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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횬 Oct 25. 2024

돗자리와 시집살이

#12. 돗자리와 시집살이             


“우리 집은 이제 이 아버지의 고조부까지 제사를 지내려고 한다.”


그날의 주인공은 정말 돌아가신 분들일까?  장영의 이야기에 합리적인 의문이 들었다. 제사라는 의식에 대한 큰 거부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부감은 없었지만 제사라는 의식에 대한 의문은 늘 있었다. 과연 현우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는 저곳에 와 계신 걸까? 그리고 이제 우리는 현조부라는 명칭조차 생소한 누군가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도대체 그분은 누구이며, 어떻게 생기셨으며, 어떤 삶을 지내셨을까? 현우를 쳐다보니 아무런 저항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제사 음식은 그래도 본인이 장만하려 애쓰는 남정숙을 보니 담담한 얼굴이었다. 이미 두 분은 상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불만 가지지 말고 그렇게들 알아.”       

   

계속해서 민주적이지 못한 현우의 집, 일방적인 통보, 속에서 화가 끓기 시작했다. 제사, 얼굴도 모르는 고조부에서 더해 현조부까지, 거기다 나와는 피가 하나 섞이지 않는 그들의 제사는 명절까지 합쳐 열두 번, 거기에 남편을 포함한 시댁식구 생일, 어버이날, 결혼기념일 등을 포함하면일 년 중 20일 가까이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나, 안고운이었다.  요즘 죄다 제사를 없애거나 합치는 것을 합리적으로 선택한다고 하는데 나는 요즘 시대를 살고 있는 건지, 가슴이 답답해왔다.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한편으로 가 제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휴대폰으로 검색을 했다. 끓어오르는 화에 대한 근거가 필요했다.        

   

“조선시대에도 4대 봉사가 제도적으로 명시된 적은 없었다”          

“조상과 생전 주고받은 정서적 추억이 풍부할수록 추모의 심정은 간절해진다”며 “조상 제사의 대상은 (부모, 조부모 등) ‘대면 조상’까지로 한정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다”   

       

기사들을 보며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공신력 있는 보도자료에서도 합리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부글부글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화에 대한 근거를 찾은 나는 잠시 차분해졌다.   

   

“삼일 뒤에 4 대부 제사니까, 고운이 너 아침 일찍 집으로 오너라”   

        

3일 전 그들은 제사 횟수가 늘었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었다. 미술학원을 정리한 뒤 나에게는 이상한 변화가 나타났다. 내 의지와 별개로 속 이야기를 꺼내버리는 것이다. 분명 속으로 생각만 했는데 불쑥 밖으로 나와버리는 말들, 그날도 그랬다.         


“아버님, 왜 제가 얼굴도 모르는 분 제사 음식을 준비해야 하죠? 아버님은 제사 음식 언제 한번 해보셨어요?”  순간 나는 소름 끼치게 당황했다. 그리고 더 당황한 것은 현우, 그리고 장영. 그리고 남정숙의 작은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눈동자 크기를 보았다. 평소 눈이 작아 눈동자의 크기가 짐작가지 않았다. 그것이 궁금했던 나는 남정숙과 대화를 할 때 일부러 눈을 집중해서 보곤 했었다. 그날 그녀의 눈동자 크기를 보았다.              


“야가 무슨 말을 하노”           

“흠, 흠, 니 지금 제사를 못하겠다는 거가?”


순간, 너무 당황해 머릿속이 새하얘졌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생각을 했다. 처음은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이 제사의 마무리를 할 것이라고. 그다음 말은 내 의지였다.


“아버님, 아니요. 제사는 하세요. 아버님이 직접 음식도 하시고요. 저는 그 제사는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한조부제사”           


말의 끝은 흐려졌고, 현조부를 한조부라고 했지만 나는 명확하게 전달했다. 귀가 어두운 장영도 분명 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내 말에 대답하는 그의 행동에 나는 웃음이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장영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며 귓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며 말했다.     

      

“야가 뭐라 하는지 내 하나도 안 들리네. 오늘은 너희 집에 가서 자거라”    

       

일어나는 장영의 앞지퍼가 열려 있어 무늬가 화려한 속옷이 내 눈앞을 스쳐갔다. 나는 순간 이 상황이 너무 재밌었다. 아니 통쾌했다. 웃음을 참느라 얼굴은 시뻘게졌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나는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웃음소리는 그들의 귀로 들어갔을 텐데 화장실에서 나오니 그 누구도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문 앞에서는 현우가 짐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역시 그날의 나의 말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리고 나는 3일 뒤 정말 내가 말한 대로 제사 음식을 하러 가지 않았다. 물론 그날 밤이 지날 때까지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붙잡느라 혼이 났다. 왜 나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분으로 인해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는 걸까? 몸은 그곳을 가지 않았지만 마음은 그곳에 붙잡혀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아니 그 뒤로도 며칠은 내내 불편하고 불안해야 했다. 현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장영의 제사 통보에 반기를 든 나의 말들, 그리고 나의 행동에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퉁명스럽거나 화가 나 있지도 않았다. 평소와 같은 남편이었던 현우에게 나 역시도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지난 내 시간 안에 그런 날들이 종종 있었다. 은서에게 물었다.     

     

“은서야, 고등학교 때 내가 가정샘한테 그만 좀 하라고 했잖아. 기억나?”     

“응, 내가 그때 힘 좀 썼지.”           

“맞아 맞아, 너 덕분에 졸업한 거야, 나한테 좀 그런 면이 있는 걸까? 화가 나는 일을 못 참는?”      

“아니, 그땐 그럴만했으니 그런 거였지, 너 같은 부처가 어딨냐?”        

“요즘 이상해, 분명히 속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말로 쑥 나와버리잖아. 며칠 전에는...”   

        

나는 제사 통보 이야기를 은서에게 했다. 은서는 잘했다고 자기 속이 다 시원하다고 신이 나서 나를 토닥였지만 내 마음은 시원하지 않았다. 내 입으로 나오는 말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겼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적어도 고등학교 시절에는 하고자 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며칠 전 장영 앞에서 던진 말들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한 달 뒤, 이번에는 현우의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전날 남정숙에게 먼저 연락해 장을 같이 보고, 당일날 아침 일찍 제사 음식을 하러 그들의 동굴로 들어갔다. 새벽부터 음식을 준비했던 걸까? 남정숙은 나의 담당이었던 전을 깔끔하게 부쳐놓고, 탕과 나물까지 해두었다. 그리고 막 올린 생선이 역하지 않은 비린 냄새를 폴폴 풍기며 익어가고 있었다.      

     

“어머님, 이게 다, 언제 하신 거예요?”           

“내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새벽에 시작했네.”           

“생선만 좀 봐라. 나는 눈 좀 붙일게.”       

    

남정숙이 피곤해하는 모습을 나는 그날 처음 보았다. 왠지 그녀가 측은해졌다. 또 한 명의 제사 피해자, 그녀는 이날이 되도록 얼마나 많은 수의 생선을 굽고 전을 부쳤을까? 누구를 위해서? 앞서 이야기한 대로 나는 제사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 그분의 삶을 떠올리며 생전의 모습들을 되짚어 보는 의미 있는 시간, 하지만 그 시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은 모두 여자들의 몫, 더욱 웃긴 건 제사 음식 준비와 제기 준비 등을 모두 다 여자들이 하고 나면 남자들은 숟가락만 얹는 격이었다.  음식 앞에서 그들이 조상에게 예를 다할 때 여자들은 주방 한편에 서 있는다.      


그날도 그랬다. 새벽부터 일어나 음식을 준비한 남정숙 덕분에 내 노동력은 아낄 수 있었지만 각종 음식들, 과일, 떡, 제기와 숟가락, 술, 간장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제사상을 꺼내고 병풍까지 챙기고 나면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들은 가벼운 돗자리를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돌돌 말린 돗자리를 폈다. 내 눈에 들어온 돗자리는 이 날이 되기만을 기다린 듯 반짝반짝 윤을 내고 있었다.   

        

“아버님, 제사는 누구를 위한 의식인가요?, 혹시 돗자리 아닐까요?”  

         

돗자리 얘기에 누군가가 피식 웃었다. 남정숙이었다.

                                                                           

며느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단어, 시집살이, 지식 백과에서 제공하고 있는 정보에는 시집살이가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여자가 시집가서 시집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심신 양면으로 겪는 고된 생활, 오늘의 현대인들에게는 실감 나지 않는 퇴색된 말로 봉건시대의 유물이라고 되어 있었다. 요즘의 시집살이는 고되고 어렵고 구속이 심하고 지긋지긋하도록 부자유한 생활의 대명사로 쓰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9년째 요즘 시집살이 중이었다.    

 

궁금한 것이 생겼다. 내 시집살이의 주인 격인 남정숙도 시집살이를 했을까? 그들의 대화는 아니었지만 명절에 친척분들이 와서 꺼내는 이야기 안에 남정숙의 시집살이가 묻어 있긴 했다. 시할머니까지 모셨다는 그녀의 이야기, 나이 육십이 될 때까지 고약하기로 소문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누가 꺼내었는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삶을 공감해 보았다. 그것은 잠시였다.     


남정숙의 날카로운 목소리, “야야 뭐 생각하니, 어디 정신 팔고 있어? 과일 좀 더 깎거라” 그 말에 누군가 덧 붙였다. “아니 언니는 어째 우리 엄마보다 더하니. 질부야 칼 이리 줘, 내가 할게.” 아무것도 아닌 이 대화에 나는 목이 메이며 울컥했다. 나는 혹독한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의 며느리였다. 배우면 한 층 더 성장한다는 것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물론 결핍의 힘으로 성장한 그녀에게 현우의 존재는 남달라서 인지도 모른다. 뭐 어찌 됐든 나는 대물림되어 업그레이드된 시집살이 중이었다.    

       

이야기를 하려 들면 눈물부터 시작되는 시집살이 이야기, 어쩌면 결혼 전 바닥에 버려진 케이크부터가 시작이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남정숙의 무례한 막말이 아니었다면 나의 증상이 악화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증상이라 함은 몇 달 전 제사 통보 날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낀 이후로 유사한 상황이 계속 이어진 것이었다. 속으로 생각한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돗자리 이야기도 그 증상 중 하나였다. 생각을 했을 뿐인데 곧장 입 밖으로 말이 나와버리는 희한한 증상으로 현우 할아버지의 제삿날 돗자리가 입 밖으로 나와 심각성을 느낀 나는 곧장 정신의학과 상담을 예약하였고 몇 줄을 기다리고 얼마 전 상담을 하였다.  증상을 들은 의사 선생님의 소견은 언어 유창성 장애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스트레스와 외상 경험 후 나타나는 감정적 반응이 원인이라고 하였다. 두 가지 모두 스트레스 상황에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즉각적으로 말이 나오고 감정이 고조되면서 속으로 생각했던 말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될 수 있다고 하였다. 꾸준한 상담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자고 하셨고 스트레스 요인에 부딪히지 않도록 거리 두기를 추천하셨다. 물론 의사 선생님께 시집 살이 아야기를 가득했기 때문에 그는 거리두기 방법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것이었다.     

스트레스, 거리두기, 9년의 시간들, 돌이켜 보면 남현숙과 장영의 존재는 나에게 압박과 고통이었다. 그것은 결혼 전부터 시작되었으니, 웨딩 촬영은 꼭 시부모님과 같이 해야 한다는 것부터 이상한 것이었다. 그때 살짝 꿰어 두었던 단추를 떼어 냈어야 했다.          

 

“현우야, 웨딩 촬영 할 때 우리도 같이 가자. 담당하시는 분께 알려둬라. 내 드레스도 준비하라고 해.”

“어머님, 나중에 리마인드 웨딩 꼭 예약해 드릴게요. 저도 어머님과 촬영하면 너무 좋죠. 그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아마 담당자분께서 어렵다고 하실 거예요”      

“얘는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니? 현우야, 네가 있다 전화해 봐”      

     

현우는 위험하게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런 현우를 설득해서 담당자가 그 부분은 어렵다고 했다고 전하며 남정숙의 고집을 겨우 내려 앉힐 수 있었다.  결혼 후 그때의 일은 종종 회자되었다. 드레스를 입고 아들과 촬영하고 싶었는데, 업체가 아니라 네가 못 찍게 한 것이다. 너 때문에 가족사진을 못 찍었다는 등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며 나를 원망했다. 결혼 1년 차까지 착한 며느리병에 걸린 나는 남정숙의 이야기를 공감해 주었다.           


“어머님, 자꾸 말씀하시는 걸 보니 많이 속상하셨나 봐요. 제가 아니라 업체요. 우리 어머님, 진짜 속상하셨나 봐요. 그런데 자꾸 저라고 생각하시면 제가 속상해요”      


왜 그렇게 남정숙은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에 집착을 했을까? 해마다 두세 번씩 찍어 가족사진이 곳곳에 수두룩한데 왜 그렇게 가족사진을 찍고 싶어 했을까? 하필 그것도 웨딩 촬영하는 날에 말이다. 결혼 전 가장 큰 에피소드는 그것이었다. 결혼 1년 차까지 계속해서 억울하다고 표현하는 남정숙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애써 공감해 주었다. 물론 아직까지 그녀의 그 바람은 이해되지도, 공감되지도 않지만, 결혼 1년 차에는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결혼 3년 차까지는 매주 주말이면 진짜 ‘시집살이’를 하러 짐을 싸서 현우네 집으로 갔다. 주말마다 며느리 밥 얻어먹어서 좋다는 남정숙의 말에 헛웃음이 났다.  토요일 점심부터 간식, 저녁까지 손에 물이 마르지 않게 밥 시중을 드느라 밤이 되면 녹초가 되었다. 녹초가 된 며느리는 그분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잠들기 전 우리 방문을 노크하곤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새벽 운동을 가야 하니까 6시에 깨워서 샌드위치 좀 만들어 줘”        

   

다행히 눈치 있는 현우가 아침 샌드위치 시중을 들었고 그날 나는 남정숙에게 달달 볶였다. 그 시절, 결혼 3년 차까지 나는 그랬다. 아이씨 못해먹겠네는 그래서 나온 진심을 담은 내 의지의 말이었다. 4년 차부터는 되돌이표 주말 밥 시중에서 벗어났지만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두 분은 불청객으로 들어왔다. 정말 이사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 집 살림과 청소 상태는 매번 지적 대상이었고, 그렇게 6개월을 수시로 집에 찾아오는 그들을 막은 건 이번에는 현우였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만약 그 막음도 내 의지였다면 나는 그때 현우와 헤어짐을 택했을 것이다.  

    

언어 유창성 장애는 9년간 겹겹이 쌓인 그들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바로 미술학원, 남정숙으로 인해 미술학원은 유명해졌고,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따끔한 매질을 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현우와 내가 만나 시작할 수 있었던 곳을 정리하며, 이상하게 홀가분한 마음도 생겼다. 그와의 연결고리가 하나씩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날, 미술학원을 정리하던 날 남정숙은 나를 찾아왔다.      


“고운아, 속상해하지 마라. 내가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이제 집에 들어와서 살림에 집중해. 얼마나 좋아?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살림하고 편안하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이 말은 진심이려나 한참을 고민했다. 물론 현우의 뒷바라지에 더 많이 신경 쓸 며느리가 집에 주저앉게 되어 소기의 목적한 바를 이룬 사람의 기쁜 위로였다.    

  

“네가 그동안 몰랐겠지만, 현우는 고들고들한 밥을 좋아해. 아까 열어보니 밥 물이 너무 많더라. 앞으로는 물양을 좀 줄여서 해”      

“현우는 늦게 일하는 스타일이라 아침에 일찍 깨우지 마, 애 잠 부족하면 예민해져”      

“현우가 좋아하는 반찬 알고 있니? 젓갈은 신선한 걸로 빠트리지 말고 챙겨둬”     

 

계속해서 이어지는 현우, 현우, 현우. 내 안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님이 앞으로 챙기세요. 저는 현우와 못 살 것 같아요”      


그날도 분명 입 밖으로 소리가 나왔다. 깜짝 놀라 내 입을 막았다. 하지만 남정숙은 그 말을 들은 척하지 않고 짐을 주섬 주섬 챙겨 돌아갔다. 그때부터 내 증세는 시작이었음을... 남정숙만 알고 있었다.


남정숙은 의지와 상관없이 툭 튀어나오는 말을 하는 내 증상을 미술학원을 정리하던 그해, 결혼 6년 차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증상은 주로 그녀 앞에서만 자주 발현되었다. 처음 내 말이 툭 튀어나오던 날, 그녀는 별다르게 놀라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 말을 했는지 조차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 마냥 그 순간은 마침표를 찍었다.      


“어머님, 말을 왜 그렇게 험하게 하세요? 거의 막말 수준이잖아요.”      


나는 그 말을 속으로 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남정숙, 그녀가 놀라지 않았던 이유는 있었다. 자유를 사랑하는 나, 안고운은 억압의 세계에 들어서자 조용한 저항을 시작한 것이었다. 다행히 모든 사람이 아닌 억압의 주요 요인인 남정숙에게만 시작된 내뱉음은 남정숙도 이미 경험했던 잘 알고 있는 증상이었기에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남정숙은 못 들은 척 그 상황을 그냥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처음 몇 번은 정확한 상황 파악이 안 되었다. 그저 속으로 그 말을 뱉은 것이라 생각했고, 상대의 반응이 없었으니 허공에 뱉어진 말이라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어머님, 저한테 정말 왜 그러세요?”      

“이건 아니죠. 왜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세요?”     

“여긴 저희 집이에요. 당장 나가주세요.”      

“미술학원, 어머님 때문이잖아요.”      


남정숙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내뱉는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다. 현우가 출근한 후 소파에 누웠다. 미술학원을 정리한 뒤 나에게 생긴 증상 중 하나는 아침이 무기력하다는 것이었다. 에너지를 한껏 장착해 출근 준비에 힘을 쏟고 아침에 집을 나서는 기분이 참 좋았었다. 그것을 하지 못하는 그 시간이 의미 없이 느껴졌고, 그것은 무기력함으로 나타났다. 그날도 소파에 누워 TV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마땅히 보고 싶은 프로가 없어 TV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려던 참이었다. 그날따라 무기력함이 몸 전체를 휘감아 눈꺼풀이 계속 내려앉고 있었다.     

 

“삐삐삐삐”      


갑자기 들리는 현관문 도어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소파에 앉았다. 남정숙이었다. 자주 있는 일이지만 매번 이렇게 놀랐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매번 준비하고 있는 것도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무방비로 있기로 했다. 그날도 나는 속바지 차림에 머리를 질끈 묶고 민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자주 있는 일이니 인사만 하고 다시 소파에 누웠다. 그날따라 움직일 힘도 며느리로서 그녀가 바라는 예의를 갖출 의지도 없었다.      


“얘야, 넌 시애미가 왔는데 그 무슨 자세냐? 당장 일어나지 못해?”      

“네?” 팔을 위로 올려 얼굴을 받쳐 옆으로 누워 멀뚱멀뚱 남정숙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TV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너 지금 무슨 짓이니?”      

“제 집에서 제가 누워 있는 게 뭐가 문제죠? 볼일 보시고 가세요.”

     

남정숙은 상황 파악을 했고, 그때부터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여기저기 집안을 살폈다. 나는 볼일 보고 가세요,라는 말부터 실제 내 입에서 말들이 뱉어지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말이 떨어지면 상대의 대꾸가 없었는데, 그날은 몇 마디가 오고 갔던 것이다. 순간 너무나 당황을 했고,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 입에서 뱉어진 것이라 여겼지만 혹시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님, 혹시 제가 무슨 말을 했나요?”     

“말? 아니다.”      


볼일 보고 가세요란 말은 남정숙에게 매우 시건방진 말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듣고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안심했다. 그리고 또다시 내 안에 들어선 무기력함에 다시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잠으로 에너지를 충전한 것일까? 한참 잠으로 내 안에 에너지를 채우고 일어나니 움직일만했다. 그리고 아침에 남정숙이 다녀간 것이 꿈처럼 느껴졌는데, 꿈은 아니었다는 것, 그녀가 현우가 먹은 아침 그릇들을 설거지를 했고, 청소기를 돌리고 갔다는 것을, 내가 입으로 내뱉은 말의 실체를 나는 알게 됐다.

      

그리고 남정숙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모른 척하고 있다는 것도.      

자유 의지를 막아 세운 것, 그것에 대한 저항은 남정숙에게로 향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현우와의 단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 6년 차부터 시작된 나의 무기력함은 그것 조차도 하지 못하게 했다. 작은 이모를 만나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하며 나는 울지 못했다. 울음조차 무기력해져 그저 눈꺼풀만 무거워졌을 뿐.

     

“이모, 그때 아버지 이야기를 나한테 매우 자세하게 한 이유를 알 것 같아. 난 아버지를 닮았나 봐”      

“이미 넌 선택을 했지만, 선택이 중요하단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그때 좀 더 잘 들을 걸 그랬나 봐. 선택은 어느 시점이 되면 답을 해주는 것 같아”      

“지금 네 답은 원하는 게 아닌 거지?”     

“무척이나 아니야”      

“나도 그랬어. 그리고 또 선택을 해야 했지.”     

“지금은 다른 선택을 할 힘도 없네. 왜 이렇게 된 걸까?”      

이모는 다른 말이 없었다. 어떤 선택을 하라는 조언도 하지 않았다. 단지 뭐든 스스로 결정하는 거라고, 분명 이번에는 현명한 선택을 할 거라고, 나를 믿으라는 이야기만 했다.      

“이모, 문제를 알고 있는데 왜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네 문제는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닌 거지. 오랜 시간 답습해 온 우리의 문화, 정서, 가부장적 제도가 끄트머리에 남아 하필 우리 고운 고운이와 만났네.”    

  

이모의 말은 나에게 어느 정도 답을 주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 힘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누구도 가해자는 없는 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만 같았다. 저항의 다른 이름은 바로 무기력함이었다. 그렇게 나의 9년 차 결혼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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