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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횬 Oct 25. 2024

달라진 건 없었다

#10. 달라진 건 없었다             

            

결혼 9년 차, 내 삶의 결은 바뀌었다. 은서가 있던 세상에서 은서가 사라진 세상으로, 어두웠지만 달빛이라도 있던 밤이 온전히 까맣게 된 듯 그 어느 날보다 마음은 차가워졌다. 차가움은 어느새 단단해졌다. 비록 연약하고 소극적일지라도 은서 몫까지 투쟁해야 했기에 그만 눈물을 닦아야 했다.     


은서는 내 이야기들로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 기쁨이 컸다고 했지만 돌이켜 보면 결혼 후 내 이야기들은 힘듦과 속상함을 쏟아냈던 볼품없었던 이야기들이었다. 은서의 아픔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호강스러운 이야기들이었다.     


이제부터는 은서에게 투정 부렸던 나의 9년 이야기다.     

은서에 비하면 하찮은 나의 이야기지만, 자유가 삶의 큰 에너지인 나에겐 그 당시 꽤나 묵직했던 시간들이었다. 그 묵직함은 쉽게 벗어 버리기 어려웠고, 오래 가지고 있기에도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3년째 되는 해, “아이씨, 못해먹겠네.” 로 시작된 현우와의 잔잔한 위기는 현우의 고백으로 꽤나 잔잔하게 마무리되었다. 현우의 고백, 그동안의 억압된 감정을 명확히 알지 못했던 그는 내가 고무장갑을 던지며 뱉은 한마디에 각성을 했다고.     


“괴로웠어. 그런데 나는 계속해야 해. 이건 어쩔 수 없어. “     


뭐가 괴로운 건지, 뭘 계속해야 하는지, 뭐가 어쩔 수 없는지 현우가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현우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와 헤어질 마음은 사실 추호도 없었다. 권위적인 가부장적 문화가 닳지 않고, 오히려 어쭙잖게 변질되어 내려온 가정의 아들은 아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다. 그 아들의 아내, 그들의 며느리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를 현우는 어머니를 옆에서 보며 이미 알고 있었고, 정도가 약하거나 다를 것이라 기대했던 어머니의 며느리를 향한 마음과 행동이 그의 할머니와 별반 다를 게 없음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고 했다.     


”현우야, 지난 3년이 나에게는 고통이었어. 그리고 나에게는 자유가 삶의 큰 가치란 걸 알게 됐어.”     

“미안해, 지켜만 봤어”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몇 주만 있다가 집에 같이 가보자. 그전에 내가 부모님을 만나볼게 “   

  

현우는 장담했다. 분명히 두 분은 달라질 거라고.     

현우는 혼자 집으로 들어서며 가장 먼저는 아버님의 불호통을 만났고, 두 번째로 어머님의 혀 차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두 분은 달라지지 않았고, 요즘 애들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으셨다고. 단, 주말마다 오는 일이 힘들어 그런 것 같으니 한 달에 한번 주말만 집에 와서 지내라고… 그리고 마지막에 아버님께서는 자주 전화하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전했다.     


한 달에.. 한 번은 매주 주말에 비하면 큰 발전이었다. 하지만 몇 주 뒤부터 요즘 애들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그 말씀을 두 어른은 번갈아 여러 번 이야기하다가 결국 실천하셨다. 그 실천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혹은 누구를 탓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두 어른은 수시로 우리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앉아 계셨다. 하루는 소파에, 하루는 식탁 의자에, 하루는 안방 침대에.     


어느 날은 싱크대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는 것을 지적하셨고, 어느 날은 수건을 개어 둔 스타일을 지적하시며 당신의 수건 개는 방법을 강요하셨다. 또 어느 날은 냉장고 반찬 종류를 살펴보시고는 먹을 게 없다고 훈계하셨다. 먹을 게 없다는 말은 신혼 초 엄마의 이바지 음식을 보고 하셨던 기선제압용 말이었는데 다시 들으니  울화가 치밀었다. 치밀어 오른 화는 쉽게 가라 않지 않았다.     


왜 나는 내 생활을 간섭받아야 할까? 두 사람은 어떤 권리로 내 집 현관 비밀번호를 이렇게나 자주 누르고 들어와 내 삶의 한 영역을 차지하는 걸까? 당연한 듯 들어와 내 집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려 하고, 트집거리를 찾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이 불편한 감정을 넘어서 두려워졌다.      


냉장고, 주방 담당은 현우였지만 현우는 부모님이 머무실 때면 그곳을 애써 외면했다.     


“어머님 주방이랑 냉장고는 현우 담당이에요. 현우 불러 드릴까요? 현우에게 조금 더 자세하게 알려 주시죠.”  

   

나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이상하게 시부모님 앞에서는 작아졌다. 현우와 결혼한 일이 어떤 큰 죄를 지은 것 인양 그들 앞에서는 죄인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들락날락 거리는 그들 탓에. 우리의 주말은 대청소로 채워졌고 여전히 주말을 온전히 찾지 못한 우리, 이번에는 현우가 나섰다.     


현우는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어린 시절이 기억 때문일까? 소통 불통이었던 아버지, 다정함이란 눈곱만치도 없는 남다른 카리스마로 똘똘 뭉친 아버지였다. 그것이 그에게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었을 테니. 나는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누구나 감정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표현이 감정을 온전히 담기도 하지만 절반만 담기도 하고, 아예 다른 감정으로 느끼게도 한다. 표현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사람의 영역이기에, 우린 늘 완벽할 수는 없다. 현우에게는 그의 아버지는 무서운 존재, 거역할 수 없는 존재, 그리고 어쩌면 현우의 말대로 그의 이번 생을 망하게 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버지, 집으로 오시는 거 이제 그만하시죠. 부탁이 아니라 통보입니다. 비밀번호를 바꿀 테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아버지에게 현우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말의 문장은 급격하게 짧아졌고, 그래도 나름대로는 우리의 뜻을 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이제 집에는 오지 마세요." 아버지의 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의 어이없어하는 표정과 눈빛에서 현우는 주눅이 들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우리는 곧장 현관 비밀번호를 바꿨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마치 나쁜 짓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현우는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아슬아슬한 4년 차 결혼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미술 학원 일에 어머님의 간섭이 시작되었다. 지난 9년 중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남정숙의 행동, 수백 번, 수천번 그녀가 되어보아도 목적도 이유도 알 수 없었던 아직도 미스터리 한 그때의 일들은 나를 지금까지도 옥죄인다.    

 

며느리의 존재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가족? 손님? 아니면 매일이 낯선 이방인? 남정숙의 관여로 6년째 되던 해 어느 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낙엽이 스산하게 뒹굴거리던 날, 나는 미술 학원을 접어야 했다. 혹시 그녀가 원했던 것은 이것이었을까?                                   

                          

엄마는 엄마를 빼닮은 딸이 좀 더 공부를 이어갔으면 했다. 대학원을 가거나 유학을 가서 그림을 좀 더 연구하고, 내 분야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그럴 것이 초등학교 시절 반장을 놓치지 않았고, 중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급 임원을 하며 그것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기에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도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된다면 내 삶이 행복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내 생각은 달랐지만.      


내가 학급의 리더가 된 것은 엄마의 희망이었다. 엄마의 기대였다. 그리고 나는 학급에서 맡은 역할이 즐겁지 않았다. 집에서는 엄마의 기대,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학급 친구들의 기대가 나를 무겁게 했다. 엄마에게는 들키지 않았던 무거움, 어른이 된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내 삶을 온전히 누리며 조용히 사색하고, 소중한 사람과 삶을 공유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었다.      

어른이 된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녀들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지켜만 보세요. 자녀들의 삶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를 들여다보고,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세요. 엄마가 내 삶을 강요하거나 내 선택을 막지는 않았지만, 엄마의 희망 사항은 늘 나의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결혼을 선택한 것에는 엄마의 희망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땐 커다란 현우의 존재가 눈앞을 가로막아 내 눈에 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 분명 희망이 있었을 나의 엄마는 어쩌면 그 당시 상심이 컸을지도 모른다. 아니, 상심이 무척 컸다고 한다. 그것은 뒤늦게 작은 이모에게 전해 듣고 한참을 웃다가 울어버렸으니, 웃기다가도 슬픈 이야기였다.     

 

“정남아, 나는 안 되겠어. 고운이 너무 예쁜 나이야. 이렇게 빨리는 못 보내.”      


엄마는 발을 동동 구르며 거실과 주방을 종종걸음으로 계속 왔다 갔다 걸으며 고개를 마구 흔들어 댔다고 했다. 엄마는 아담한 키에 손, 발이 참 작고, 얼굴은 조금 큰 편에 어깨가 왜소하고 몸도 마른 편이라 별명이 ‘숟가락’이었다. 내가 보아도 엄마는 숟가락과 참 닮아 있어 이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방 거실을 오가는 숟가락의 형상이 떠올라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모의 이어지는 이야기에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이 예쁜 나이에 결혼은 아닌 것 같은데, 정남이 네 생각은 어때? 결혼이 그냥 둘이 사는 문제가 아니잖아.”      

“응, 절대 아니지.”      

“아무것도 모르는 철딱서니를 어쩌면 좋아.”     

“언니, 고운이가 잘 선택했을 거야. 야무진 아이잖아.”     

“네가 몰라서 그래. 내 눈에 아직 어리디 어린아이야, 벌써 가버림 어쩌나. 지 친아버지 몫까지 아직 다 주지 못했는데.”      


아버지, 아버지 이야기가 엄마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몫, 거기서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터졌다. 친정 엄마는 그랬다. 결혼과 함께 마치 떠나는 것 같이 여겨 다 해주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출가외인’ 이란 서글픈 말의 뜻을 아는가? 날 출(出), 시집갈 가(稼), 바깥 외(外), 사람 인(人), 시집간 딸은 가족이 아니라 남이나 마찬가지라는 이 이상한 고사성어는 조선시대의 표현이다. 유교문화가 지배했던 남녀차별의 대표적인 말, 여자는 혼인하면 더 이상 친정 사람이 아니라는 요즘 시각에서 참 이상한 이 말은 이해가 안 되는 표현이라고들 하지만, 내려오고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 관습과 결혼의 정서 안에 아직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더 잘해주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출가외인을 집에 들인 남정숙은 나를 현우의 뒷바라지에 충실한 여인으로 만들려 했다.   

   

한 번씩 그들의 식탁 대화의 주제는 이것이다. ‘일하는 며느리’, 가정 안에는 여자가 있어야 한다는 둥, 가장의 역할과 안사람의 역할이 다른데 세상이 잘 못 돌아가고 있다는 둥, 여자가 바깥일 하는 사람 뒷바라지를 잘해야 가정이 편하다는 이야기를 장영은 서슴없이 했다. 뒤 이어 남정숙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편은 하늘이며, 자신이 집안을 잘 다스렸기 때문에 이만큼 살게 된 거라고, 우리 집만큼 편안하고 가족 간에 화목한 집이 어딨 냐는 동의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당당하게도 했다.    

  

그들의 눈에 일하는 며느리인 나는 눈에 가시였고, 어떻게든 나를 집 안에 들여놓으려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남정숙은 어느 날부터 매일 미술학원에 출근을 했다. 데스크 비슷한 곳에 앉아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했고, 내가 하는 것을 보고는 학부모들에게 상담 비슷한 것도 해주었다. 그것 정도는 감사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호의로 다가온 그녀의 출근은 날이 갈수록 모든 이들에게 비호감이 되었고, 급기야 학부모의 민원과 원생들의 타 학원 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친절했던 말투가 매우 거칠어졌고, 아이들의 작품 훼손, 학부모와의 기싸움, 급기야 몸싸움까지.    

  

몇 년을 준비했고, 현우가 인테리어에 공을 들인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이곳이, 그의 어머니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이 현우의 뒷바라지에만 힘쓰는 조신한 조선시대 며느리를 만들기 위함이었음을 단 한 번도 예측하지 못했다.  

    

어른이 된 누군가는 그랬다. 자식의 의사결정,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았다. 자식을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식의 독립은 곧 불효라 여겼고 어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 여겼다. 자식의 선택권은 부모 다음, 언제나 후 순위였으니, 그 선택은 늘 초라해졌고 힘이 없었다. 내가 미술학원을 고민할 때 현우의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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