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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Sep 29. 2020

전설적인 세바스토폴: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지리학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의미를 지리적으로 살펴보기

  2014년 러시아 영토로 병합된 크림 반도는, 흑해의 제해권 장악을 위한 전략적ㆍ지정학적 요지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수많은 분쟁과 전쟁의 배경이었다. 일례로 크림 전쟁은 흑해로 진출하려는 제정 러시아와 이를 막기 위한 오스만 제국 및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등의 연합군 간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푸틴 정부의 크림 반도 병합 역시 이 같은 지정학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크림 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은, 이 같은 크림 반도를 둘러싼 분쟁과 전쟁의 핵심적인 목표가 되어 왔다. 크림 반도의 양항인 이 도시는 이로 인해 흑해의 해상권 및 제해권 확보에 필수 불가결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세바스토폴은 애초에 제정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Екатерина  II, 1729-1796, 재위 1762-1796) 재위 기간에 흑해의 제해권 확보를 위해 건설된 항구도시였다. 그리고 실제로 제정 러시아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는 소련과 러시아의 흑해 함대 본부가 위치하는 모항으로 사용되어 왔다. 때문에 크림 전쟁, 러시아 혁명전쟁 등에서 세바스토폴은 중요한 전장이 되었다.

크림반도 남서부의 항구도시이자 군항도시인 세바스토폴은, 흑해 해상권의 요지이다.(구글 지도)

  2차대전 중 세바스토폴은 1941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10개월에 걸쳐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았다. 세바스토폴의 소련 군민들은 숫적으로 우세한 나치 독일군의 포위 속에서 용전 분투했지만,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이번 장에서는 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지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와 더불어, 나치 독일군 남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키예프에서 소련군 60만여 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둔 남부집단군은, 전과를 확대하며 동쪽으로 진군을 계속하여 동년 10월 17일에는 우크라이나 최동단 돈바스(Донба́сс) 지방의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보다 하루 전인 10월 16일에는 남부집단군의 지원을 받은 루마니아군이 크림 반도 북서쪽에 인접한 항만도시 오데사(Одесса)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크림 반도의 대부분이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세바스토폴은 여전히  나치 독일군의 공세를 버텨내고 있었다. 나치 독일군은 루마니아군과 더불어 1941년 7월부터 세바스토폴에 공세를 개시했지만, 세바스토폴은 항전을 계속했다. 세바스토폴 세바스토폴은 흑해의 제해권 확보에 필수적인 전략적 지정학적 요충지로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흑해 함대의 본거지였던데다, 크림 전쟁 당시 연합군의 포위로 인해 과의 전투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전력이 있었다. 이로 인해 세바스토폴은 이미 견고한 요새가 구축되어 있었고, 도시를 지키기 위한 군사적 대비도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정 러시아와 소련은 1910-30년대에 세바스토폴에 두께 4m 이상의 콘크리트 장벽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였으며, 요새에는 305mm 거포를 비롯한 대구경 화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더욱이 소련군은 1940년-1941년 여름에 걸쳐 나치 독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세바스토폴 방어를 위한 준비를 마련해 두었다. 소련 해군 사령관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Николай Герасимович Кузнецов, 1904-1974) 원수는, 장차전에 대비하여 특히 세바스토폴의 방공망과 상륙 거부 수단을 강화시켰다. 1939년 흑해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소련 해군 중장 필리프 세르게예비치 옥탸브르스키(Филипп Серге́евич Октябрьский, 1899-1969) 제독은, 스탈린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루마니아와 나치 독일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게끔 함대 전력을 충실히 증강시켜 놓았다. 그리고 세바스토폴의 요새화 임무 책임자였던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모르구노프(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Моргуно́в, 1902-1985) 소장은, 상기한 요새의 해안포 포대를 증강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바스토폴 시내를 삼중으로 아우르는 방어선까지 구축해 두었다. 세바스토폴 요새로부터 각각 15-17km, 8-12km, 3-6km 이격된 지점에 구축된 이 삼중 방어선은 깊이만 300-600m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각각 100개 이상의 벙커와 8-40km에 달하는 철조망, 1.7-31.5km에 달하는 대전차 참호, 9천 개가 넘는 대전차 지뢰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1941년 나치 독일군의 세바스토폴 공격이 시작된 뒤에도, 요새 강화 작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게다가 크림 반도와 세바스토폴의 위치적ㆍ지형적 특성은, 세바스토폴이 나치 독일군의 공세를 견뎌내는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세바스토폴은 항만도시이자 군항이었기 때문에, 레닌그라드와 달리 흑해를 통한 물자 보급은 물론 흑해 함대 소속 함정들로부터의 화력 지원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크림 반도는 반도 지형이기는 하지만, 육지와 연결되는 부분은 반도 서북족에 위치한 폭 8km의 페레코프(Перекоп) 지협뿐이다. 오늘날에야 페레코프 지협 외에도 연륙교가 건설되어 있지만, 세바스토폴 공방전 당시에는 크림 반도로 통할 수 있는 육상 교통로는 페레코프 지협 외에는 없었다. 게다가 지협 남쪽에는 다수의 호소들이 분포해 있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세바스토폴 공략을 위한 나치 독일군의 병력과 물자, 장비의 이동 및 보급은 결코 원활한 일이 아니었다. 반면 오데사 등지로부터 패전한 소련군은 병력과 장비를 세바스토폴로 온전히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흑해의 또 다른 지정학적ㆍ전략적 요지 오데사를 비롯한 크림반도 대부분을 상실한 소련군이었지만, 세바스토폴의 방어 태세는 더욱 견고해져 갔다.

페레코프 지협(지도상에 표기된 부분)은 폭 약 8km에 불과하며, 이외에는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본토의 연결부가 없다. 연륙교는 2차대전 이후에 건설되었다.(구글지도)

  뿐만 아니라, 세바스토폴이 지정학적ㆍ군사적 요지라고는 했지만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남부집단군 전력 대다수를 이곳에만 투입할 수도 없었다. 1941년의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남부집단군은 키예프 동쪽의 하리코프(Харьков)와 로스토프(Ростов) 방면으로 진격했고, 이듬해의 청색 작전(Fall Blau, 1942년 6월 28일-1943년 3월 14일)에서 주공을 맡은 남부집단군(이후 B집단군으로 개칭)과 신설 A집단군의 목표는 교통의 요지이자 천연자원이 풍부했던 캅카스 지역의 확보였다. 이들 지역들은 세바스토폴과 크림반도에서 북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세바스토폴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세바스토폴은 견고한 요새이자 흑해 함대의 본거지였던 만큼 공군은 물론 해군 함정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으므로, 남부집단군의 측방이나 후방에 적지 않은 위협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세바스토폴의 공군 기지는 나치 독일의 중요한 전략 물자 생산 기지였던 루마니아의 유전 지대를 폭격할 수 있는 심각한 전략적 위협이었다. 따라서 10월 남부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드슈테트 원수는, 예하 제11군(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대장)에게 세바스토폴 방면을 견제 및 포위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폰 만슈타인은 사실 세바스토폴 견제 및 포위와 더불어, 페레코프 지협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흑해 북동단의 항만도시 아조프(Азов) 방면으로 진격하라는 이중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이 두 목표를 동시에 공략할 경우 자신의 야전군이 분단될 우려가 큰 데다, 상기한 이유로 인해 세바스토폴 점령이 우선순위라고 판단하여 우선 세바스토폴 포위 및 함락에 역점을 두었다.


  1941년 10월 후반부터, 크림 반도 일대에는 폭우가 계속해서 내렸다. 이로 인해 나치 독일군은 한동안 세바스토폴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 없었다. 폰 만슈타인의 11군은 세바스토폴에 지속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세바스토폴 요새에 중대한 피해를 입히지 못한 채 병력과 장비의 소모만 누적시켰다. 그동안 소련군은 세바스토폴 구원을 위한 준비를 진척시켜 갔다. 오데사로부터 퇴각하여 10월에 세바스토폴에 도착한 해안군(Приморская армия, 사령관 이반 예피모비치 페트로프(Иван Ефимович Петров, 1896-1958) 대장)은, 11군의 공세가 둔화되는 틈을 타서 전력을 재편하는 데 성공했다. 페트로프는 세바스토폴의 확보는 곧 흑해의 제해권 확보이며, 세바스토폴이 함락된다면 나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이 흑해 북동부 해안에 상륙하여 캅카스 일대까지 진격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세바스토폴 사수를 결의했다. 그는 세바스토폴만 사수할 수 있다면, 소련이 크림 반도, 나아가 흑해 일대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흑해 함대 휘하 해군육전대 병력도 육군 병력과 더불어 세바스토폴 방어에 일익을 맡았다. 세바스토폴 시민들도 민병대를 조직하거나 군에 입대하여 세바스토폴 방어에 동참했다. 1941년 11월, 페트로프는 해안군 예하 7개 사단과 2개 해군육전대 여단을 비롯한 약 10만 명 규모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나치 독일군 제11군에 비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규모였다. 페트로프는 모르구노프가 구축한 방어선을 보수 및 강화하여, 제11군의 공세에 대한 대비에 만전을 기울였다. 옥탸브르스키 역시 페트로프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는 스탈린에게 세바스토폴의 사수는 나치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진 크림 반도의 견제 및 수복, 나아가 흑해의 제해권 확보에 필수적이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어 세바스토폴 방어전에 대한 지원을 촉구했다.

  북부해안군과 해군육전대 병력이 세바스토폴 방어선을 사수하며 11군의 공세를 견제 및 방어하는 동시에, 흑해 함대 소속 함정들은 지상군 병력을 지원하는 한편 크림 반도 동안의 케르치 반도 일대를 견제하며 후일 소련군에 의해 실시될 상륙작전을 위한 준비 작업을 진척시켜 갔다. 세바스토폴은 견고하게 요새화된데다 동부에는 산악 지형까지 분포하고 있어, 제11군 병력은 공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바스토폴 공략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와중에 나치 독일 공군은 소련군의 병원선 아르메니아 호를 격침시켜, 이 배에 승선하고 있던 약 5천 명의 부상병과 민간인들 가운데 8명을 제외한 전원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1월 12일에는 흑해 함대 소속 순양함 체르노바 우크라이나(Червона Україна) 호가 나치 독일의 공습을 받아 격침당했지만, 소련군은 이 배의 주포를 회수하는 데 성공하여 요새포로 전용하기도 하였다. 나치 독일 기갑군의 건설과 전격전 교리의 개발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낫질 작전의 입안을 주도하여 프랑스를 40여 일 만에 함락시킨 명장 폰 만슈타인이었지만, 세바스토폴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그의 공세를 잘 견디며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1941년 12월 30일, 흑해 함대의 지원 하에 자캅카스 전선군 예하  소련군 제44군과 제51군이 크림 반도 동쪽의 케르치 반도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세바스토폴을 구원하고 나아가 크림 반도를 수복하려는 시도였다. 대규모의 소련 상륙군은 케르치 반도 남서단의 페오도시야를 점령하는 등, 소련군의 상륙작전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폰 만슈타인은 1월 중순부터 페오도시야 탈환, 나아가 케르치 반도의 소련군 격퇴를 위한 역습을 개시했다. 세바스토폴의 선전과 제11군의 고전 탓에 적을 과소평가한 소련군은, 제11군 휘하 3개 사단의 공세에 페오도시야를 내주고 말았다. 이는 상륙작전과 보급 문제에 대한 충분한 준비 없이 대규모 병력을 앞세웠던 제44군과 제51군 병력의 사기와 전투 지속능력을 크게 떨어뜨리고 말았다. 폰 만슈타인은 예하 병력 일부에게 세바스토폴 요새의 견제 임무를 맡긴 다음, 케르치 수복을 위한 공세에 나섰다. 케르치 반도에 상륙한 소련군의 병력 규모는 20만 명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지만, 케르치 해협을 통한 보급과 수송에 대한 준비를 충실히 하지 못한 데다 적을 과소평가했다. 이들은 폰 만슈타인의 공세에 대한 첩보나 분석을 게을리한 채,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세바스토폴의 소련군과 합세하여 제11군을 섬멸한다는 당초의 계획을 고수할 뿐이었다. 반면 페오도시야 탈환후 상급대장으로 승진한 폰 만슈타인은 케르치 반도의 소련군을 견제하면서, 기갑부대가 효과적으로 기동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질 5월에 대규모 공세를 펼친다는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웠다.

  1942년 5월, 폰 만슈타인은 소련군 점령 지역을 돌파하여 적 부대들을 각개격파하고 케르치 반도를 탈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느시 사냥 작전(Trappen-Jagd)을 개시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적군을 과소평가한 채 역습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했던 케르치 반도의 소련군 부대들은, 제11군의 돌파와 절단, 각개격파에 휘말려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와해되고 말았다. 5월 19일 느시 사냥 작전이 종료되었을 때, 폰 만슈타인은 무려 17만 명의 포로와 1,133문의 화포, 258대의 전차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나치 독일군의 인명 피해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 대승을 거둔 폰 만슈타인은 원수로 승진했고, 케르치 반도를 상실한 자캅카스 전선군의 주요 지휘관과 참모들은 처벌을 받았다. 이 와중에도 세바스토폴은 여전히 함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어 태세 강화를 위한 시간을 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케르치 반도의 자캅카스 전선군 병력이 붕괴되면서, 세바스토폴의 고립은 더욱 심각해져 갔다. 강력한 요새에서 방어할 수야 있었지만, 세바스토폴을 포위한 나치 독일군을 격파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 셈이었다. 반면 폰 만슈타인은 크림 반도 동쪽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제거하고, 세바스토폴 공략에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자캅카스 전선군의 케르치 반도 상륙은 세바스토폴 해방을 위한 소련군의 승부수였다. 그만큼 인적, 물적 지원은 세바스토폴이 아닌, 크림 전선의 소련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캅카스 전선군의 붕괴는, 지원군의 붕괴뿐만 아니라 세바스토폴에 대한 지원 체계의 마비까지 의미했다. 페트로프와 옥탸브르스키가 휘하 장병들과 세바스토폴 시민들을 잘 지휘하여 제11군의 공세에 대한 방어 계획을  충실하게 진척시켜 나갔다고는 했지만, 이미 자캅카스 전선군이 붕괴한 이상 이들의 노력만으로는 세바스토폴 사수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한편 자캅카스 전선군을 상대로 놀라운 수준의 전과를 이룩한 폰 만슈타인이었지만, 세바스토폴 요새 공략은 여전히 무리수가 컸다. 강력한 요새에 대한 정면 공격은 아군에게도 막심한 손실을 강요할 터였다. 더욱이 흑해와 흑해 함대의 존재로 인해, 레닌그라드처럼 세바스토폴을 완전히 포위하여 아사를 강요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캅카스 일대를 목표로 한 청색 작전의 개시를 앞두고 세바스토폴의 함락은 나치 독일에게 더욱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다. 세바스토폴을 함락시켜야만, 청색 작전이 원활하게 진척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폰 만슈타인은 막대한 화력의 집중을 통해서, 세바스토폴 요새를 파괴한다는 결심을 내렸다. 제11군이 보유했던 야포가 아닌, 구경 수백mm의 중포(重砲) 화력을 집중한다는 구상이었다. 이에 따라 구경이 무려 800mm에 달하는 구스타프 열차포(Schverer Gustav)를 비롯한 수십-수백 문의 중포들이, 폰 만슈타인의 요청에 의해 세바스토폴 전선으로 집결했다.

  1942년 6월 2일, 나치 독일 공군의 폭격기들이 세바스토폴 요새에 폭격을 개시하였고, 이와 더불어 중포들도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이어서 제11군 예하 병력들과 루마니아군 병력들이 세바스토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1개월 남짓한 이 기간에 나치 독일 공군은 2만 3천 회 이상의 출격을 통하여 무려 2만 t 이상의 폭탄을 세바스토폴에 투하했다. 소련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막대한 양의 포탄과 폭탄이 세바스토폴 요새의 방어선들을 파괴하였지만, 전투는 7월 초까지 지속되었다. 소련군의 저항 역시 상상 이상으로 격렬했기 때문이었다. 파괴된 요새로 돌격해 오는 나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을 상대로, 소련군은 처절한 시가전을 벌이며 저항했다. 불리한 전황 속에서 소련군은 육군과 해군육전대 장병뿐만 아니라, 함정에 탑승해야 할 수병들까지 시가전에 참여하여 나치 독일군과의 전투를 이어 갔다. 1950년대에 발표된 세바스토폴 공방전 추모곡인 '전설적인 세바스토폴(Легендарный Севастополь)'은, 세바스토폴에서 벌어졌던 처절한 전투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전쟁의 나날이 오자 흑해 함대의 수병들은, 검은색 수병 외투를 벗은 채 수류탄을 들고 적 전차로 돌진했지. 너의 아들들이 죽음으로 나아갔다네. 적들에게 난공불락의 요새인, 전설적인 세바스토폴. 세바스토폴,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수병의 긍지라네!
구소련 화가 알렉산드르 데이네카(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ейнека, 1899-1868)의 회화 '세바스토폴 방어전'(https://muzei-mira)

  수병들까지 시가전에 투입되어 나치 독일 전차를 상대로 육탄 공격까지 벌일 만큼 소련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자캅카스 전선군이 와해된 데다 요새까지도 파괴된 상황에서 공군과 중포 화력의 강력한 지원 아래 돌격해 오는 제11군의 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11군과 루마니아군은 소련군의 저항에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세바스토폴의 각 지역들을 점령해 나갔다. 결국 스탈린은 세바스토폴 방어군의 후퇴를 승인했다. 페트로프와 옥탸브르스키를 비롯한 소련군의 요인들은 항공기, 잠수함 등의 수단을 통해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소련군 장병들과 민간인들은 탈출하지 못했다. 2만 명 이상의 소련 육해군이 1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전사했고, 9만 명 이상의 소련군 장병들은 포로가 되었다. 세바스토폴 공방전 기간(1941년 10월 30일-1942년 7월 4일) 동안 소련군은 육해군 총합 2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1940년 7월 1일 나치 독일군은 세바스토폴을 사실상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7월 4일에는 소련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완전히 소멸했다. 흑해 함대는 전멸은 면했지만 함선과 병력의 손실이 심각했고, 모항까지도 잃어버린 탓에 전력이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흑해 함대 입장에서 한 가지 다행스러운 부분은, 나치 독일의 해군 전력이 빈약했던 탓에 페트렌코 등이 우려했던 흑해를 통한 나치 독일의 캅카스 상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흑해 함대 역시 나치 독일 해군과의 전투에서 더 심각한 손실을 입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 역시, 1942년 6월에 벌어진 전투에서 3만 2천 명 이상 병력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케르치 반도에서의 대승에 이어 세바스토폴 요새까지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 제11군이었지만, 이로 인해 사실상 전투불능 상태에 빠질 정도의 손실을 입은 탓에 청색 작전에 곧바로 합류하지 못하고 상당 기간 동안 전력 회복을 해야만 했다.


  2차대전 중 세바스토폴은 결국 나치 독일에게 함락되어, 1944년 5월 9일까지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놓여야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세바스토폴 공방전은 승리가 아닌 패배인 셈이었다. 2차대전 개전 직전 10만 명이 넘었던 세바스토폴의 인구는, 1944년 5월 소련군이 수복했을 때 1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까지 격감해 있었다.

  하지만 세바스토폴은 크림 반도의 대부분이 나치 독일의 수중에 떨어진 뒤에도, 무려 8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저항을 계속했다. 2차대전 초반에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의 공격에 지리멸렬하며 키예프 등지에서는 무려 60만 명이 넘는 집단군 병력이 증발하는 참패를 이어갈 정도였지만, 세바스토폴의 소련군은 육ㆍ해군의 긴밀한 공조 하에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선전을 이어 갔다. 때문에 전후 소련은 세바스토폴을 패전의 장소가 아닌, 소련을 패망의 위기로까지 몰고 갔던 나치 독일의 침공 속에서도 영웅적인 저항을 이어갔던 자랑스러운 장소, 애국심을 상징하는 장소로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2차대전 종전 후 세바스토폴은 소련 정부에 의해 영웅 도시로 지정되었고, 시내에는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 희생된 소련 군민들의 애국심과 희생, 분전을 기념 및 추모하는 조형물과 시설들이 다수 세워졌다. 앞서 언급한 '전설적인 세바스토폴'과 같은 노래 역시 이 같은 맥락 속에서 발표된 것이다.

세바스토폴에 세워진 2차대전 전몰 장병 위령 조형물(출처: 위키피디아)

  1954년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가 의해 크림 반도의 영유권을 우크라이나 공화국으로 넘기면서, 소련의 영웅 도시 세바스토폴 역시 우크리아나에 속한 도시가 되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엄연히 소련의 구성국이었기 때문에, 흐루쇼프의 이 같은 조치가 심각한 영토문제를 야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세바스토폴은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소련 흑해 함대의 모항 기능을 문제없이 수행하였다.

  소련의 해체 이후, 크림 반도와 세바스토폴은 또 다른 영토 문제의 진원지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소련이 건재할 때에야 우크라이나, 러시아 모두 소련의 구성국이었지만,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 두 공화국이 별개의 국가로 독립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로부터 세바스토폴 군항을 임차하는 방식으로 유지해 왔지만, 2014년 푸틴의 크림 반도 병합에 의해 세바스토폴 역시 러시아 영토로 귀속되어 버렸다.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설적인 세바스토폴'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동명의 노래를 세바스토폴 시가(市歌)로까지 제정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이었지만, 크림 반도 병합이라는 영토 문제, 국제 정치 문제로 인해 세바스토폴은 또 다른 지정학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크림 반도 병합 이후, 푸틴 정부는 전승기념일을 비롯한 주요 행사에서 '전설적인 세바스토폴'을 적극적으로 연주하고 있다. 이 노래를 통해서 크림 반도 병합의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시도이다. 때문에 한때 우크라이나인들도 자랑스럽게 듣고 부르던 이 노래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는 많은 논란을 빚으며 심지어 금기시되기까지 하고 있다. 흑해의 지정학적 요지이자 2차대전의 격전지이기도 했던 세바스토폴이, 향후 국제 정치의 무대 위에서 어떠한 지정학적 의미를 던질지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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