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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Oct 21. 2020

무너진 쿠르스크의 성채

쿠르스크 전투를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기

  1943년 2월 2일에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치 독일 제6군이 항복하면서, 청색 작전이 사실상 실패함은 물론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군의 기세 역시 크게 꺾이고 말았다. 그리고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나치 독일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특히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나자마자, 스탈린그라드에서 북서쪽으로 500-600km 떨어진 하르코프, 쿠르스크 수복을 목표로 하는 별 작전(Операция Звезда)을 감행하였다. 이 작전에는 기존의 돈 전선군을 재편성한 중부전선군, 남서전선군, 그리고 신편 보로네시 전선군(Воронежский Фронт)(사령관 필립 이바노비치 골리코프(Фили́пп Ива́нович Го́ликов), 1900-1980) 대장)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에 도취된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의 전력에 대한 냉철한 분석 없이 무리한 작전을 강요하였다. 예컨대 로코솝스키에게는 부대 재편성에 6일, 공세 준비에 5일의 시간만이 주어졌을 뿐이었고, 그는 무리한 작전 계획에 난색을 표명했지만 상부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보급 문제, 부족한 교통 인프라 등 각종 어려움 끝에 본격적인 공세는 예정보다 늦은 2월 중-하순에야 제대로 시작될 수 있었지만, 소련군은 일시 하르코프를 점령하고 쿠르스크 북쪽의 오룔(Орёл) 인근까지 진격하는 등 일시적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새롭게 재편된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하르코프를 공세종말점에 직면한 소련군을 유인ㆍ고착한 뒤  섬멸하기 위한 함정으로 삼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비록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나치 독일군의 저력은 여전히 건재했고, 나치 독일 공군 역시 아직 제공권을 잃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하르코프 방면으로 무장친위대 군단을 증원하기까지 하였다. 오룔 방면의 소련 중부전선군은 공세를 유지했지만, 남쪽의 하르코프에서는 폰 만슈타인의 유인 작전에 휘말린 남서전선군의 선봉을 맡았던 포포프 기동집단(사령관 마르키안 미하일로비치 포포프(Маркиан Михайлович Попов, 1902-1969) 중장) 뿐만 아니라 소련군 제25전차군단, 제3전차군 등이 괴멸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3월 14일에는 점령했던 하르코프를 나치 독일군에게 다시 내주어야 했다(제3차 하르코프 전투). 이로 인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여세를 몰아 나치 독일 중부집단군을 포위 섬멸하고 우크라이나 중부를 남북으로 관통해 흐르는 드네프르 강까지 진출한다는 소련군 수뇌부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3차 하르코프 전투의 상황도(적색: 나치 독일군, 청색: 소련군)(출처: 위키미디아)

  제3차 하르코프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참패 후에도 나치 독일군의 전투력과 저력이 여전히 무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전투의 결과로 인해 소련군이 오룔과 하르코프 사이로 거대한 돌출부를 이루는 독특한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 돌출부의 중심에는 별 작전의 목표이기도 했던 쿠르스크가 위치했기 때문에, 쿠르스크 돌출부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쿠르스크 돌출부는 자연히 나치 독일군과 소련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 청색 작전과 이어진 일련의 전투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고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해빙기로 인해 동부전선 일대의 토양이 거대한 진흙탕으로 변하면서(라스푸치나) 전투에 부적합한 환경이 조성되기까지 했기 때문에 1943년 봄의 동부전선에는 일시적인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1943년에 접어들어 나치 독일군의 전황은 비관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우선 2년 이상 이어진 소련과의 소모전은, 나치 독일의 인적ㆍ물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켰고 이는 전쟁 수행 능력의 약화로 이어졌다. 바르바로사 작전과 청색 작전에서 나치 독일군은 눈부신 승리를 이어갔지만 이 두 작전은 공히 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전술적 승리에 소모된 자원을 보충하지 못하면서 승리를 거듭한 나치 독일군의 전력은 역설적으로 약해져 갔다. 1942년 11월 횃불 작전을 통해 미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결과, 나치 독일은 1943년에는 북아프리카를 상실하고 말았다. 게다가 나치 독일이 레벤스라움 확보를 목적으로 소련의 점령지 주민들에게 극히 비인간적인 처사를 자행하자, 소련의 점령지 주민들은 파르티잔을 결성하여 후방에서 나치 독일군을 괴롭혔다. 나치 독일군, 특히 무장친위대는 파르티잔 및 이들에게 협력하는 민간인들을 색출하여 공개처형하고 근거지가 된 마을을 불사르는 등 잔혹하게 보복했지만, 이는 민간인과 파르티잔의 반발심과 적개심만 고취하면서 나치 독일군의 전력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했다.

  반면 소련군은 미국과 영국의 지속적인 보급을 받으며 전력을 착착 증강해 가고 있었다. 나치 독일과의 2년여에 걸친 전쟁은 천만 명이 넘는 소련 군민의 희생을 야기했지만 소련은 이 큰 손실을 보충할 여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독-소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대숙청의 여파로 질적 수준이 크게 떨어졌던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과의 실전 경험을 축적하면서 정예군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전쟁 발발 전 스탈린의 독재에 신음하던 소련인들이었지만, 슬라브계 소련인들을 절멸 대상으로만 여기는 나치 독일군의 침략에 직면하자 그들은 소련군에 자진 입대하여, 또는 파르티잔이 되어 나치 독일군에게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게다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시 지도자로서의 자질 또한 차별화되었다. 전선에서의 일희일비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지휘관, 참모들의 판단을 묵살하고 군사적으로 무의미하고 부적절한 명령을 남발하여 나치 독일군의 전략에 차질을 초래하던 히틀러와 달리, 스탈린은 2차대전 기간 동안 소련인들의 동요를 막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전 초기를 제외하면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등과 같은 군사적 재능이 탁월한 장군들을 기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충분한 권한을 일임했다.


  나치 독일군 수뇌부는 이 같은 불리한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는 인적ㆍ물적 자원과 거세지는 연합군의 공세, 그리고 좁아져 가는 전략적, 지정학적 입지 속에서, 이들에게는 소련군에게 결정적인 역습을 가하여 조속히 전황을 뒤집을 카드를 마련할 필요가 절실했다. 이 와중에 오룔과 벨고로드 사이에 형성된 남북 약 250km, 동서 약 120km 규모의 서쪽 방향으로 돌출한 형상을 한 거대한 돌출부는 나치 독일군 수뇌부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오룔과 벨고로드 사이의 쿠르스크를 뿌리로 뻗어 나온 듯한 모양새 때문에 쿠르스크 돌출부라고 불린 이 돌출부 안으로 소련군을 유인한 뒤 포위 섬멸한다면,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쿠르스크는 북부집단군 등과 협력하여 모스크바를 위협하거나 심지어는 포위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고 있기도 하였다. 비록 1941-42년에 비해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는 했지만 제3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살펴볼 수 있었듯이 나치 독일군의 저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련군, 나아가 연합군의 그 어떤 전차도 압도하는 강력한 성능을 가진 신무기 5호전차 판터와 6호전차 티거의 본격적인 실전배치는, 나치 독일 군부로 하여금 소련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되살리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1943년 3-4월에 걸쳐 쿠르스크 돌출부를 남북으로 포위하여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하였고, 프란츠 할더의 후임으로 임명된 신임 육군 총참모장 쿠르트 자이츨러(Kurt Zeitzler, 1895-1963) 상급대장은 5월 초 성채 작전(Unternehmen Zitadelle)이라 불리는 작전을 입안하였다. 기갑부대를 주축으로 한 공격군이 서쪽으로 돌출한 쿠르스크 돌출부의 남동단과  북동단으로부터 쿠르스크를 향해 신속히 기동하여 포위망을 형성하고, 포위망 안의 소련군을 섬멸하여 동부전선의 소련군 전력에 중대한 타격을 준다는 계획이었다. 돌출부 북동단에서는 병력 26만여 명에 전차  약 1,500여 대, 화포 6,300여 문을 갖춘 중부집단군(사령관 권터 폰 클루게 원수) 예하 제9군(사령관 발터 모델(Otto Moritz Walter Model, 1891-1945) 상급대장)이, 남동단에서는 주력인 남부집단군(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 예하 제4기갑군(사령관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과 켐프 분견군(사령관 베르너 켐프(Werner Kempf, 1886-1964) 대장)(도합 병력 약 17만 명, 전차 1,700여 대, 화포 3,600여 문)이 포위망 형성을 위한 공세를 맡을 계획이었다. 

성채 작전의 계획도(출처: 위키피디아)

 하지만 5월 초에 수립된 이 작전의 시작은 무려 2개월이나 지난 7월 5일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으로부터 입은 손실을 보충 및 회복할 시간도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전황을 극적으로 바꾸어 주리라고 확신했던 신무기 판터, 티거의 양산 및 배치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소련군은 제3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보충하고, 나치 독일군의 공세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강화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소련군 수뇌부는 5월까지 나치 독일군의 주공이 쿠르스크를 향할지 하르코프를 향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6월 중-하순에는 첩보와 정찰 활동을 통해서 나치 독일군의 의도를 상당 부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소련군은 쿠르스크 일대에 대전차 지뢰, 콘크리트 방벽, 토치카 등을 치밀하게 배치하여 견고하게 요새화하는 한편으로, 돌출부 북쪽에 병력 66만여 명 규모의 중부전선군(사령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대장), 남쪽에 병력 약 42만 명 규모의 보로네시 전선군(사령관 니콜라이 바투틴 대장)을 배치하는 한편 두 집단군의 후방에 전략예비대로 약 45만 명 규모의 스텝 전선군(사령관 이반 스테파노비치 코네프(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Конев, 1897-1973) 대장)까지 배치해 두었다. 나치 독일군의 공세에 대한 대비를 완료한 소련군은 총병력 150만여 명에 6,000대 이상의 전차, 약 35,000문의 화포를 배치하였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규모는 나치 독일과 비교했을 때 총병력 3.5:1, 전차 대수 2:1, 화포 문수 3.5:1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성채 작전의 진행 상황도(적색: 나치 독일군, 청색: 소련군)(출처: 위키피디아)

  7월 5일 작전 개시와 더불어, 쿠르스크 돌출부의 남북에서 나치 독일군이 소련군을 포위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북동쪽에서 공격을 개시한 나치 독일 제9군은 각종 방어 시설과 지뢰로 중무장한 거대한 방어 종심을 형성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심지어 수천 문의 화포를 동원한 소련군 포병의 일제 사격으로 인해 초기 공격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기까지 하였다. 제9군은 작전 개시 후 7일 동안 고작 8-12km밖에 전진하지 못했으며, 작전 개시 다음날인 7월 6일에는 로코솝스키가 전략예비대까지 동원한 역습에 나섰다. 나치 독일군 내부에서도 위기관리 능력이 특히 뛰어나 '총통의 소방수'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발터 모델이었지만, 소련군의 방어선을 효과적으로 돌파하기는커녕 역습당할 위기에까지 몰리자 결국 7월 14일에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남부전선군 병력의 상황은 제9군보다는 나았다. 헤르만 호트가 지휘하는 제4기갑군단은 공격 개시와 더불어 소련군의 방어선을 차례차례 돌파해 간 다음, 저항하는 소련군 제1근위전차군(사령관 미하일 예프레모비치 카투코프(Михаил Ефимович Катуков, 1900-1976) 상장)을 철도 교통의 요지였던 프로호롭카(Прохоровка)에서 포위 섬멸을 시도했다. 이에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은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 게오르기 주코프의 승인 하에, 스텝 전선군 예하 5개 야전군을 동원한 반격을 시도했다. 이에 따라 7월 12일 프로호롭카에서는, 제4기갑군 예하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군단장 파울 하우서(Paul Hausser, 1880-1972) 무장친위대 대장)과  소련군 전차 800대와 소련군 제5근위전차군(사령관 파벨 알렉세예비치 로트미스트로프(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Ротмистров, 1901-1982) 대장) 간의 대규모 전차전이 벌어졌다. 나치 독일군 전차 약 200-300대와 소련군 전차 약 800대가 동원된 프로호롭카 전투는, 사상 최대의 전차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의 2배나 되는 전차를 동원했지만, 나치 독일군은 소련군의 전차보다 성능 면에서 월등했던 판터, 티거 전차를 다수 투입하였다. 전투 결과는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압승이었다. 소련측 기록에 따르면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이 전차 및 기갑차량 320대, 제5근위전차군이 400대를 손실했지만, 실제로는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전차 및 기갑차량 손실은 200여 대 중 50대 전후에 불과한 반면 제5근위전차군의 손실은 무려 500대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호트는 프로홉카에서의 전술적 승리의 여세를 몰아, 예하 제3기갑군단을 벨고로드 동쪽 축선으로 투입하여 돌파구 확대를 시도하였다.

프로호롭카 전투 상황도(빗금: 프로호롭카, 청색: 독일 제2기갑군단, 적색: 소련 제5근위전차군)(출처: 위키피디아)
쿠르스크 남쪽에서 기동하는 나치 독일군 전차부대의 모습(출처: 위키피디아)

  하지만 호트의 기대와는 달리, 프로홉카에서의 전술적 대승은 전략적 전과 확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군 전력을 소멸시킨 미군이, 영국군과 더불어 시칠리아 상륙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히틀러는 이탈리아 방면의 연합군 견제 및 격퇴를 위해,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이로서 쿠르스크 돌출부의 소련군 섬멸을 목표로 하는 성채 작전은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나치 독일군은 더 이상의 공세를 취할 수 없었고, 전선은 원위치로 돌아가고 말았다.

연합군의 시칠리아 점령과 이탈리아 침공. 이로 인해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했고, 나치 독일은 이탈리아 방면의 연합군을 견제해야만 했다.(출처: 위키피디아)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의 후퇴를 방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쿠르스크 돌출부의 북쪽에 형성된 오룔의 돌출부로부터, 대규모 공세인 쿠투초프 작전을 개시했다. 대규모 포병부대의 지원 하에 압도적인 규모의 기갑부대와 보병부대의 돌격을 통하여, 소련군은 8월 5일에는 오룔과 브랸스크를 점령하고 나치 독일군 잔존 병력을 소통하는데 성공했다. 이어서 서부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은 8월 초에 남부집단군 방면으로 대규모 공세를 실시했다. 프로호롭카 전투에서의 참패 후 불과 2-3주만에 벌어진 소련군의 대공세는 폰 만슈타인조차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고, 그는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돈바스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예하 병력의 대부분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이로서 남부집단군 병력의 분산에 성공한 소련군은, 루먄체프 작전을 발동하여 하르코프와 벨고로드 공략을 감행하였다. 첩보 활동을 통해 나치 독일군의 의도를 상당 부분 간파했던 소련군과 달리, 나치 독일군은 소련군의 기만과 양동 작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8월 초에는 벨고로드가, 8월 말에는 하르코프가 소련군에게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후 소련군은 드네프르 강 방면으로의 공세를 지속하여 11월 초에는 키예프 탈환에 성공했다. 비록 나치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소련군은 민스크 탈환과 벨라루스 수복까지 계획(고멜-레치차 작전)할 수 있었다.

쿠르스크 전투 직후인 1943년 8월에 이루어진, 소련군의 벨고로드-하르코프 방면 공세 상황을 나타낸 지도(출처: 위키피디아)

  쿠르스크 전투는 사실상 동부 전선에서 나치 독일이 시도한 마지막 대규모 공세였다.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참패 후에도 나치 독일군의 저력은 여전히 강대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은 히틀러가 성채 작전을 연기하지 않고 본래 계획대로 5월이나 6월 초에 작전을 개시했더라면, 쿠르스크 돌출부에서의 소련군 포위 섬멸이라는 작전 목표가 달성되었으리라고 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소련군은 1941-42년과 달리, 물질적인 전투력을 크게 증강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술교리 또한 세련된 수준으로 발전시켜 놓은 상태였다. 비록 나치 독일이 판터, 티거와 같은 신무기를 개발 및 투입하는데 성공했다고는 했지만, 소련군은 그 동안 쿠르스크 돌출부를 나치 독일군의 공세를 충분히 저지할 수 있는 강력한 요새로 탈바꿈시키는데 성공했다. 더욱이 소련은 국토 후방으로 이전시켜 놓은 군수산업 시설에서 대량의 화포와 전차, 군용기를 생산할 수 있었고, 영국과 미국으로부터의 장비 및 물자 지원은 소련군의 전력을 더한층 강화시켰다. 소련의 광대한 영토와 군수산업 시설의 후방 이전, 그리고 연합국과의 보급선 확보는, 판터와 티거 전차를 상대할 수 있는 대량의 무기와 장비를 소련군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프로홉스카에서 무려 500대에 달하는 전차와 기갑차량을 손실한 소련군은, 불과 2-3주도 지나지 않아 루만체프 작전을 발동하여 벨고로드,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이어서 나치 독일군을 드네프르 강 일대까지 몰아낼 수 있었다.

  반면 1943년 7월의 지정학적 상황은, 나치 독일에게는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북아프리카의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로 인해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되어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나치 독일은 더 이상 동부전선에만 전력을 집중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하고 말았다. 프로홉스카 전투에서의 전술적 대승이 전과 확대로 이어지지 못한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이탈리아 전선의 지정학적 변화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히틀러는 특임부대를 동원하여 실각 후 감금당한 무솔리니를 구출한 뒤 그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정부인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epubblica Sociale Italiana)을 연합군이 아직 장악하지 못한 이탈리아 북부에 세웠지만, 이 괴뢰국가는 가뜩이나 약체였던 이탈리아보다도 훨씬 역량이 떨어졌다. 나치 독일 입장에서 이탈리아의 지정학적ㆍ군사지리학적 위치는, 지중해를 견제할 수 있는 발판에서 연합군의 견제를 감내해야 할 동부전선 후방의 약점으로 바뀌고 말았다.

  성채 작전의 실패 이후 소련군의 연이은 대공세에 동부전선의 상당 부분을 소련군에게 빼앗기면서, 나치 독일군은 기존의 공세에서 수세로 몰렸을 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 역량도 크게 약화되었다. 반면 소련군은 1943년 후반의 대공세에서 나치 독일군의 손실을 상회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어야 했지만, 전쟁의 흐름이 바뀌고 우크라이나 동부의 영토를 탈환하면서 그러한 손실을 상당 부분 만회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였을 뿐만 아니라, 인구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2차대전 개전 무렵만 하더라도 스탈린의 독재와 실정에 질려 있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 독일의 비인간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지배를 받으며 소련에 대한 애국심으로 충만한 반나치 전사로 거듭나 있었다. 

  성채 작전은 결론적으로 실패로 돌아간 나치 독일 최후의 대규모 공세였고, 이는 지리적ㆍ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유럽 전체의 스케일에서 살펴보면, 시칠리아의 함락과 이탈리아의 항복 및 연합국으로의 전향은 2차대전의 전략적ㆍ지정학적 판도를 크게 흔들어 놓았다. 나치 독일로서는 동부전선에 집중할 전력과 국력조차 충분치 못한 마당에, 이탈리아라는 배후까지 견제당함으로써 전력의 분산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악재까지 만난 셈이었다. 동부전선으로 스케일을 좁혀 보면, 나치 독일은 소련군의 주력을 유인하여 포위 섬멸할 절호의, 그리고 사실상 마지막의 기회를 날려 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쿠르스크 전투 이후 이어진 소련군의 여러 작전에 의해 동부전선 남부에서 드네프르 강 인근까지 후퇴함으로써, 군사적으로는 물론 지정학적으로도 더욱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상실은 인적ㆍ물적 자원을 보충할 기회를 줄였을 뿐만 아니라, 자원의 생산지였던 캅카스 일대가 온전히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하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만일 쿠르스크 전투가 원래 계획대로 5월-6월 초에 개시되었더라면, 성채 작전은 성공했으리라는 견해를 내놓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이 시기에는 소련군의 방어 계획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연합군의 시칠리아 및 이탈리아 남부 진주와 무솔리니 정권의 붕괴도 이루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채 작전은 결국 예정보다 1-2개월이나 늦춰져 개시되었고, 프로호롭카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성채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어서 나치 독일은 우크라이나 동부까지도 상실하고 말았다. 쿠르스크에서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 나치 독일군이 세웠던 성채는 무너진 셈이었다. 그리고 성채 작전이라는 성벽이 무너짐으로써, 1943년 후반의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은 완연히 수세로 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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