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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Sep 19. 2020

'사막의 여우'와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신화

롬멜 신화와 북아프리카 전역을 지리적으로 살펴보기

   2차대전에서 활약한 수많은 전쟁 영웅들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지명도가 높은 인물은 누구일까? 아마도 나치 독일군의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1944)일 것이다. 그는 특히 1941-42년 독일 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하여 연합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듭하여, 추축국과 연합국 양측으로부터 공히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2차대전 이후에도 롬멜은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 천재적인 군인인 동시에 올곧은 인품을 가진, 나치 독일군의 장성이었지만 정의감을 잃지 않았던 영웅처럼 묘사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2차대전 말기에 일어난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개입하였음을 근거로, 그를 군의 정치적 중립을 엄수했고 국가의 장래를 진심으로 걱정했던 '참 군인'처럼 다루는 매체들도 적지만은 않다. 심지어 롬멜의 리더십은 군사 교범이 아닌, 자기계발서 등의 대중서에까지도 빈번하게 인용될 정도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롬멜을 대중적으로 알려진 전설적인 명성과는 달리, 비판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연구 논문과 서적들의 집필 및 출간도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롬멜은 분명 유능한 지휘관이었고 수많은 군사적 업적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의 업적에는 과장되거나 윤색된 부분도 적지 않으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보여 준 그와 아프리카 군단의 신화적인 군사적 승리 역시 대국적인 견지에서는 한계점이 뚜렷하다고 한다. 그들은 롬멜의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이미지를, 실제 전과에 비해 과장되었다는 점에서 '롬멜 신화(Rommel myth)'라 부르기도 한다.

  이번 장에서는 롬멜과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신화로 잘 알려져 있는 나치 독일의 북아프리카 전선을, 지리학과 지정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2차대전기의 북아프리카 전선은 본래 이탈리아의 팽창주의에 따라 형성된 산물이었다. 2차대전의 개전과 더불어, '현대판 로마제국'의 실현을 프로파간다로 내세웠던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리비아를 거점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집트 침공을 감행했다. 나치 독일의 협조조차 구하지 않은, 무솔리니의 독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영국군 중동 전구 사령부(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 병력의 반격에 패퇴를 거듭했다. 심지어 1940년 겨울 이탈리아 제10군(병력 약 15만 명)은 이집트의 항구도시 시디바라니(Sidi Barrani)에서 리처드 오코너(Richard Nugent O'Connor, 1889-1981) 중장이 지휘하는 중동 전구 사령부 예하 서부사막군(Western Desert Force, 병력 약 3-4만)의 공격을 받아, 13만 명의 포로와 전차 400여 대, 화포 3천여 문을 넘겨준 채 트리폴리로 무질서하게 퇴각하고 말았다(나침반 작전(Operation Compass)). 이탈리아는 이집트를 정복하기는커녕, 식민지였던 리비아조차 영국군에게 빼앗길지 모르는 위기에 내몰린 셈이었다. 실제로 서부사막군은 시디바라니 전투 종료 후 진격을 멈추었는데, 이는 나치 독일의 그리스 침공으로 인해 처칠이 중동 전구 사령부와 서부사막군에 더 이상의 공세를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즉, 오코너와 서부사막군이 공세를 지속했더라면 이탈리아군은 참패하는 수준을 넘어 리비아마저 영국군에게 내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군이 보여준 이 같은 무기력한 모습과 거듭된 참패는 무솔리니 정권의 존속 여부조차 뒤흔들 수 있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로 비화했다. 궁지에 몰린 무솔리니는 결국 나치 독일에게 북아프리카 전선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탈리아가 삼국 동맹의 일원에서 이탈하거나 북아프리카가 완전히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나치 독일로서도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최악의 경우, 지중해를 사실상 상실할 수도 있었다. 에스파냐의 프랑코 파시스트 정부는 나치 독일 덕택에 정권을 잡을 수 있었지만, 장기간에 걸친 내전으로 인해 국력이 매우 약해져 있었을뿐더러, 영국 등과의 적대관계를 꺼려하여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때문에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탈리아라는 동맹국을 놓쳐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치 독일은 소련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형편이었지만, 이탈리아의 이탈과 지중해의 제해권 상실에 따른 손실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나치 독일은 1941년 군단 규모의 북아프리카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사령관은 에르빈 롬멜 중장이었다. 귀족이 아닌 교사 집안에서 태어난 롬멜은 초급장교 시절이던 1차대전 당시 소대 병력을 지휘하여 이탈리아군 여단 병력의 항복을 받아낸 기적적인 무공을 떨쳤던 인물로, 독일 제국 최고 등급의 훈장인 푸어 르 메리테(Pour le Merite) 훈장의 수훈자이기도 하였다. 1차대전 종전 후에도 군에 남았던 그는 저서 『롬멜 보병 전술』을 집필하여 군부는 물론, 특히 히틀러의 주목을 받았다. 독일 제국의 귀족 출신들로 구성된 군부의 고급 장교단을 견제할 수단을 절실하게 원했던 히틀러는, 귀족 출신도 아니고 독일군에서 장성 진급의 필수 코스에 해당했던 육군대학 출신도 아니며,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 탓에 인간관계가 다소 좁기는 했지만 군인으로서의 실력과 실적만큼은 확실했던 그를 특별히 중용했다. 이후 롬멜은 프랑스 침공전에서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 휘하 제7기갑사단장으로 참전하여, 신속한 기동을 통해 프랑스군을 대서양 방면으로 포위하는데 결정적인 전공을 세웠다. 보병뿐만 아니라 기갑부대의 지휘관으로서도 그 실력을 입증한 셈이었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데다 프랑스 전역에서 이미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했던 그를, 히틀러와 나치 독일군 수뇌부는 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할 적임자로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롬멜은 히틀러로부터, 아프리카 군단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추축군 전체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롬멜이 지휘하는 북아프리카의 추축군은 '아프리카 군단(Afrikakorps)'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롬멜은 아프리카 군단의 군단장이었지만, 실제로 지휘하는 병력의 규모는 규모는 야전군-집단군 수준이었다. 나치 독일군 중장이었던 롬멜이, 이탈리아군 원수 로돌포 그라치아니보다도 실질적으로는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된 셈이었다.

 이로서 전사 연구가는 물론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북아프리카 전역의 주요 전장과 장소

  1941년 2월 14일 트리폴리에 도착한 롬멜은, 임지에 부임한 즉시 대대적인 사열을 실시했다. 연전연패로 바닥에 떨어진 추축군의 사기를 고양하고, 적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였다. 3월이 되자 그는 영국군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하여, 같은 달 24일에는 영국군의 수중에 떨어진 리비아 영내의 요새 엘 아게일라(El Agehila)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아프리카 군단은 불과 14일 만에 리비아 동부의 카레니아카(Cyrenaica) 지방을 확보하고 솔룸(Solloum) 방면까지 진격하며 이탈리아군이 상실한 식민지 영토를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은 오코너 중장이 포로로 잡히는 등 중대한 손실을 입고 패퇴하였다. 이탈리아군은 웨이벌이 지휘하는 영국 서부사막군에게 연전연패했지만, 롬멜의 지휘를 받은 뒤에는 아프리카 군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군으로 거듭났다. 롬멜은 이탈리아군 병사와 부사관, 초급 장교들의 감투 정신과 전투력을 높게 평가했지만, 고급 장교들의 군사적 역량은 혹평했다.

  베를린의 나치 독일군 수뇌부는 롬멜에게 현상 유지를 명령하며 과도한 공세를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롬멜은 히틀러가 자신을 응원해 주리라는 확신 하에 상부의 명령에 반하는 독단적인 공세를 감행하였으며 실제로도 히틀러는 롬멜을 지지하였다. 솔룸까지 진출한 그는, 이어서 솔룸과 엘 아게일라 사이에 고립된 투브루크(Tubruq) 공략을  개시하였다. 롬멜은 비록 1941년 4월에 투브루크를 점령한다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간결 작전(Operation Brevity)과 배틀액스 작전(Operation Battleaxe)을 통해 고립된 투브루크를 구원하려던 영국군의 공세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1941년 6월 영국 중동 전구 사령부는 영국군의 후퇴를 명했고, 6월 하순에는 웨이벌 대장이 인도로 인도로 자리를 옮겼다. 처칠은 중동과 인도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고 노르웨이 전역에서도 공을 세운 바 있는 인물이었던 인도 주둔 영국군 사령관 클로드 오킨렉(Claude Auchinleck, 1884-1981) 대장을, 웨이벌 대신 롬멜을 상대한 중동 전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롬멜은 7월 대장으로 진급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작전 회의 중인 롬멜(가운데)(출처: http://military.wikia.org/rommel)

  영국은 중동 전구 사령관을 웨이벌에서 오킨렉으로 교체하는 한편으로, 기존의 병력을 제8군으로 재편성하는 등 투브루크 해방 및 롬멜과 아프리카 군단에 대한 역습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진행하였다. 1941년 11월 18일, 호주군, 뉴질랜드군, 남아프리카군 등 영연방 소속 병력의 증원을 받아 전력을 강화한 영국군 제8군은 리비아 국경을 넘어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십자군 작전(Operation Crusader)의 시작이었다. 롬멜은 선전했지만, 물자 부족과 손실의 누적-롬멜 휘하에는 70여 대의 전차밖에 남아있지 않았다-으로 인해 가잘라(Gazala), 나아가 엘 아게일라까지 후퇴해야 했다. 

  하지만 이듬해 1월 롬멜은 본국으로부터 일정 규모의 보급을 받은 뒤 역습을 감행했다. 작전 한계점을 넘어 와해 직전까지 갔던 아프리카 군단의 선전은 추축국, 연합국 모두를 놀라게 했다. 히틀러는 롬멜의 '기적과도 같은' 활약을, 모스크바 전투에서의 참패를 만회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롬멜은 1942년 1월 24일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였고, 아프리카 군단은 아프리카 기갑 군(Panzerarmee Afrika)으로 승격되었다. 롬멜은 공세를 이어가며 비르 하차임(Bir Hacheim)에서 가잘라(Gazala)를 잇는 영국군 방어선을 우회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아프리카 기갑군은 비르 하차임에서 자유 프랑스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지만, 결국 비르 하차임에 이어 6월 21일 투브루크 요새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제8군은 나치 독일 아프리카 기갑군의 공세로 인해 중대한 손실을 입었고, 오킨렉 대장은 결국 6월 17일 후퇴 명령을 내렸다.  '사막의 여우'라는 신화가 절정에 달한 순간이었다. 

  롬멜은 단순한 명장의 수준을 넘어, 국민적ㆍ민족적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롬멜을 '위대한 독일 민족'의 승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며 대대적인 선전을 하였다. 롬멜은 부하들로부터의 존경은 물론, 전 독일 국민의 우상처럼 떠올랐다. 그의 자택에는 각지에서 보내온 선물과 꽃다발이 쇄도했고, 수많은 독일 잡지들은 롬멜의 사진과 초상화로 표지를 장식했다. 심지어 윈스턴 처칠조차도 1942년 1월 말에 행한 연설에서, 그를 위대한 장군으로 치켜세울 정도였다. 1941년 2월 육군 중장 계급으로 북아프리카에 부임한 롬멜은, 그로부터 1년이 조금 넘은 1942년 6월에는 계급을 무려 3개나 뛰어넘으며 육군 원수로까지 진급하였다.


  투브루크를 점령한 롬멜과 독일 아프리카 기갑군, 그리고 이탈리아군은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6월 29일에는 영국군의 방어 거점이자 항만을 갖추었던, 투브루크에서 300여 km 떨어진 메르사마트루(Mersa Matruh)를 함락시켰다. 이 전투에서는 이탈리아군 정예 경보병 사단인 베르살리에리(Bersaglieri) 사단은 특히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베르살리에리 사단은 6천 명의 영국군 포로와 더불어, 1개 완편 사단 규모의 물자와 장비를 노획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심각한 전투력 손실과 물자 부족, 보급 부족에 시달리던 북아프리카의 추축국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추축군은 이어서 7월 1일, 투브루크로부터 동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교통의 요지 엘알라메인(El Alamein)의 서쪽 외곽 부근에 도달하였다. 알렉산드리아 서쪽 약 160km 지점까지 진격한 셈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를 잇는 요지 엘알라메인이 지척에 있으니, 카이로 함락, 나아가 추축국의 이집트 정복은 시간문제일 터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독일 국민들에게 존경을 넘은 숭배, 우상화의 대상으로까지 떠올랐던 롬멜이었지만, 아프리카 기갑군은 이미 누적된 손실로 인해 작전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쾌진격을 거듭하며 영국 제8군을 상대로 거둔 연승은 롬멜과 아프리카 기갑군을 신화적인 영웅으로 떠오르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지만, 그만큼 아프리카 기갑군, 그리고 이탈리아군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소모를 강요하였다. 게다가 리비아에서 엘알라메인에 이르는 보급선이 동서로 길게 늘어지면서, 보급 문제는 한층 악화되었다. 아프리카 기갑군과 이탈리아군은 연이은 공세로 인해 손실이 누적된 데다 휴식 및 병력과 물자 충원이 공세 및 진격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탓에, 1942년 6월 말 시점에는, 병력과 장비가 각각 편제 규모의 30%, 15% 수준으로까지 감소해 있었다. 일례로 이탈리아군의 정예 아리에테(Ariete) 기갑사단은 6월 말 전차 10대와 병력 1,500여 명 수준으로까지 약체화되어 있었다. 1개 기갑사단이 병력은 1개 연대 규모, 전차 보유 대수는 1개 전차 중대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까지 축소된 셈이었다. 무엇보다 가용 전차가 40여 대 수준으로까지 감소했다는 사실은 치명적이었다. 1개 기갑사단조차 완전히 무장시킬 수 없는 이 정도의 전차전력으로 본격적인 기갑전을 벌이기란 무리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작전 한계점에 봉착한 수준을 넘어, 와해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증원군과 물자 및 장비가 계속해서 북아프리카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부족함이 많았다. 증원군의 훈련도와 무장 수준은 생각 이상으로 뛰어났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하거나 북아프리카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보충된 장비 역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롬멜이 요구했던 수준을 밑돌았다. 심지어 장병들에 대한 식량 배급마저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게다가 롬멜의 무리한 공세에 따른 피로가 누적된 이탈리아군 장병들 사이에는 그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갔고, 이는 북아프리카 전역에 배치된 추축군의 전력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래도 롬멜 휘하에서는 용맹하게 싸웠던 이탈리아군이었지만, 롬멜과 이탈리아군 사이의 알력과 불화가 불거지면서 과거와 같은 이탈리아군 장병들의 용전분투를 기대하기도 그만큼 어려워졌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진 전투와 보급 문제의 난항 등에 따른 격무와 극심한 스트레스는 롬멜의 건강마저도 크게 악화시키고 말았다.  

  보다 지리적인 관점에서의 문제점은, 롬멜의 연승이 선(線) 형태로 이어지는 쾌진격을 가능하게 하기는 했지만 면(面)과 같은 공간, 지역의 장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롬멜은 북아프리카의 해안선을 따라 투브루크, 가잘라, 메르사마트루 등을 연이어 함락시켰지만, 해안선 남쪽의 광대한 영역까지 면 형태로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보급선에 중대한 문제가 일어남은 물론, 자칫하면 아프리카 기갑군과 이탈리아군의 배후마저 차단당할 소지가 있었다. 실제로 오킨렉은 메르사마트루를 빼앗긴 뒤 제8군 병력을 해안에서 남쪽으로 약 130km 정도 떨어진 카타라 저지대(Bab el Quattara) 저지대 일대에 배치했다. 카타라 저지대의 고도는 해수면보다 평균 60m 낮은 데다 북동쪽의 루웨이사트 능선(Ruweisat Ridge)이 천연 엄폐물을 제공했기 때문에, 롬멜의 공격을 방어하고 여차하면 롬멜의 배후를 공격하기에 적합한 위치였다. 때문에 롬멜은 1942년 7월 루웨이사트 능선을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롬멜과 아프리카 기갑군, 그리고 이탈리아군에 대한 위협을 증가시켰음은 물론, 병력과 물자의 소모까지 가중시켰다. 1942년 9월 6일 알람할파(Alam Halfa)에서 영국군이 추축군의 공격을 저지함으로써, 1년 반 가까이 이어져 온 롬멜의 공세는 중단되고 말았다.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의 군사지리적 상황 역시 롬멜과 아프리카 기갑군에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롬멜의 쾌진격이 궁극적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아프리카 기갑군, 그리고 이탈리아군의 손실과 패퇴를 앞당긴 측면도 있었다. 나치 독일이 발칸 반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지중해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중해 동부의 말타(Malta) 섬에서 이륙한 영국 공군 폭격기들은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보급 계획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했다. 사실 말타 섬은 나치 독일 남부 전구 총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Albert Kesselring, 1885-1960) 공군 원수에 의해 한 번 무력화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말타 섬의 기지를 재건하는 데 성공했고, 케셀링은 롬멜이 투브루크로부터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는 대신 말타부터 점령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히틀러는 케셀링이 아닌 롬멜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는 북아프리카 방면에 대한 보급이 더한층 악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와 반대로 영국 중동 전구 사령부는 연이은 전술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지속적으로 증강해 가고 있었다. 중동 전구 사령부에는 영국 본토는 물론 뉴질랜드, 호주, 인도, 남아프리카 등과 같은 영연방으로부터 온 병력과 장비, 물자가 계속해서 충원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41년 12월 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로 인해 온전히 연합군에 합류한 미국 역시 이듬해 여름에는 북아프리카에 대량의 장비와 물자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롬멜과 아프리카 기갑군의 화려한 연전연승의 신화와 달리, 그들은 지리적으로 고립되다시피 한 악조건에 처해 있었다. 이집트에서 추축군은 단지 북서부 해안을 선 형태로 지배했을 뿐이었고, 지중해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해역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적이, 연합군이 장악한 대서양을 건너 북아프리카에 손을 뻗치려 하고 있었다.


  1942년 10-11월에 걸친 제2차 엘알라메인 전투(이하 엘알라메인 전투)로 인해, 롬멜과 아프리카군의 '불패 신화'는 결국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오킨렉은 비록 가잘라 방어선과 엘알라메인을 롬멜에게 넘겨주었고 이로 인해 중동 전구 사령관 자리까지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1887-1976) 대장에게 넘겨주어야 했지만, 결코 무기력하거나 무능한 지휘관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기갑군을 비롯한 추축군에게 막심한 손실을 강요한 지휘관, 그리고 제8군의 전력을 보존하면서 질서 정연한 후퇴를 성공시킨 지휘관은 바로 오킨렉이었다. 게다가 오킨렉은 롬멜과의 전투에서 얻은 전훈을 분석하여, 신속하고 거침없는 기동전을 장기로 하는 롬멜의 부대를 제8군 지역으로 유인하여 고착시킨 뒤 투브루크와 메르사마트루 사이에 위치한 할파야 고개(Halfaya Pass) 방향에서 역습을 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후임자인 몽고메리는 오킨렉의 계획을 인계받은 뒤, 이를 한층 발전시킨 작전을 수립하였다. 그는 공군 및 포병 화력의 지원을 통해 추축군의 예봉을 꺾은 뒤, 아프리카 기갑군을 포위망 속으로 유인ㆍ섬멸하여 궁극적으로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군을 와해시킨다는 계획을 발전시켰다. 

  본국과 영연방은 물론 미국으로부터 충분한 인원과 물자, 장비를 지원받으며 전력을 증강하고 있던 영국군과 달리, 롬멜은 충분한 보급을 받기는커녕 본인부터가 작전 지휘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그는 1942년 9월 동부전선에서 전출 온 아프리카 기갑군 사령관 대행 게오르그 시투메(Georg Stumme, 1886-1942) 대장에게 업무를 인계한 뒤, 독일로 귀환하여 요양을 해야 했다. 

  롬멜이 아직 요양 중이던 1942년 10월 23일, 몽고메리는 압도적인 병력과 물량을 앞세워 엘알라메인 방면으로의 대공세를 단행했다. 제2차 엘알라메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미국제 신형 M4 셔먼(Sherman) 전차 300여 대를 비롯한 1,300여 대 이상의 전차를 보유했던 영국군과 달리, 아프리카 기갑군의 전차는 500여 대에 불과한 데다 연료마저 부족했다. 포병 및 항공전력 역시 영국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영국군은 제공권마저 장악했다. 설상가상으로 아프리카 기갑군 사령관 대리 시투메 대장마저 10월 24일 전사하고 말았다. 아프리카 기갑군과 이탈리아군은 불리한 전황 속에서도 선전했지만,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롬멜은 10월 25일 항공편으로 급히 북아프리카에 귀환해서, 병력을 수습ㆍ재편하고 엘알라메인 후방의 엘푸카(El Fuqa)에서 카타라 저지에 이르는 방어선 구축을 시도했다. 하지만 몽고메리는 11월 2일 수퍼차지(Supercharge) 작전을 발동하여,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 사막의 여우라 불린 롬멜이었지만, 전력을 충실히 증강해 가며 공세를 취해 오는 영국군을 막아 내기는 역부족이었다. 11월 4일에는 이탈리아군의 거의 모든 사단들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고, 심지어 아프리카 기갑군 예하 아프리카 군단장 빌헬름 리터 폰 토마(Wilhelm Josef Ritter von Thoma) 중장마저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결국 롬멜은 전선 유지를 포기하고, 리비아로 퇴각하고 말았다. 롬멜의 뛰어난 지휘하에, 그의 엄격한 교육훈련을 받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군 장병들은 질서 정연하게 퇴각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11-12만명 규모의 추축군 병력 가운데 약 3만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무엇보다 가용 전차와 화포가 각각 20-30대, 60-70문 정도로 격감한 정도의 장비 손실은 만회하기 어려웠다. 엘알라메인 전투의 패배 이후, 롬멜과 아프리카 야전군은 더 이상의 공세를 취할 수 없었다. 북아프리카, 나아가 지중해에서 추축국이 전쟁의 주도권을 상실한 순간이었다. 


  롬멜과 독일  아프리카 기갑군에게는 엘알라메인 전투에서의 패배보다도 더욱 거대한 장애물과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이었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과 더불어 히틀러가 무리하게 대미 선전포고를 한 탓에, 미국은 이미 나치 독일의 공식적인 적국으로 부상한 터였다. 스탈린은 특히 미국에 유럽 전선으로의 참전을 강하게 요구했고, 미국은 1942년 11월 유럽이 아닌 북아프리카에 지상군 병력을 파병하였다. 미군과 영국군이 11월 8일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로코, 알제리에 상륙작전을 실시함으로써, 횃불 작전(Operation Torch)이 개시되었다. 미군은 자유 프랑스군, 영국군과 함께 모로코에서 알제리로, 그리고 튀니지 방면으로 동진하였다. 이미 작전 한계점을 넘어버린 북아프리카의 추축군은 동쪽의 이집트 방면뿐만 아니라, 서쪽의 튀니지 방면으로부터 진격해 오는 연합군까지도 상대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에 빠졌다. 

  실전 경험이 부족했던 미군은, 1943년 2월 카세라 협곡(Kassera Pass)에서 2군단이 독일 아프리카 기갑군 병력에게 참패하는 등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실전 경험을 축적해 가며 강병으로 거듭났다. 카세라 협곡에서의 패전 이후 신임 2군단장으로 임명된 조지 패튼(George Smith Patton Jr., 1885-1945)은 엄정한 군 기강을 확립하는 동시에 휘하 장병들을 잘 다독이고 추슬러 미군을 실전에 능한 정예병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같은 해 여름 미군 제7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그는, 영국군과 합세하여 추축군에 대한 공세에 나서는 한편 지중해를 넘어 시칠리아 공략까지 계획하였다. 카세라 협곡 전투 이후 추축군은 아프리카 집단군(Heersgruppe Afrika)으로 재편하며 튀니지 전선에 대한 방어를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롬멜이 건강 악화로 1943년 독일로 귀국한 뒤 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은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Hans-Jürgen von Arnim, 1889-1962)은 1943년 5월, 튀니지 전선을 포기하고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서 북아프리카의 추축국 세력은 소멸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는 무솔리니의 실각, 그리고 이탈리아의 항복으로까지 이어졌다.


  롬멜의 전술적인 식견과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분명 탁월하였다. 롬멜은 초급 장교 시절부터 소대 병력을 지휘하여 여단급 적군을 포로로 잡는, 신화적인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전간기에 집필했던 『보병 전술』은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오늘날에도 군 장교들의 필독서로 애독될 정도이다. 아울러 프랑스 전역에서 7사단을 지휘하며 보여준 지휘관으로서의 역량과 군사적 업적 역시, 그가 뛰어난 군인이며 지휘관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롬멜은 독일 아프리카 군단 및 아프리카 기갑군의 지휘관으로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 주었다. 그는 졸전과 연패를 거듭하며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던 북아프리카의 추축군을 지휘하여, 불과 1-2개월 만에 실지(失地)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군을 궁지로 몰아넣고 심지어 오코너 중장까지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차를 마치 함대를 운용하듯 집중적으로 운용하는 한편  88mm 대공포를 대전차포로 전용(轉用)하여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영국군을 상대로 선전하고 연승을 거두었던 면모 또한, 롬멜이 기갑 전술에 대한 수준 높은 안목과 뛰어난 창의성을 가진 지휘관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베를린의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와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 원수는 여러 차례에 걸쳐 롬멜의 독단을 저지하려 했다. 애초에 북아프리카는 나치 독일 입장에는 전선 유지만 하면 되는 부차적인 전장이었지, 대규모의 병력과 물자를 쏟아 넣어야 할 주전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롬멜의 공세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독단이었다. 즉, 리비아 방면으로 진격하려던 영국군을 궁지에 영국군의 명장 오코너 중장까지 포로로 잡으며 엘알라메인까지 진격했던 그의 군사적 업적은, 전술적으로는 빛나는 성과였을지 몰라도 전략적인 차원에서는 자칫 나치 독일의 전력을 헛되이 분산시켜 버릴 소지가 있는 위험한 행동으로서의 성격도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거두었던 연승은 전술적으로는 분명한 승리였지만, 전략적ㆍ지정학적 견지에서는 한계도 뚜렷했다. 롬멜은 사실 북아프리카에서 전세를 뒤집을 확실한 전략적 거점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기보다는, 이탈리아군이 상실한 북아프리카 식민지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심지어 투브루크 탈환에도 1년에 가까운 시일이 걸렸으며, 그 와중에 영국군의 역습을 받아 패퇴한 적도 몇 번 있었다. 물론 롬멜은 기존의 이탈리아 식민지 영역을 넘어, 이집트의 엘알라메인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영국군이 패퇴를 거듭했고, 웨이벌에 이어 오킨렉까지도 경질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롬멜이 엘알라메인에 이어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까지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2차대전의 향방도 유의미하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왜냐 하면 이 두 도시의 함락은, 추축국이 지중해뿐만 아니라 인도양, 중앙아시아, 흑해 일대까지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ㆍ지정학적 요지였던 이집트를 지배하는 결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은 롬멜에게 패배를 거듭했을지었정, 이로 인해 작전 한계점에 봉착하거나 지휘체계가 와해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롬멜의 아프리카 기갑군이 엘알라메인에 도달한 시점부터 작전 한계점에 직면하기 시작하였다. 나치 독일은 이미 소련에서 막대한 인적ㆍ물적 자원을 소모하고 있는 형편이었고, 추축국이 지중해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현실 속에서 지중해를 통해 이루어졌던 북아프리카로의 보급 역시 적지 않은 차질을 빚었다. 아프리카군의 쾌진격에 따라 길어진 보급선 역시, 작전 지속능력을 저하시키고 궁극적으로 작전 한계점을 앞당긴 측면이 있다. 롬멜과 아프리카 기갑군의 활약은 전설, 신화가 될 정도로 화려했지만, 그 화려함에 비해 전략적ㆍ지정학적 소득은 적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롬멜과 아프리카 기갑군이 전선 유지 수준을 넘어 북아프리카 전선을 계속해서 확대함으로써, 전략적 부담이 한층 가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오킨렉, 그리고 몽고메리가 엘알라메인에서의 반격을 성공적으로 계획 및 실천할 수 있었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양측의 이 같은 보급 수준의 현격한 차이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참전에 따른 북아프리카의 전략적ㆍ지정학적ㆍ군사지리학적 상황 변화는, 아프리카 기갑군의 몰락에 기름을 부었다. 이집트의 영국군과 전쟁을 지속하는데도 한계에 봉착했던 추축군에게, 튀니지 방면의 미국은 문자 그대로 파멸적인 재앙이었다. 횃불 작전은 북아프리카의 추축군에게 양면 전선을 강요했고, 이미 작전 한계점을 넘어 버렸던 추축군은 결국 항복이라는 선택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북아프리카를 잃은 추축국은, 결국 지중해와 이탈리아 역시 포기해야만 했다.


  사실 독일 아프리카 군단과 '사막의 여우 롬멜'의 신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였다. 애초부터 롬멜을 총애했고 롬멜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히틀러는,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보여 준 가시적인 성과에 주목하며 군 수뇌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의 공세를 이어갈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롬멜의 연승 신화는 히틀러의 정권 유지와 영향력 확대에 중요한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벨스 역시 같은 맥락에서 롬멜을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이 거둔 군사적 성과를 나치 독일의 프로파간다로 유용하게 활용-선전 목적으로 윤색하기도 하였음-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연합군 측에서도 북아프리카에서의 패배로 인한 군민의 사기 저하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롬멜의 군사적 재능과 업적을 과장해서 평가하기도 하였다. 연합국 역시 북아프리카에서의 연패에 따른 사기 저하를 막기 위해, 롬멜을 마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명장으로 치켜세웠다. 롬멜 같은 희대의 영웅에게 고전하는 것은 연합군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며, 롬멜을 꺾는다면 다른 나치 독일군들을 격파하는 일 역시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신념을 형성 및 확산하기 위한 일종의 프로파간다였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롬멜 신화'는 롬멜이 가졌던 명장으로서의 이미지, 그리고 나치 독일군 내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인종 청소, 전쟁 범죄 등과 무관했던 그의 사생활 등의 영향을 받아 전후에도 그가 패장이나 독재 국가의 군인이 아닌 전설적인 명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만들었다. 2차대전이 끝난 지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1951년에 미국 20세기 폭스사에서 『사막의 여우 롬멜(The Desert Fox: The Story of Rommel)』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세계적인 흥행몰이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롬멜의 뛰어난 전술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술적 연승은 전략적 승리로 이어지지 못했다. 전설로까지 미화되는 그의 전술적 업적은, 사실 이탈리아가 상실했던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회복한 결과를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무엇보다 북아프리카는 나치 독일로서는 어디까지나 유지만 하면 되는 부차적인 전장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롬멜이 수뇌부의 명령까지 무시하고 공세를 지속한 데다 히틀러, 그리고 괴벨스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를 방조 및 장려하면서, 소련에 집중되었어야 할 군사적 역량과 자원이 북아프리카로 분산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물론 롬멜이 이집트를 완전히 정복한 뒤 인도양이나 흑해, 카프카스 지역으로 진출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롬멜이 보유했던 전력은 그 같은 광대한 원정이나 정복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게다가 지중해의 제해권과 제공권, 그리고 미국의 참전(횃불 작전)은 가뜩이나 작전 한계점을 넘겨버린 아프리카 기갑군의 숨통을 끊어 놓고 말았다.

  많은 학자들은 사막의 여우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본 군사적 행보를, 전술적으로는 신화에 가까운 연승을 거두었지만 전략적으로는 오히려 패착을 가져온 행보로 비판하기도 한다. 이는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그리고 미국이 가졌던 지정학적ㆍ군사지리적 위치 및 의미와도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추축국의 북아프리카 상실은, 지중해와 이탈리아의 상실로 이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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