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불행 총량의 법칙
결혼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들어와 매일이 놀라움이었던 그때, 새댁이라 불리던 시절, 은서는 나의 도피처였다. 이상한 불편함을 무엇이라 단정할 수 없었던 시댁이란 존재와 관망하는 내 남편 현우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쏟고 나면 별게 아닌 게 돼버렸다.
“은서야, 너.. 상담전공해 보는 게 어떨까?”
“나 가방끈 긴 거 싫다 얘”
“아니, 진심 진심, 너한테 말하고 나면 심각성 제로”
“고운 씨, 힘들 땐 전화해. 언제든”
그땐 전혀 알지 못했다. 은서의 아픔과 고통의 크기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매일 전화해 투정을 쏟지 않았을 텐데…, 은서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을 앞두고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다. 어깨선에 닿지 않는 칼 단발머리, 습도가 높아 끈적끈적하고 후덥지근한 날임에도 빨간색 긴팔 카디건을 입고 더운 기색 없이 뽀송뽀송한 얼굴로 자기소개를 했다.
“은서야, 윤은서. 잘 지내보자.”
말을 하는 은서의 눈은 빛이 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용기 내어 말한 듯 말이 끝나자마자 겸연쩍여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은서는 영국에서 왔어, 적응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줘.”
반 전체가 술렁였다. 전학생이 영국에서 왔다니, 꽤 큰 키와 시원시원한 웃는 모습은 학교 아이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그런데..., 영국이라니. 쉬는 시간마다 다른 반 친구들은 은서를 보러 왔고, 은서는 그 관심이 불편해 보였다. 이상하게 우리 반 아이들과 나는 은서를 지켜주고 싶었다.
“은서가 누구야?”
“전학생 어디 있어?”
“영국에서 왔다며?”
“너네 반으로 가.”
“너네 반으로 가라고.”
은서는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선생님은 부반장이었던 나에게 은서의 학교 생활 적응 도우미라는 별칭을 만들어 주었고, 나는 주로 학교 매점의 꿀템을 은서에게 알려주었고, 은서와의 군것질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몸무게가 2학년이 끝날 무렵 5킬로 가까이 늘어난 것은 급격하게 돈독해진 우리의 우정을 뜻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변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내 안은 늘 똑같지만, 삶을 밟으며 말투, 모습, 분위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안고운, 내 세상을 곱디곱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 어떤 장면이 마음을 채우는지 잘 아는 사람, 그 장면을 멈춰서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그것을 그려내는 사람. 나는 특별하게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속없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삶은 즐거운 것이니. 타인과의 소통, 관계, 만남이 나에게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그 누군가의 내밀한 부분까지 일부러 알려고 들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음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
은서의 성격, 취향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지만 은서가 왜 영국에서 한국으로 오게 되었는지, 누구와 살고 있는지, 어떤 날은 평소와 다르게 어두웠는지를 알지 못했다. 물론 궁금했던 날도 있었지만 말을 하지 않음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 일부러 묻지 않았다. 은서는 나보다 어른스러운 사람, 그 시절부터 나의 즐거움, 기쁨, 그리고 힘든 이야기들을 은서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상대가 벽으로 느껴졌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을, 은서는 좋은 것은 두배로 좋게, 나쁜 것은 흐려지게 만들어주는 사람. 그것은 은서만이 가진 것이었다. 결혼 후 우리의 소통은 조금은 소원해졌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오랜 시간 전화기를 붙잡고 대화했다. 물론 대화의 반절은 나의 힘겨움 고백이었다. 결혼이 힘겨움이 되다니, 상상할 수 없었던 일.
“고운아, 너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응? 뭐야?, 뭔데? 뭔데?
”나 지금 화장실 가고 싶어.”
어느 날 조심스럽게 꺼낸 은서의 이야기, 진지하게 이야기하다가 화장실 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실없이 웃고 말았는데, 그때 그 말을 붙잡았어야 했다. 은서가 그랬듯이 내가 은서의 아픔을 치유해야 했었다. 마흔세 번째 메일을 은서에게 보내기 전, 은서로부터 도착한 두꺼운 등기 우편 편지. 찍혀 있는 발신된 날짜는 두 달 전이었다. 급하게 우편 배달원에게 달려갔다. 그는 등기 우편 중 날짜를 지정하여 발송하는 경우가 있다며, 예약된 등기라고 했다. 좋지 않은 예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은서의 편지를 읽기 시작하며 내 마음은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두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슬픔과 함께 그들에 대한 분노가 온 마음에 채워졌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말은 이것뿐이었다.
"은서야 이제 괜찮니?"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 앞에서는 더 힘든 내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 삶이 즐거운 사람 앞에서도 많이 불행한 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어렵다. 은서가 그랬다. 내 삶은 언제나 즐거웠고, 한 번씩 깊이 힘들었으니, 내 이야기만 줄곧 재잘대었던 지난날을 다시 살고 싶었다. 은서 이야기를 묻고 위로해야 했었다.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삶에 빗대어 다양한 총량의 법칙을 이야기들 한다. 지금 현재 불행이 계속되지 않을 거라는, 앞으로는 행운이 찾아올 거라는, 즉 나쁜 일이 생기면 곧 좋은 일이 온다는 것. 우리는 어쩌면 그것을 믿고 버티고 또 버티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행 총량의 법칙은 은서를 빗겨 났다. 은서의 삶에 행운으로 보이는 무언가는 찾을 수 없었다. 은서는 나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 했지만, 그 행운은 은서를 붙잡아 주지 못했다.
그녀의 삶, 가슴이 매어와 말로 이어 나갈 수 없는 그녀의 아픔,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이야기해야 한다. 나의 연약한 투쟁의 이유가 되었으니.
은서, 엄마의 도둑 결혼으로 영국인 아빠를 둔 은서는 엄마를 따라 한국으로 8살에 들어왔다. 온통 낯선 이상한 나라에서 그녀는 할머니, 할아버지란 사람과 처음 만났으며, 그들의 차가운 마중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기만 했지만, 곧 다른 남자가 생겨 엄마가 집을 떠난 후 차가운 마중은 학대가 되고,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눈만 마주치면 빗자루 몽둥이로 맞았다고 한다.
“이놈의 가스나, 양키 새끼”
은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스나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뒤늦게 여자라는 것을 알고는 그것이 맞아야 하는 이유라는 것을, 아버지가 외국인인 것이 맞아야 하는 당연한 이유라 생각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철도 공무원, 할아버지의 식사를 차려 놓고 할머니는 은서를 데리고 나가는 일이 잦아졌고, 할아버지가 주무실 무렵 은서를 데리고 들어왔다고, 하지만 할아버지의 이유 없는 몽둥이질은 멈추지 않았고, 은서가 10살이 되던 해, 은서의 몸에 박혀 사라지지 않는 멍자국을 발견한 학교 선생님의 도움으로 영국의 아버지에게 연락이 닿아 그녀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시 돌아간 영국에서의 삶 또한 그녀에게 행운은 아니었으니, 은서는 아버지란 사람의 새로운 가정에 투명인간이 되어 잠시 머물다가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된다. 그때 우리 반으로 전학을 온 것이다. 은서는 내가 알려주는 매점의 최고 아이템이 정말 좋았고,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누군가가 생겨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
차가운 시선,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 매질보다 못한 투명 인간으로 살았던 삶, 나는 17세 소녀의 17년간의 삶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 당시 은서는 기숙사가 있는 우리 학교를 선택했고, 기숙사 생활을 하며 혼자 지낼 수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엄마라는 사람이 은서를 찾아왔으며, 그때부터 엄마로부터의 정서적 학대가 시작되었다. 은서를 버리고 떠난 엄마는 새로운 남자와의 삶이 그 어느 때보다 불행했고, 알코올에 의지해 삶을 겨우 살아나가고 있을 때, 나타난 딸이 그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저녁이 되면 술에 푹 빠진 상태로 전화를 해 막말들을 퍼부었고, 은서는 엄마의 전화를 피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을 낳아 준 엄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고. 은서는 그런 아이였다.
은서는 늘 외로웠다. 유년시절 채워지지 않았던 가족의 사랑, 보호받는 느낌, 안전한 무엇, 그리고 마음껏 쉴 수 있었던 날이 그녀에겐 없었다. 나는 은서가 전학 온 날, 그녀를 떠올렸다. 구김살 하나 없었던 얼굴 뒤에 감춰진 은서의 불행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한 조각이라도 발견했다면 나는 그날 은서의 편지를 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은서의 지난 34년, 몹쓸 짓을 한 그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은서의 불행을 눈치채지 못한 나에 대한 원망이 치밀었다.
…
고운, 세상에서 제일 고운 고운아.
넌 34년, 내 삶이 준 최고의 선물이었어.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은 삶을 34년이나 살아가며 나는 너무 많이 지쳤어. 늘 꺼내고 싶었지만, 너에게만큼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어. 내 불행이 너에게 닿을까 두려웠거든. 내가 아는 넌 남의 아픔까지 온전히 자신의 것처럼 느껴버리는 아이라 내 불행은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오래전에 마음먹었지. 그건 무척 잘한 일인 것 같아. 편지를 쓰는 이유는 내가 사라진 뒤 나를 찾을 단 한 사람. 너. 안고운.
그 사람에 대한 예의는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 이제는 내가 사라짐에 납득할만한 이야기들을 너에게는 해야 하겠지. 고운아.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이 편지를 읽고 나서 며칠만 단 며칠만 아파해줘. 내 불행이 너에게 닿는 것은 정말 원하는 일이 아니야.
기억이 나는 시절은 7살 때부터야. 나는 영국에서 태어났어. 엄마는 한국인, 아빠는 영국인. 7살 전까지 기억은 흐릿하지만 엄마 아빠가 자주 다퉜던 생각은 남아 있어. 그러다가 내가 한국으로 온 것이 8살이었으니까. 한국은 나에게 이상한 나라였어. 집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곳, 나와 비슷하지만 다르게 생긴 사람들, 그리고 무척이나 차가웠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는 그 낯선 곳에 나를 두고 가버렸지. 나는 매일 저녁 맞아야 했어. 오래되어 색깔이 갈색으로 변하고 빗자루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싸리나무로 만든 빗자루로.., 아직도 그 몽둥이로 변한 빗자루가 내 몸에 닿을 때 났던 냄새가 생생해. “이놈의 가스나, 양키 새끼” 그땐 가스나가 뭔지, 양키가 뭔지 알지 못했는데 할아버지의 말투에서 나는 내가 뭔가를 크게 잘못해서 맞는 줄로만 알았어. 원래 그렇게 맞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지. 할머니는 내가 측은했는지 어느 날부터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하시고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어. 하루는 문구점 앞에서, 하루는 슈퍼 앞에서, 하루는 집 옆 계단에서 어둠이 더 깊어지기만을 기다렸어. 할아버지가 들어오시고 주무실 때까지.
이모, 삼촌이란 사람들도 집으로 한 번씩 오면 나를 보고 혀를 차며 한소리씩 했지. 그저 나는 그들의 미움을 받고, 어느 날은 맞기도 하며, 무슨 이유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냥 견뎠어. 너만큼이나 나에게 참 고마웠던 사람은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야. 내 팔에, 다리에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박혀 있던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 멍을 발견하고는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거든. 나는 선생님의 눈빛에서 알 수 있었어. 이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겠구나. 덕분에 나는 매질을 피해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 매질은 피했지만 나의 존재는 없었던 곳, 영국. 아버진 새로운 가정을 이미 만들어 잘 지내고 계셨고 나는 그곳에 불청객으로 머물게 되었어. 들어서는 순간 알았지. 나는 이곳에 오래 있을 수 없구나.
존재가 있지만 존재가 없는 사람, 그들에게 나는 그랬어. 그것은 어느 날은 매질보다 견디기 힘들었지. 그래서 이번엔 내 의지로 한국으로 왔던 거야. 그것은 정말 잘 한 선택이었어. 널 만났으니. 삶을 놓고 싶었던 순간순간마다 네 이야기가 날 붙잡아 줬어.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거든. 고운아, 덕분에 지난 34년 내 삶이 그래도 숨 쉴만했어. 난 네 모든 말들이 좋았어. 내가 누군가에 필요한 존재일 수 있음이 무척이나 기뻤거든.
오늘의 내 선택은 8살부터 시작된 것이었어. 너로 인해 그 시기가 점점 늦춰지고 세상의 하늘과 만날 수 있었던 날이 늘어난 것일 뿐. 나를 아까워하지도, 내 빈자리를 너무 오래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매일 고민하고 망설였던 것, 늘 선택하고 싶었던 오늘이었으니.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해.
미안해, 고운아.
단 하나, 너의 이야기, 지금 네가 힘든 이야기를 못 들어줘서 너무 미안해.
…
나는 양 무릎을 세워 고개를 파묻고 울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울었다. 순간 은서의 편지가 울음에 답을 하는 듯 갑자기 창으로 불어온 바람에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