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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횬 Oct 25. 2024

담금주

#11. 담금주    

                      

미술학원의 위기가 찾아온 나의 결혼 6년 차, 그 위기만큼이나 현우와 내 사이는 소원해졌다. 그의 부모를 통해 피폐해지는 내 정서는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운 것이다. 그 벽은 툭 치면 무너질법한 힘이 없는 벽이었지만, 벽은 벽이었다. 삶의 다정한 시간을 함께 보내며 사라지지 않게 지켜야 할 사랑의 이름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우리는 놓친 것이다.     


결혼 후 나의 삶은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미술학원에 내 에너지를 더 쏟았다. 아이들이 참 좋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아이들의 걸음과 웃음은 늘 따듯했다. 아이들이 그리는 색들에는 묘한 에너지가 있어 크레파스 터치 하나도 유심히 살펴보는 나였다. 학부모와의 소통도 나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그들의 육아 고민과 희망하는 부분을 체크하며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 미술로 해소해 보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은호'라는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학원에 내려주며 나를 불렀다.         

 

"선생님, 잠시만요. 은호가.."          

"네, 말씀하세요, 어머니 "          

"은호가요. 며칠 째 소리를 빽빽 질러요. 혹시 학원에서도 그럴까봐 말씀드려요. 사실 저희 부부가 은호 앞에서 부부싸움을 크게 했었거든요. 그날 이후로 그런 것 같아요."     


이건 분명 상담사에게 해야 할 이야기인데, 엄마들은 나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들을 한다. 그것은 조금은 과장된 엄마들의 소문들 때문이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평소 없었던 문제성 있는 행동을 한 아이들이 미술학원 수업을 다녀오면 문제 행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의도한 적도 없고,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니라 엄마들의 입장에서 미술계의 오은영을 만난 듯한 놀라움과 기쁨이 우연의 과장으로 느껴졌다.     


내 입장에서는 그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긴 했다. 어느 날부터 미술학원에 들어오기 위해 대기하는 아이들이 생겨나고 기존의 원생들이 이탈하는 일이 거의 생기지 않았다. 몇 달을 대기하는 아이들 엄마들의 성화에 못 이겨 몇 개의 클래스를 더 만들어야 했다.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토요일반 클래스를 만들게 되며 현수는 주말, 남정숙과 장영의 부름에 처음으로 못 간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며칠 뒤 시어머니 남정숙은 미술학원에 들렀다.

          

"어머니,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여기는 연락해야 올 수 있나 보구나"          

"아니요. 제 말은... 잘 오셨어요. 아직 아이들 오기 전이라 잠시 계셨다 가셔도 돼요"          

"잠시가 아니라.. 도와주러 왔는데, 주말에도 수업도 있다고 해서, 너무 바쁜 것 같아서"          

"네? 아니요. 어머니, 괜찮아요."        

"뭐 내가 미술을 모르니 허드렛일 하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너 할거 해"          

눈앞이 하얘졌다. 이 상황이 꿈인 듯 느껴졌지만, 곧장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떠들석하고 반갑게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선생님, 이 분은 누구세요?"        

"아... 선생님 어머니셔“          

"아, 선생님 엄마세요? 근데 왜 하나도 안 닮았어요?"       

 

하나도 닮지 않은 남정숙,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남정숙은 나의 엄마였다. 그녀에게 며느리는 결코 딸이 될 수 없으니, 아니 세상의 모든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딸일 수 없으니,  닮을 수 없는 사이, 참으로 낯선 이방인.        

  

남정숙은 아이들과 수업을 하는 동안 유리창을 닦고, 창틀 먼지를 닦아 냈다. 집에서는 고상한 공주 노릇을 하느라 그녀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미술 도구들을 정리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하이라이트였다.  손수 만든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과자와 젤리를 넣은 봉투를 집으로 가는 아이들에게 전내며 포옹을 했다. 덕분에 나는 수업에 몰입하게 되니, 짧은 시간에 아이들에게 많은 피드백을 할 수 있었고 아이들을 더 세심하게 살필 수 있었다. 남정숙은 정말 도와주러 온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매일을 미술학원으로 출근했다. 2주 동안 매일 미술학원으로 와 허드렛일 비슷한 일들을 했다.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불편했지만, 수업에 몰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참을 만은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남정숙의 속내를 알지 못했으니 미술학원 문을 닫으며 늘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했다.   

     

일주일째 되는 날, 사건은 터졌다. 아이를 데리러 온 엄마들이 학원에 들어서며 이야기를 하느라 인사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남정숙의 멈추지 않는 훈계가 시작되었다. 엄마들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남정숙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한 엄마가 "저희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말씀이 너무 과하시네요."라고 차가운 말투로 이야기했고, 그 말을 하는 자세가 제법 삐딱했으니 내가 상황을 진정시키려 나서는 순간, 남정숙의 손은 차가운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곧장 아이 둘은 학원을 그만두었다. 학원을 그만두는 것은 사실 큰 일은 아니었다. 대기자들이 있으니 바로바로 채워지니 말이다. 문제는 엄마들의 입이었다. 말할 거리가 생기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말을 갈기갈기 뜯어먹어버리는 엄마들, 그날 우리 미술학원에 어떤 미친년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온 동네 엄청난 속도로 수많은 귀에 들어가 앉았다.  

   

며칠 뒤, 바람이 뜨거워진 7월 셋째 주 수요일, 아이들이 일찍 마치는 날이라 서둘러 출근을 했다. 미술 학원 문은 열려 있고 창으로 커다란 검은색 비닐봉지가 보였다. 순간 아찔해졌다. 미술학원 안으로 들어서자 남정숙은 아이들의 작품을 마구 검은색의 커다란 봉투에 담고 있었다.          


"어머님!, 무슨 짓이세요?!!"          

"뭐? 왜? 정리하고 있잖니."          

"아이들 작품이잖아요!"

    

나는 너무 놀라 봉투를 잡고 있던 남정숙의 손을 냅다 후려 쳤다. 어머님은 뒤로 나뒹굴어졌고 누군가에게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욕설을 그날 나는 내 귀에 담았다. 아이들의 작품은 어느 것 하나 성한 게 없었다. 그때 내가 이성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일주일 뒤 다섯 번째 맞이하는 미술학원 작품 전시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몰랐을 그녀가 아니었다. 나는 망연자실 주저앉아 남정숙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일주일 뒤에 열릴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었음을..., 슬그머니 일어나 주섬 주섬 가방을 챙겨 문을 여는 남정숙에게 소리쳤다.        

  

"어머님, 제 인생에서 사라지세요. 제발"     

     

남정숙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6년을 공들인 사랑하는 미술학원은 몇 달 뒤 사라졌다. 그리고 결혼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사랑했던 나의 시선도 사라지고 있었다.

                              

삶의 걸음이 기쁨에서 괴로움으로 바뀌는 것, 그 문제 답은 나에게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계속해서 불청객이 들이닥치는 내 삶을 보호하기에 적합했다. 제5회 미술 학원 전시회는 진심을 외치는 나의 비명 같은 소리를 끝으로 정말 끝이 났다. 아이들이 공들여 만든 작품은 시커멓고 커다란 봉투에 처박혔고, 되살릴 수 없었다.  엄마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죄송한 말씀을 먼저 전합니다. 다음 주 예정이었던 제5회 <미술로 생각하기> 전시회를 개최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유는 아이들의 작품 훼손입니다. 공들여 만든 작품을 잘 보관하지 못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아이들과 더 많이 나누고 준비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관련 내용은 다시 안내드리겠습니다.  -원장 안고운 드림-     


끔찍했다. 하지만 사유를 꾸며내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나의 사과글은 누군가에 의해 맘카페에 게시가 되었고 지독한 매질을 맞아야 했다. 그들이 던진 마음 매질은 생각보다 혹독해서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현우야, 미술학원을 정리해야 할까 봐"     

"많이 힘들구나,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네가 뭘, 조금 쉬고 다시 시작해 보지 뭐. 그때 네가 더 예쁘게 공사해줘야 해"     


결정은 괴로움의 시간보다 훨씬 짧고 간단하게 이루어졌고, 현우는 대책은 없이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앞으로 우리는? 이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남정숙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우리가 계획하고 기대하고 목표했던 삶은 이것이 아니었다.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그 삶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당한 자극이 되는 것, 그렇게 삶을 살다 2세가 태어나면 우리의 삶의 자세를 아이가 보고 배우게 하는 것.


최선을 다하는 삶이 우리가 함께 걷고자 하는 방향이었다. 어딘가 낯선 곳에 내동댕이 처진 기분이었다. 숨이 막혀왔다. 마치 날개 하나가 고통 속에 꺾여 비참하게 아파하는 듯, 아니 어쩌면 두 날개가 모두 어스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을 사랑했다. 삶의 시선은 결혼 전이나 후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떤 누구도 의미를 주지 않게 평범한 장면이 내 시선에 담기면 무척 특별해졌고 한 장면, 한 장면이 가슴에 의미로 스쳤다. 아직은 그럴 힘이 남아 있었다. 은서는 자주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것은 나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그것을 닮고 싶다고 했다. 작은 이모는 어느 날 이렇게 이야기했다.     


"안고운 너 금사빠야"     


금사빠. 금방 사랑에 빠지다는 뜻의 신조어, 작은 이모의 말은 나에게 딱 맞게 적합했다. 뭐든 다 좋은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금방 사랑에 빠졌다. 여기서 대상은 삶이었다. 결혼 전, 이모와 산책을 하는 날이면 여러 번 구박을 했다. 하나 이쁘지 않은 장면에 감탄하며 카메라에 그 장면을 담으려 애쓰느라 쉬지 않고 쭉 걸어야 운동이 될 텐데, 이 구역, 저 구역에서 자꾸만 쉼을 가지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모의 눈엔 한없이 평범한 그냥 그런 장면들을 나는 감탄하며 카메라에 담고 있었으니 말이다.     


금사빠, 현우에게도 그랬을까? 그 질문을 나에게 하니, 그런 것도 같았다.  그의 눈빛이 좋았고, 긴 팔을 벌려 공간 여기저기를 재는 그의 어깨선이 좋았고, 어쩌다 웃는 해맑은 웃음이 좋았다. 그것이 좋아진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금세 사랑에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누군가가 내 사랑을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금사빠는 위험해요. 조심하세요.”    

 

분명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내 사랑에 대한 답이다. 이 그 답조차 그 어느 누구의 마음에 닿지 않을 테니, 그것이 그 시절 나였다. 그 누구의 이야기도 들리지 않았다. 어떤 미래를 만날지 상상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현우는 담금주 만들기를 즐겨했다. 밝지만 활동적인 일보다는 정적인 것을 선호하는 나는 현우의 취미가 마음에 들었다.   

  

“고운아, 이 술은 너 닮았어 “     


일 년 전 산딸기로 만든, 붉은빛이 영롱하고 향이 풍부한 산딸기 담금주는 그가 내게 처음으로 보여준 것으로 양이 제법 되었는데, 향에 취해 색에 취해 홀짝홀짝 제대로 마셔버렸다. 그다음 날 현우와 나는 함께 청귤과 무화과로 담금주를 만들었다. 흐트러짐과 빈틈이 없이 너무나 능숙하게 흐르는 물에 과일을 씻고 체에 밭쳐 두었다.   

  

“고운아, 과일을 키친타월로 좀 닦아줄래?”     

“응”     

“아주 부드럽게 만져줘. 상처 생기지 않게”   

  

곧장 시범을 보이는 현우의 손은 마치 가벼운 풍선 같았다. 마치 공기 넣은 비닐장갑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현우는 용기를 열탕 소독한 뒤 설탕의 용량을 저울로 재며 맞췄다. 과정 하나하나에 매우 능숙했고 새심 했다. 곧장 과일과 설탕을 버무려서 용기에 담고 도수가 높은 담금주용 소주를 조심스럽게 부었다. 나는 벌써부터 빛깔이 나오는 것 같아 넋을 잃고 보았다.     


“이건 우리 1년 뒤에 같이 맛보자.”

“현우야, 넌 담금주를 왜 만들어?”     

“음…, 시간이 만들어 주는 거잖아. 여기 안에서 과일과 설탕과 소주가 제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아.  그게 마음에 들었어. 내가 하는 일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거잖아. 내 역할도 참 마음에 들어. 그리고 어떤 시간을 보냈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져. 그게 정말 신기해."

    

“자, 여기 봐. 6개월 전에 담근 거야”     


현우는 똑같이 생긴 레몬 담금주 2병을 꺼냈다. 그리고 두병 모두 뚜껑을 열고 투명하고 단아한 잔 두 개에 각각의 레몬 담금주를 따랐다.   

  

“맛을 한번 비교해 봐 "    

 

그 맛은 확연하게 달랐다. 왼쪽의 레몬담금주는 묵직했다. 입 안에 닿는 액체의 질감부터 향까지 묵직함이 입안에 한참을 머물렀다. 오른쪽은 그와 다르게 가벼웠다. 진한 술의 도수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마치 레모네이드와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 게 더 좋아?”     

“음…, 난 왼쪽. 묵직한 느낌이 좋아”     

“오, 우리 고운이 술꾼이었네.”     


발그레 달아 오른 얼굴을 거울에 비추니 정말 딱 술꾼이 그곳에 있었다. 현우의 섬세함과 차분함, 그리고 단정함이 좋았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대로 나는 그의 얼굴이 좋았다. 그것이 9년간 이어진 나의 결혼 생활의 가장 큰 난관이었다. 그것을 난관으로 표현하게 되어 유감스럽지만 결혼 6년 차에 시작된 심각한 우울증에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게 한 큰 난관인 게 분명했다.  우울증, 우울증의 시작은 남정숙, 남정숙을 만나게 된 건 결혼, 결혼을 선택한 것은 현우였기 때문에, 현우의 선택은 그의 외모, 외모가 난관이 맞았다.       

                                      

이제 난관을 헤쳐 나가 볼까?라고 생각한 어느 날이었다. 내 앞에 있던 사람, 장현우, 부모의 영역에서 독립하지 못해 늘 조마조마한 가여운 사람. 그 사람은 그날 내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미술 학원을 잠시 쉬겠다고 결정한 날, 결혼 6년 차였던 겨울, 현우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이 가여운 사람을 나는 버릴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의 답답함은 눈물이 되어 흘렀고, 그 답답함을 움켜 쥔 나는 점점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 꽁꽁 세상 안으로 숨으려 애쓰는 나의 증상은 그를 계속 울게 했다. 결혼, 남정숙, 장영,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일을 잃은 슬픔이 준 상처의 깊이가 잴 수 없을 만큼 커져 울고 있는 현우의 답답함을 움켜쥘 수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우리의 주말, 6년 차가 되자 정해진 요일, 즉 매월 셋째 주 주말에 현우의 부모님 댁으로 가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됐다. 계속해서 불편한 어떤 것, 나를 옥죄는 무언가를 규칙적으로 해야 함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었다. 매월 셋째 주 월요일이 되면 잠이 오지 않고, 음식물이 소화되지 않으며 극도로 예민해졌다. 우선 그 규칙적임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내 삶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잠시 그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규칙적으로 금요일 오후쯤 현우에게로 연락이 왔다.       

    

“주말에 집에 올 수 있니?”          

“아...., 네.”      

     

현우의 답은 언제나 예스, 어쩌면 현우 입장에서는 시간을 구속받는 것이 조금 불편할 뿐,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불편한 것이 크게 없었을지 모른다. 아마 그랬을 거다. 한 가지, 늘 내 눈치를 보는 현우가 어쩐지 안쓰러워 싫다는 내색을 크게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그때 적절하게 표현을 했다면 내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감정을 분명 너무 움켜쥔 것이다.          

 

내 삶을 윤택하게 하고,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삶이 행복한 이유였던 학원, 그것을 정리하게 만든 장본인, 남정숙, 그녀가 있는 집에 가서 마치 가사도우미가 된 것 마냥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싶지 않았다.  남정숙은 나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집이 좀 편안하겠다며 안도했다. 현우의 내조에 힘쓰라는 말을 덧붙였기에 나는 남정숙이 미술학원으로 출근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님, 처음부터 일을 정리하라고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이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참았다. 되돌아오는 말에는 온갖 뾰족한 것들이 박혀 있을 테니, 내 말을 꼭 움켜쥐었다. 남정숙을 내 삶에서 치우려면 나는 현우부터 정리해야 했다. 결혼 7년 차가 되며 무기력함이 급격하게 커져갔다. 미술학원을 정리하며 1년쯤 지나 다시 준비하고자 마음을 먹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 급기야 집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일, 음식을 준비하는 일등을 하지 않았다.     

현우의 퇴근 시간은 늘 일정했고, 그는 온갖 집안일을 해야 했다.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지지 않고. 어느 날은 설거지를 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안쓰러움이 터져 올라 펑펑 울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영문을 그도 알지 못해 급하게 고무장갑을 벗고 뛰어와 말없이 나를 안아주기만 할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나의 울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을 잘 읽고, 그 마음에 맞추어 위로할 줄 아는 사람, 장현우. 아픈 내 시간을 현우는 위로했다. 그랬다. 약도 주고 병도 주었다.   

        

“현우야, 이번 주에 부모님 연락 오시면 나는 안 가고 싶은데, 너 혼자 다녀올래?”           

“고운아, 그건 별로인 생각 같아. 같이 가자.”   

        

몇 번을 참다가 한 번쯤 이런 이야기를 해보지만 현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자식으로서 도리는 너 혼자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 상황도 어딘가 한구석이 불편해져 오히려 그가 생각하는 도리를 하는 편을 선택했다. 내가 움켜쥔 것, 그것을 계속 붙잡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남정숙의 집, 언제나 그렇듯 남자들 자리는 소파나 식탁의자다. 남정숙도 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들과 한패가 된다. 마치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한결같은 패턴에 나는 익숙해져 버렸다. 아무런 감정 없이 앞치마를 매고 냉장고를 열어 반찬 만들 재료거리를 살펴본다. 재료를 씻고 다듬는다. 밥을 안치고 육수물을 낼 준비를 한다. 그 사이 현우는 주방으로 와 물을 한잔 마신다. 내 눈치를 보는 것이다. 심기가 어떤지를 살피는 것이다. 나는 애써 웃음을 보여줬다.그가 다시 매뉴얼대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는 또 매뉴얼대로 반찬을 뚝딱뚝딱 만들었다. 수저를 놓고 반찬을 접시에 담아 식탁을 세팅할 때까지 그 어느 누구도 주방 근처에 오지 않았다. 시동생 장현호는 직장 때문에 타 지역에 있어 그 자리엔 없었다. 유난히 첫째에게만 엄격한 장현우의 집.     


7년 차에 내 우울감은 바닥을 뚫고 더 깊은 곳으로 내려앉았지만, 현우의 부모님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조금만 나를 신경 썼다면, 눈곱만큼이라도 작은 애정이 있었다면 금세 눈치챘을 아픈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장영은 유교 문화 중에서도 불합리한 남성 우월적인 성향을 깊이 가지고 있었다. 그가 과연 스스로 그것을 원하고 추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현우의 집은 그의 신념과 누군가로부터 내려온 가치관이 그대로 뿌리내려 있는 곳이었다. 이 집 문을 열고 들어오면 마치 다른 세상으로 이동한 듯  한 사람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은 한계치에 다다르고 나머지 사람들의 편안함과 여유는 감흥 없는 일상이 되었다. 하필 그날 그런 생각들로 꽉 채워져 있을 때 장영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우리 집은 이제 이 아버지의 고조부까지 제사를 지내려고 한다. 불만 가지지 말고 그렇게들 알아."

    

결혼 7년 차, 이제 움켜 쥔 것을 놓을 때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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