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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Sep 03. 2020

레닌그라드를 구원한 생명의 길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대한 지리적 고찰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해하(垓河) 전투에서 한나라 군대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초나라 군대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랫소리에 결국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와해된 데서 비롯된 성어이다. '역발산기개세'라 불리던 용장 중의 용장 항우가 지휘하던 용맹 무쌍한 초나라 병사들이었지만, 사면이 포위된 상황에서는 결국 전투의지를 잃고 와해되고 말았다.

  포위되어 고립된 군대는 전쟁을 지속하기 어렵다. 보급 및 아군 부대로부터의 지원이 차단되고 병력과 물자를 보충하기 어려워지는 데다, 사기까지도 급격히 저하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 지휘관과 참모들은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프랑스를 40여 일 만에 함락시킨 나치 독일의 전격전 역시,  B 집단군 병력이 아르덴 삼림지대와 세당을 돌파하도록 하여 A 집단군과 더불어 프랑스군의 주력을 단기간에 포위하는 데 성공한데 따른 결과물로서의 성격이 크다. 이 외에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대승리의 사례를 살펴보면, 포위 섬멸전을 통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경우가 많다.

  그런데 2차대전 중에는 3년에 가까운 기간에 걸친 포위를 버텨내고, 결국 승리를 쟁취했던 사례가 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바로 그 사례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북부집단군의 목표였던 레닌그라드, 9월 8일 봉쇄당한 이후 1944년 1월 27일까지 무려 871일에 달하는 저항을 이어갔다. 전후 레닌그라드는 소련 정부에 의해 영웅 도시로 지정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나치 독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소련인과 소련군의 용기와 희생정신을 상징하는 지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본 절에서는 레닌그라드가 3년이 넘는 포위를 이겨낼 수 있었던 까닭을, 지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발트 해 남동부의 핀란드만 만입부에 위치한 항만도시인 레닌그라드는 본래 상트페테르부르크(St.Peterburg)라는 이름의 도시로, 서구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추진했던 제정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대제(Пётр Великий, 표트르 1세, 1672-1725)에 의해 건설되었다. 발트 해의 제해권 확보를 통한 서구 진출에 필요한 부동항과 거점을 구축하려는 목적으로 건설된 이 도시에는, 서구화를 지향했던 표트르 대제의 이름을 따서 러시아어 지명인 페트로그라드(Петроград)가 아닌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독일어 지명이 붙여졌다.

  1712-1918년간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소련 수립 이후 소련의 설립자이자 국부인 레닌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로 개명되었다. 제정 러시아의 차르가 아닌 소련 공산당의 지도자 이름을 딴 지명으로의 개명을 통해서, 레닌그라드를 소련 체제의 정당성과 공산주의 이념을 공고히 해 주는 장소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이를 문화지리학에서는 '지명의 문화 정치'라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이처럼 레닌그라드가 소련 체제와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지명을 얻게 된 까닭에는, 레닌그라드가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이 된 장소였다는 역사적 맥락도 자리하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의 서막이라고도 평가되는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 러시아 혁명의 직접적인 계기였던 순양함 아브로라(Аброра) 호의 함상 반란 등이 레닌그라드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레닌그라드가 가지는 러시아 혁명을 상징하는 장소로서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 준다.

  소련 수립 이후 수도 기능은 모스크바로 되돌아갔지만, 레닌그라드는 소련에서도 여전히 중요성이 매우 높은 도시였다. 독-소 전쟁 개전 직전 250만 명에 달하는 많은 인구와 발달된 인프라를 갖춘 대도시였던 레닌그라드의 공업 생산력은 소련 전체 공업 생산력의 10분의 1을 상회할 정도였다. 전략적,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표트르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동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레닌그라드는 발트 해의 제해권 확보에 있어 중요성이 대단히 높은 해양력의 요지였고, 실제로 발트 함대 본부의 소재지이도 하였다. 무엇보다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600여 km 떨어진 장소에 위치한 레닌그라드가 함락된다면, 모스크바는 자칫 나치 독일의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의 협격을 받아 포위될 우려가 컸다.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사이에는 지형상 자연적 장애물의 발달이 미약한 편이었고, 제정 러시아 때부터 러시아 제1, 제2의 도시였던 만큼 이 두 도시 사이에는 철도와 도로망도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위협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레닌그라드는 제정 러시아와 소련의 전략적, 정치적 요지이자 중심지였지만, 독-소 전쟁 개전 당시에는 지리적으로 취약한 여건에 직면해 있기도 하였다. 우선 당시 레닌그라드는 카렐리야 지협을 을 경계로 한 핀란드와의 국경선에 인접해 있었다. 핀란드가 제정 러시아의 속국이었던 시절에는 이러한 위치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방위와 안보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독-소 전쟁 개전 시점에는 이미 엄연한 독립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1939년 겨울에 소련군의 침공을 받았던 핀란드는 이로 인해 상실한 영토를 되찾고 소련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즉, 동쪽의 나치 독일군뿐만 아니라, 핀란드라는 북쪽의 적까지도 상대해야 했었다. 핀란드군은 규모는 작았지만 이미 겨울전쟁에서 숫적으로 압도적인 소련군을 고전시킬 정도로 뛰어난 전투력이 뛰어났고, 이들이 나치 독일과 손잡고 레닌그라드를 협공한다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위협이 될 터였다.

  뿐만 아니라, 레닌그라드는 동쪽으로 라도가 호(Ла́дожское о́зеро, Lake Ladoga)라는 유럽 최대 규모의 담수호에 인접한다는 지리적 특징도 가졌다. 경상북도 면적(약 19,033㎢)보다 조금 작을 정도로 거대한 면적(약 17,891)을 가진 이 호수의 존재로 인해, 레닌그라드의 위치는 서쪽의 발트 해(핀란드 만)와 동쪽의 라도가 호 사이에 놓인 좁은 지협(카렐리야 지협) 상에 위치한 모양새가 되었다. 때문에 독-소 전쟁기 레닌그라드의 지정학적, 군사지리학적 위치는 적군의 포위와 봉쇄에 취약한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나치 독일군 북부집단군은 발트 3국을 점령하고 레닌그라드로 향했다. 북부집단군 병력은 1941년 9월 8일 레닌그라드 시내에서 약 1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더불어 북쪽에서는 핀란드군이 카렐리야 지협 방면으로 진격해 왔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볼호프 전선군으로부터 격리시키는데도 성공했다. 레닌그라드는 소련군과 핀란드군, 그리고 라도가 호에 의해 완전 포위되고 말았다.

  레닌그라드를 포위한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시내에 병력을 돌입하는 대신, 포위망을 유지하고 포격과 공습을 지속했다. 레닌그라드는 소련에서도 인구는 물론 경제, 산업, 군사 등의 측면에서 수위에 드는 대도시였던만큼, 병력을 돌입시켜 시가전을 벌인다면 자신들의 피해도 막심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대규모 포격으로 인해 레닌그라드는 막대한 손실과 피해를 입었다. 레닌그라드에 가해진 포격과 공습은, 산업 및 군사 시설은 물론 민간인 거주 지역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애초부터 인종주의에 따라 소련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했던 데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고사시킬 의도로 포위를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외부와의 연결도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로 인해 레닌그라드에는 물자 부족은 물론, 심각한 기아가 도래했다.

  나치 독일의 포격과 공습으로 인해, 레닌그라드에서는 끊임없이 사상자가 발생했고 도시는 폐허로 변해갔다. 군사시설은 물론 민가에까지 무차별적인 폭격과 공습이 행해졌고, 밤낮을 막론하고 공습을 받은 지역에서는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레닌그라드 시민들과 소련군 장병들은 나치 독일군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임무뿐만 아니라, 포격과 공습으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를 후송하는 또 다른 격무에까지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식량 부족과 기아였다. 애초에 나치 독일은 레닌그라드를 아사시켜 점령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포위망으로 인해 보급로가 차단당한 레닌그라드의 식량은 빠르게 소모되어 갔다.  1941년 겨울이 도래하면서, 레닌그라드의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레닌그라드 시민과 소련군 장병들은 심각한 기아에 시달려야 했다. 식량 부족과 기아로 인해 하루 200g 미만의 식량으로 버텨야 하는 날들도 적지 않았으며, 여기에 의약품 등의 부족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수많은 레닌그라드 시민과 군 장병들은 병사하거나 심지어는 아사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 보니 쥐를 잡아먹거나 가죽 제품 등을 삶아 먹는 경우는 물론, 식량 확보를 위한 범죄나 약탈이 빈발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식인 사례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소련군은 식인 범죄자들을 단속하기 위한 특별 부대를 운영하기까지 해야 했다.

  레닌그라드의 대규모 기아 문제는, 심지어 오늘날 의학이나 보건 분야에서도 연구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다수의 연구에 따르면, 레닌그라드 포위 시기아 기아에 시달린 산모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성장한 뒤에도 내분비계 질환, 심혈관계 질환, 비만 등의 질환에 대한 유병률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다고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은 그만큼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시민들이 겪었던 기아와 영양실조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레닌그라드의 포위망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장비와 물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식량의 보급이 최우선 과제였다. 무엇보다 레닌그라드가 심각한 기아에 직면했던 만큼, 레닌그라드 시민과 방어군이 아사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식량 보급이 절실했다. 하지만 소련군과 핀란드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레닌그라드에, 일반적인 보급로를 통해서 식량을 공급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레닌그라드를 아사와 고사에서 구해 준 것은, 바로 도시 동쪽에 인접한 광대한 라도가 호였다. 라도가 호는 겨울이 되면 결빙되어 두꺼운 빙판이 형성되었다. 소련 군민은 바로 이 라도가 호의 빙판을 식량과 물자, 그리고 환자와 증원 병력을 수송하는 수송로로 활용하였다. 육지의 도로망은 나치 독일군과 핀란드군에게 완전히 봉쇄되었지만, 라도가 호까지 나치 독일군이 장악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레닌그라드의 식량이 바닥을 드러낸 1941년의 겨울에는 라도가 호가 결빙되는 시기였고, 소련 군민은 얼어붙은 라도가 호의 빙판을 식량 수급을 위한 보급로로 사용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레닌그라드로의 물자 보급이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1941년 11월 20일, 식량과 물자를 실은 수송대가 라도가 호수의 빙판을 넘어 레닌그라드에 도착했다. 이들이 수송해온 식량과 물자는 레닌그라드의 식량난과 물자 부족을 완전히 해결하기에는 당연히 부족했지만, 심각한 수준의 기아와 물자 부족을 해결하는데 의미 있는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레닌그라드 시민과 군 장병의 사기를 크게 고취시켰다.

  물론 라도가 호를 통한 물자 수송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라도가 호의 빙판이 두껍게 얼었다고는 하나, 물자를 가득 실은 무거운 차량을 지탱하지 못하여 깨어져 버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군은 라도가 호를 통한 보급선을 마비시키기 위해 수송대가 발견되는 즉시 공습을 가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수송대원들은 빙판이 갈라진 탓에 익사하거나, 나치 독일군의 공습을 받아 목숨을 잃어야 했다. 하지만 라도가 호의 빙판길은 레닌그라드 포위 기간 동안 레닌그라드로 식량과 물자, 장비, 인원을 보급하고, 부상자들을 후송하는 경로로 유용하게 쓰였다. 때문에 라도가 호는 레닌그라드 시민과 군 장병들로부터 '생명의 길(Дорогой жизн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얼음이 녹으면 선박을 통한 보급이 이루어졌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레닌그라드 시민과 소련군 장병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졌던 '라도가 호의 노래(Песня о Ладоге)' 가사는, 이처럼 막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던 레닌그라드를 구원했던 수송대원들의 용기와 희생을 그리고 있다.

라도가 호의 노랫소리여, 바람과 눈보라를 뚫고 모든 장애물을 넘으며 날아올라라! 여기 포위망을 뚫고 낸 길을 통해서 가라. 다른 길을 찾지는 마라... 한겨울에 수송대 행렬은 질주했고, 라도가 호의 얼음은 갈라져 갔네. 북쪽의 수도에 빵을 공급해온 그들을, 우리 레닌그라드는 반가이 맞이했지... 아, 라도가 호여! 내 고향 라도가 호여! 눈보라와 폭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곳이지만, 내 고향 라도가 호는 '생명의 길'이라고 불렸다네.
라도가 호의 빙판길 위로 이동하는 수송대 차량 행렬의 모습(출처: ww2today.com)

  핀란드군의 사정, 그리고 모스크바 전투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영향을 미쳤다. 우선 카렐리야 지협을 탈환하며 레닌그라드 북쪽으로 진격해 오던 핀란드군의 공세는, 1941년 8월 말에 접어들에 눈에 띄게 둔화되었다. 핀란드는 인구가 적고 국력도 약했기 때문에, 겨울전쟁과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입은 손실이 누적되면서 이 무렵에는 핀란드군이 작전 한계점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노르웨이에는 노르베겐 야전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야전군 규모의 이 부대는 집단군보다 규모부터 작았을 뿐만 아니라 바렌츠 해와 노르웨이 해를 견제할 요지인 노르웨이를 사수해야 할 이들 병력을 함부로 이동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핀란드 정부는 상실한 영토 회복을 넘어 영토 확장을 위해 겨울전쟁 이전의 영토 회복을 전제로 한 소련 측의 휴전 제안까지 거부하며 전쟁을 지속했다. 하지만 핀란드군은 심한 전력 소모가 누적된 상태였던 데다 소련군이 레닌그라드가 포위된 상황 속에서도 전열을 정비하면서, 이들의 위협은 사실상 레닌그라드 북쪽을 견제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더욱이 1941년 12월 6일에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이 핀란드에 선전포고를 하자, 영국에 이어 미국까지 적으로 돌려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릴 것을 우려한 핀란드는 공세를 자제했다.

  모스크바 전투 역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영향을 미쳤다.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격했던 중부집단군이 모스크바 함락에 결국 실패하고 소련군의 역습에 직면하면서, 레닌그라드를 포위한 북부집단군 역시 중부집단군과의 연계 또는 중부집단군으로부터의 증원을 통한 전력 증강 등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만일 중부집단군이 작전 목표였던 모스크바 함락에 성공했더라면, 우선 레닌그라드의 사기부터 급전직하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함락에 성공한 중부집단군 병력이 레닌그라드 방면으로 공세의 방향을 전환하여 북부집단군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포위 또는 공격했다면, 레닌그라드 함락은 물론 나아가서는 소련 체제조차도 붕괴되거나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타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스크바 전투의 결과는 그 반대의 양상으로 끝났고,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포위를 이어가기는 했지만 레닌그라드 시민과 군 장병들의 저항 능력 및 의지를 소멸시키는 데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1941년 겨울 윈스턴 처칠이 자신의 일기장에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지만, 함락되지는 않는다'라는 문구를 적었듯이 말이다.


  나치 독일은 29개월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레닌그라드를 포위했지만, 결국 레닌그라드 함락에는 실패했다. 레닌그라드 시민들과 소련군 장병들은 기나긴 포위 기간 동안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나치 독일의 포격과 공습, 그리고 심각한 수준의 기아와 영양실조, 물자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이들은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는 대신 저항을 이어 갔다. 발트 함대 소속의 전함 마라(Марат) 호의 무용담은, 레닌그라드의 저항을 상징하듯 보여 준다. 마라 호는 1941년 9월, 나치 독일 공군의 전설적인 에이스 한스-울리히 루델(Hans Ulrich Rudel, 1916-1982)이 조종하는 급강하 폭격기 Ju-87D 슈투카의 폭격을 받고 함수부가 대부분 날아가 버린 채 레닌그라드 군항에 착저(着底)해 버렸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마라 호의 주포는 대부분 정상 작동을 하였고, 대파된 마라 호는 마치 해안포처럼 나치 독일군을 향해 레닌그라드 포위가 풀릴 때까지 2천 발에 가까운 포탄을 발사하였다. 포위되었지만 함락되지 않은 레닌그라드를 지켰던 이 군함 역시, 착저 했지만 침몰하지 않았던 셈이었다.

대파된 채 착저 한 마라 호의 모습. 착저한 뒤에도 마라 호의 주포는 나치 독일군을 향해 불을 뿜었다.(출처: albumwar2.com)

  레닌그라드는 바르바로사 작전에 이어 수립된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인 청색 작전(Fall Blau)에서도 조공인 북부집단군의 목표로 설정되었다. 이에 따라 북부집단군은 열차포를 동원하는 등, 레닌그라드 포격 및 공습의 강도를 증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레닌그라드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1941년 겨울의 극도로 절박했던 레닌그라드의 식량난은, 라도가 호를 통한 보급이 성공한 이후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포위된 레닌그라드의 고통과 희생은 여전히 지속되었지만, 라도가 호 등을 통한 보급은 비록 풍족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레닌그라드 시민과 장병들이 저항을 이어가는데 지대한 기여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조밀하게 연결되는 견고한 참호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이를 토대로 나치 독일군의  포격과 공습을 견뎌냈다.

  최악의 상황을 면한 1942년부터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해방을 위한 공세를 여러 차례 시도했고, 1943년 1월에 실시된 이스크라 작전(операция Искра)을 통해 라도가 호 남서쪽에서 나치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협소한 회랑을 확보하는 수준이었지만, 레닌그라드가 완전 포위 상태에서 제한적으로나마 볼호프 전선군이 관할하는 소련 영토와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확보한 셈이었다. 이후 독-소 전쟁에서 전쟁의 주도권이 소련 쪽으로 확실하게 넘어갔고, 1944년 1월 27일에는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나치 독일군이 완전히 철수함에 따라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약 250만명이었던 레닌그라드 시민들 가운데, 63만-150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레닌그라드 공방전 기간동안 나치 독일군의 포격과 공습, 그리고 영양실조와 질병 등으로 인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민간인과 군인의 인명 피해는 총 340만 명(사망자, 부상자, 실종자 포함)을 넘을 정도였다. 하지만 레닌그라드를 육지로부터 분단시킨 지형이었던 라도가 호는 역으로 레닌그라드를 기아와 고사의 위기에서 구한 생명의 길이 되었다. 핀란드의 지정학적ㆍ외교적 위치와 상황, 그리고 중부전선군 및 남부전선군이 관할했던 전역의 상황 등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1941년 레닌그라드가 포위되었을 때 레닌그라드에 머물렀던 대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의용 소방대원으로 활동하면서 교향곡을 한 편 작곡하였다. 전후 소련 당국은 이 작품에 '레닌그라드'라는 표제를 붙였고, 레닌그라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원래의 지명을 회복한 오늘날에도 이 교향곡은 여전히 레닌그라드라는 표제를 단 채 2차대전의 참상을 상징하는 음악 작품으로 세계 각지에서 공연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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