다. 아들 가진 자식의 부모는 아들의 결혼을 독립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시집간다” 란 말만 보아도 우리의 결혼에 대한 정서를 알 수 있다. 작은 이모의 시집간다는 말이 그렇게 섭섭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 집 반응은? “     

“얼음땡 알지? 내가 술래고 그들은 나에게 잡히기 전 ‘얼음’ 하고 멈춘 것 같았어. 얼음을 깨줄 사람은 없었지. 그럼 나는 이긴 걸까?”     

“우리 고운, 그래도 장해. 3년 동안 보통일이니 이게, 다른 사람은 못했을 거야. 착한 너니까 이만큼 참은 거지”     


결핍으로 가득 찬 시어머니 남정숙 또한 자유의지를 뺏기며 살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아버님 장영은 또 어떤가? 내려오는 집안의 가풍과 사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왜 갈등이 없었겠는가? 어쩌면 그들도 시대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억압, 강요, 인내를 요구받으며 그것이 최고의 덕목이라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인지도 모른다. 3년간 나는 그들의 갈등과 번뇌를 보았다. 그것이 어쩌면 내가 3년을 견딘 이유일지도 몰랐다.     


집으로 가는 길, 은서에게 전화해 같은 이야기를 숨도 쉬지 않고 같은 이야기를 두 번 하고 나니 그새 3년의 고통은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유.


현우를 선택하며 빼앗긴 내 자유, 아직 온전히 돼 찾진 못했지만 임시정부 정도는 세워 둔 기분, 나는 내 자유를 온전히 찾기 위해 우리네 가부장문화와 맞서기로 결심했다.     


“은서야, 나 한번 해보려고 해”

“평생 응원할게. 고운”     


그녀의 평생 응원은 나의 결혼 9년 차에 멈추었다. 그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알게 된 그녀의 이야기는 연약한 나의 투쟁에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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