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킨더의 지정학 이론인 심장부 이론을 통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읽기
2차대전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알려진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캅카스 일대의 정복을 목표로 한 나치 독일의 작전 계획인 청색 작전 과정에서 일어났다. 오늘날에는 볼고그라드(Волгоград)라는 지명으로 개칭된 스탈린그라드는 캅카스 북쪽에 위치한 도시로, 중공업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철도망과 도로망, 그리고 볼가 강과 돈 강을 잇는 운하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즉, 캅카스 북쪽의 관문과도 같은 지정학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때문에 A, B 두 집단군 병력을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진격시켜 캅카스를 정복하고자 했던 청색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나치 독일은 반드시 스탈린그라드를 손에 넣어야 했다. 물론 소련 입장에서는 반드시 사수해야 할 거점이기도 하였다.
스탈린그라드는 단순히 전략적ㆍ지정학적 요지 이상의 중요성을 가진 도시이기도 하였다. 스탈린의 이름을 따서 지은 지명 때문이었다. 본래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건설된 도시라는 이유로 '차리친(Цари́цын: '여황제의 도시'라는 뜻)이라 부렸던 이 도시는, 1925년 소련 정부에 의해 스탈린그라드라는 지명으로 개칭되었다. 러시아 혁명전쟁 당시 정치위원으로 참전했던 스탈린이 반혁명군인 백위군(白衛軍)으로부터 차리친을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는 이유였다. 스탈린의 실제 전공이 어떠했는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 같은 지명은 소련 체제와 스탈린 집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지명의 문화정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제정 러시아의 잔재를 지우고 소련 공산당, 그리고 스탈린의 정당성을 분명하게 재현할 수 있는 지명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치 독일 입장에서 스탈린그라드의 함락은 지정학적ㆍ전략적 요지 확보뿐만 아니라, 소련군의 몰락과 소련 체제의 붕괴까지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물론 소련 입장에서는 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해야만 했다. 이는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치 독일과 소련 양측이 결사적인 공방전을 벌였던 중요한 배경이자 요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영국의 지리학자 핼퍼드 매킨더(Halford J. Mackinder, 1861-1947)가 제안한 지정학 이론인 심장부 이론(Heartland Theory)과도 적지 않은 접점을 찾아볼 수 있다. 심장부 이론은 20세기 초중반 세계 지리학계와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에도 지정학 이론으로서의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본 장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개와 과정을, 매킨더의 심장부 이론과 비교 및 대조해 가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매킨더는 영국 근대 지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지리학자이다. 옥스퍼드에서 동물학을 전공했던 그는 1888년 모교의 지리학과 창설을 주도했으며, 영국에서 개별적, 파편적으로 연구 및 교육이 이루어져 오던 인문지리학 및 자연지리학의 여러 분야들을 지리학이라는 학문으로 통합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학자로서의 학문적 역량뿐만 아니라 정치적 수완 또한 뛰어났던 그는, 영국의 학교 교육과정에서 지리가 중요 교과로 지정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의 수완 덕택에 영국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지리 교과는 지금도 비중이 높은 중요 교과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라첼 등 당대 지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정학 연구에 천착했던 매킨더는, 1904년 영국 왕립 지리학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Geographical Journal에 The geographical pivot of history(역사의 지리적 축)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의 요지는, 해양 세력이 접근하기 어려운 대륙의 추축 지역(pivot area) 확보가 국제 정치와 역사의 전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이다. 매킨더는 이 논문에서, 러시아와 캅카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지대, 톈산 산맥과 샤안 산맥, 아나디르 산맥 서부를 잇는 선 안쪽을 추축 지역으로 규정하였다. 그 근거는 해양 세력의 접근 가능성이었다. 매킨더는 추축 지역의 경우 바다로 흘러가지 않는 내륙 하천이 흐르거나 항해가 불가능한 북극해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해양 세력이 바다를 통해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간주하였다. 즉, 추축 지역이란 대륙 세력의 ‘심장부’인 셈이었다. 그리고 매킨더는 추축 지역 주변의, 하천이 대양으로 흘러들어 가는 지역을 내측 초승달 지역(inner cresent), 그리고 내측 초승달 지역 바깥에 위치한 지역을 외측 초승달 지역(outer cresent)이라고 분류하였다. 이중 내측 초승달 지역에 포함되는 지역들로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과 이란 남부, 터키, 인도, 인도차이나 반도, 북서부 일부 지역을 제외한 중국의 대부분, 한반도, 일본 등이다. 그리고 남북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은 외측 초승달 지역에 해당한다. 내측 초승달 지역은 추축 지역을 장악한 대륙 세력과 인접하며 대항하는 해양 세력의 영역이고, 외측 초승달 지역은 해양 세력의 배후에 위치하며 해양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매킨더는 1919년 출간한 저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Democratic Ideals and Reality)』에서, 추축 지역 이론을 수정ㆍ보완한 심장 지대(heart land) 이론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심장 지대란 기존의 추축 지역 범위에 일부 영역(발트 해 및 흑해 연안, 도나우 강 중ㆍ하류 일대, 몽골, 캅카스 일대 등)을 추가한 영역으로, 매킨더는 이 지역을 대하천 유역의 비옥한 저지대와 풍부한 지하자원을 갖춘 세계 지정학의 중심지대로 간주하였다. 매킨더는 심장 지대를 장악한 세력이 그 광대하고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우고 해양 세력의 영역까지 진출하여,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지배할 세력으로 부상하리라고 예견하였다. 그리고 심장 지대의 핵심을 동유럽이라고 간주하였다. 즉, 동유럽을 지배하는 세력이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나아가 '세계 섬(The World Island)'라고 명명된 심장 지대와 연결된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등지까지도 지배한다는 논의였다. 요컨대 매킨더의 지정학은 쉽게 말해서 '대륙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논리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매킨더의 지정학은 당시 해양력을 중심으로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지만 그 전성기가 사실상 지나가고 있던-했던 영국의 러시아에 대한 우려와 견제, 그리고 영국의 제국주의적 관점이 반영된 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제정 러시아는 영국과 전 세계에서 패권 경쟁을 벌였으며, 해양 제국이었던 영국은 대륙 제국이었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크림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여 러시아의 흑해 진출을 저지하는가 하면 러일 전쟁 때는 미국과 더불어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 저지를 위해 일본을 적극 지원하였다. 게다가 러시아 혁명을 통한 소련의 출현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게는 심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매킨더는 1차대전 종전 후에도 영국이 대륙 세력(소련) 견제를 위해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의 식민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후대 지리학자들에게 제국주의적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냉전시대 소련의 지리학자들은 매킨더의 지정학이 소련과 동구권 고립을 위한 이론적 배경이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매킨더의 지정학은 단순히 제국주의를 옹호했다기보다는, 20세기 초ㆍ중반의 국제질서라는 맥락을 냉철하게 짚은 지정학 이론으로 봄이 타당하다. 실제로 매킨더의 지정학은 해양 세력(서유럽)과 대륙 세력(소련, 러시아)의 국제정치적ㆍ지정학적 대립을 예리하게 짚어낸 지정학 이론이라는 점에서 2차대전 초반에 일어난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2차대전 이후 냉전 질서, 나아가 소련 해체 후 러시아의 팽창주의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으로도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캅카스, 나아가 대륙(심장 지대) 확보를 위한 나치 독일과 소련 간의 전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부터 흑해 동안(東岸)에서 카스피 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 일대를 장악하기 위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캅카스와 카스피 해 일대는 세계적인 유전 제대로, 대규모의 석유 및 천연가스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때문에 캅카스는 2차대전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세계 석유 및 천연가스 산업의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캅카스 일대에서는 19세기 초반에 제정 러시아에 의해 석유 채굴이 시작되었으며, 19세기 후반 스웨덴 출신의 루드비그 노벨(Ludwig Immanuel Nobel, 1831-1888), 로베르트 노벨(Robert Hjalmar Nobel, 1829-1896) 형제의 바쿠(현 아제르바이잔 수도) 유전 개발을 계기로 본격적인 석유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노벨 형제는 산악 지형인 캅카스 일대의 지하에 송유관을 건설함으로써 이 지역이 지형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러시아, 나아가 세계 석유 산업의 요지로 거듭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제정 러시아와 구 소련은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 캅카스 및 카스피 해 유전 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였으며, 1930-40년대 캅카스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석유 생산지로 부상해 있었다. 오늘날에도 캅카스, 카스피 일대의 유전 지대는 세계 경제와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 지역은 지정학적 요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례로 1990년대-2000년대에 걸쳐 일어난 체첸 분쟁은 표면상으로는 민족적, 역사적, 종교적 정체성에 따른 체첸의 분리주의 운동과 이에 대한 러시아의 강경 진압이 원인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캅카스의 석유자원 확보와 관련된 이권이 자리하고 있었다.
캅카스 일대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산악 지대인 캅카스를 통과하면 곧바로 중동과 이란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중동에서는 이미 1920-30년대부터 석유 채굴이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동은 이집트와도 지리적으로 인접한다. 뿐만 아니라 이란 역시 영국의 최대 식민지였던 인도와 인접할뿐더러, 2차대전 당시 영국은 이란을 통하여 소련에게 장비와 물자를 공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나치 독일이 캅카스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면 캅카스의 석유 확보는 물론 중동과 이란, 나아가 인도까지 노릴 수 있었다. 이렇게 된다면 더 많은 자원 확보는 물론이고, 연합군의 전쟁 수행에도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캅카스를 장악한다면 석유 자원 확보는 물론 소련과 다른 연합국들 간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소련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41년 12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나치 독일은 캅카스 지역의 정복을 목표로 하는 청색 작전(Fall Blau)를 입안하였다. 당초에는 게르만 신화의 영웅 지크프리트(Siegfried)의 이름을 따서 작전명을 명명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전년도에 독일 민족의 영웅의 이름을 딴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본래의 계획 대신 청색 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청색 작전의 주공은 7월 초에 B집단군으로 개칭되는 남부집단군(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Moritz Albrecht Franz Friedrich Fedor von Bock, 1880-1945) 원수), 그리고 새로 편제된 A집단군(사령관 빌헬름 폰 리스트(Sigmund Wilhelm Walther von List, 1880-1971) 원수)였다. 대규모의 추축국 동맹군 병력들도 동부전선에 파견되어 두 집단군을 지원하였다. 이탈리아 제8군과 헝가리 제2군은 각각 10개 사단, 루마니아 제3군은 24개 사단 규모였다.
1942년 5월 하르코프(Харьков)에서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한 나치 독일은, 전력을 보충 및 재편한 뒤 동년 6월 28일 작전을 개시했다. 캅카스 정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나치 독일과 달리,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나치 독일군의 주공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를 향할 것이라는 확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6월 19일 소련 영내에 불시착한 독일 제23기갑사단의 작전장교로부터 청색 작전의 내용을 담은 비밀문서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역정보(逆精報)로 간주하며 캅카스 방면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워두지 못했다. 소련군은 주전력은 물론 예비전력까지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방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캅카스에 이르는 동부전선 남부의 소련군은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청색작전 초기에 연패를 거듭했다.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가 지난해의 과오를 시정하여 야전 지휘관과 참모들의 재량과 판단을 존중하는 한편 예하 부대들에게 작전상의 후퇴를 허용했기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처럼 수백만 명이 넘는 포로가 발생하는 참극은 피할 수 있었지만, 충분한 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나치 독일군의 강력한 진격에 소련군은 계속해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11월 이후 8개월 이상 포위를 버티던 세바스토폴은 결국 1942년 7월 초에 함락되었고, 남부집단군은 브랸스크, 쿠르스크, 벨고로드 방면에서 소련군을 신속하게 격파한 뒤 7월 4일에 돈 강 상류의 보로네시까지 진출했다. 나치 독일군은 당초 계획했던 소련 남서 집단군의 완전 포위에 성공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남부집단군에서 개칭된 B집단군 사령관 폰 보크 원수가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Maximilian Maria Joseph Karl Gabriel Lamoral Reichsfreiherr von Weighs, 1881-1954) 원수로 경질되기도 했지만, 나치 독일의 A, B 두 집단군은 동부전선 남부의 소련군 방어선을 차례차례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7월 13일, 히틀러는 두 집단군에게 로스토프 포위를 명했다. B집단군으로부터 제4기갑군과 1개 보병 군단을 배속받아 증강된 A 집단군이 주공이었고, B집단군은 조공으로서 A집단군의 측방과 후방을 엄호하며 포위망을 형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치 독일군은 빠른 진격 속도와 길어진 보급로로 인해 연료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로스토프 포위에 성공했고, 7월 23일에는 로스토프를 함락시켰다. 아울러 중부집단군 예하 제2기갑군은 레닌그라드 동쪽의 볼호프에서 소련 서부전선군 예하 3개 야전군을 동원한 게오르기 주코프의 공세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청색 작전은 목표를 달성할 것처럼 보였다.
스탈린그라드는 사실 청색 작전 계획 초기에는 나치 독일의 주요 목표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정학적 요지이자 교통의 결절점이라고는 하지만, 청색 작전의 목표인 캅카스 지역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42년 7월 23일 로스토프가 함락되자, 히틀러는 중공업이 발달한 교통의 요지이자 '스탈린'이라는 상징적인 지명을 가진 도시였던 스탈린그라드까지도 노리기 시작했다. 이 날 히틀러는 총통 지령 45호를 발령하여, 제4기갑군 예하 제24기갑군단을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는 제6군(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Friedrich Wilhelm Ernst Paulus, 1890-1957) 중장)의 지원을 위해 차출하도록 하였다. 청색 작전이 캅카스뿐만 아니라 스탈린그라드라는 두 개의 목표를 가진 작전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A집단군은 캅카스 방면,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 방면의 공략을 맡게 되었다. 제2차 하르코프 공세의 격퇴에 이은 청색 작전 초기의 군사적 성과에 고취된 히틀러가 소련군의 잠재력, 그리고 보급 문제를 간과한 채 캅카스를 넘어 스탈린그라드까지 욕심을 부리면서, 결과적으로는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는 단초를 스스로 만들어 버린 셈이었다. 실제로 A집단군은 8월 28일 자캅스카스 전선군의 방어를 뚫지 못했으며, 이후 캅카스 지역의 점령에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만일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A, B 두 집단군 병력을 캅카스 방면에만 집중했다면, 청색 작전은 물론 2차대전의 향방도 상당 부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B집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나치 독일군의 전력은 동쪽의 스탈린그라드에 집중되었다. 인구 약 60만 명의 도시 스탈린그라드의 방어는, 바실리 이바노비치 추이코프(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уйко́в, 1900-1982) 중장이 지휘하는 제62군(8개 사단으로 편성)이 담당하고 있었다. 제62군은 인접한 제64군(사령관 미하일 스테파노비치 슈밀로프(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Шумилов, 1895-1975) 중장)과 더불어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사령관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예료멘코(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Ерёменко, 1892-1970) 대장)을 형성하였으며, 이 부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주력으로 활동하게 된다.
8월 말에 이르러 나치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 외곽까지 진격했고, 공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9월에 접어들면서 제4기갑군까지 합류하면서, 나치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위한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나치 독일군은 기갑전력뿐만 아니라 항공전력에서도 소련군에 비해 현저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추이코프는 휘하 병력으로 나치 독일군을 도시 바깥이나 외곽에서 요격하거나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불리하다는 판단 하에, 개활지에서의 야전을 최대한 회피하고 나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소련군과 근접전을 벌이도록 유도했다. 이렇게 하면 나치 독일군의 전차부대가 가진 기동력과 화력이라는 이점을 무력화할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군 오폭의 위험성이 매우 커지기 때문에 나치 독일 공군기의 공습 또한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추이코프 휘하의 제62군 병력은 나치 독일 제6군과 공군의 포격과 폭격으로 초토화된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건물 잔해들을 엄폐물 삼아 시가전을 전개했고, 나치 독일군에게 무시하기 어려운 손실을 강요했다. 하지만 나치 독일군은 공세를 지속했고, 10월에 접어들어 소련군의 방어선은 사실상 스탈린그라드의 최후방이라고 할 수 있었던 볼가 강 서안 일대까지 밀려났다.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이 볼가 강 동안에서 예비대를 지속적으로 투입해 주었기에, 추이코프는 스탈린그라드를 완전히 잃지 않고 나치 독일군의 공세를 가까스로 방어해 낼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에서 나치 독일군 제6군은 지속적으로 전력을 소모해 갔지만, 소련군의 피해는 독일군이 입은 손실의 규모보다도 더 컸다. 10월 말에 접어들어 나치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Friedrich Wilhelm Ernst Paulus, 1890-1957) 대장은 11월 10일까지 스탈린그라드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히틀러는 11월 2일 제6군 휘하의 전 병력을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에 투입하여 저항하는 소련군 병력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42년 10-11월의 스탈린그라드는 볼가 강 서안의 방어선을 간신히 유지하며 함락을 목전에 둔 모양새였다. 하지만 소련군 수뇌부는 스탈린그라드를 소련군이 아닌, 나치 독일군의 무덤으로 만들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1942년 7월 소련군 신임 총참모장으로 부임한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바실렙스키(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Василе́вский, 1895-1977) 대장은, 스탈린그라드로 돌출한 나치 독일군의 양측면을 담당했던 루마니아군을 격멸하고 제6군 병력을 포위 섬멸한다는 천왕성 작전(Операция Уран)을 입안하여 스탈린의 승인을 받았다. 바실렙스키는 천왕성 작전을 바탕으로, 소련 남부에 진출한 나치 독일 A집단군과 B집단군 및 그 동맹군 병력을 대규모로 포위 섬멸한다는 토성 작전(Операци Сатурн)까지 발전시켜 갔다. 천왕성 작전에 투입될 전략예비대는 스탈린그라드 방면이 아닌, 모스크바 일대에 은폐시켰다. 이 작전에는 일본-소련 중립 조약에 따라 군사적 위협이 줄어든 극동 방면의 병력까지 동원되었다. 심지어 소련군 수뇌부는 나치 독일군을 기만하기 위해, 스탈린그라드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라는 전문을 의도적으로 흘리기까지 하였다. 나치 독일군은 소련군이 천왕성 작전을 통해 스탈린그라드에서 대규모 역습을 실시하리라는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이에 대한 충분한 준비 없이 스탈린그라드 함락의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1942년 11월 19일, 천왕성 작전이 시작되었다. 약 43만 명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에 더해 소련 남서 전선군(사령관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바투틴(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Ватутин, 1901-1944) 대장)과 돈 전선군(사령관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Рокоссовский, 1896-1968) 대장) 등의 병력을 합한 114만여 명의 병력이 이 작전에 동원되었다. 이 작전에 소련군은 전차 약 900대, 야포 1만 3천여 문, 항공기 1,100여 대를 동원하였다. 나치 독일군에 비해 2배가 넘는 전력이었다. 돈 전선군과 남서 전선군 병력은 스탈린그라드 북동쪽에서 진격하여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열악했던 루마니아군을 신속히 격파하고, 11월 30일에는 스탈린그라드의 추축국 병력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약 33만 명의 나치 독일 제6군 병력, 그리고 루마니아군 패잔병들이 소련군에게 포위당했다. 애초부터 보급이 충분하지 못했던 나치 독일군에게 이는 치명적인 위기를 야기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제6군에게 작전상 후퇴 대신 스탈린그라드 사수를 명령했고, 파울루스는 그 명령에 순종했다. 파울루스는 나치 독일 군부에서도 손꼽히는 명 참모였지만, 지휘관 경력이 부족한 데다 병력 장악 능력이나 기민한 상황 판단 및 대처 능력도 부족하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애초부터 보급이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소련군에게 포위된 이후 제6군의 전투력은 눈에 띄게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나치 독일은 폰 만슈타인 원수를 사령관으로 하는 돈 집단군을 급조하여 스탈린그라드 구원에 나섰다. 12월에 폰 만슈타인은 겨울 폭풍 작전(Unternehmen Wintergewitter)을 발동하여, 돈 집단군의 주력을 서쪽으로 진격시켜 소련군을 유인한 다음 헤르만 호트가 지휘하는 제4기갑군 병력을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진격시켜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을 뚫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폰 만슈타인에게는 충분한 시간도, 병력도, 장비도 주어지지 못했다. 애초에 돈 집단군부터가 급조된 병력이었다. 폰 만슈타인과 호트의 선전 덕택에 겨울 폭풍 작전은 성공 직전까지 갔지만, 파울루스가 제6군을 움직여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고 제4기갑군과 연동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데다 히틀러마저도 계속해서 스탈린그라드 사수 명령을 내린 탓에 결국 제6군의 구원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헤르만 괴링이 제안한 항공 수송 역시 애초부터 30만 명이 넘는 제6군 병력을 위한 대규모 물자 수송에 부적합했던 데다, 그나마 이루어진 항공 보급 역시 소련 공군과 방공망에 의해 상당수가 요격당하고 말았다. 여기에 더불어, 12월 16일 소련군이 기존의 토성 작전을 수정한 소(小)토성 작전()을 실시하면서 제6군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서쪽 돈 강 일대의 추축군을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여 제6군을 철저히 고립시키려는 시도를 하였고, 이 때문에 이탈리아군과 루마니아군은 궤멸되었으며 나치 독일 A집단군 역시 상당수의 거점을 잃고 캅카스에 고립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군 수뇌부는 스탈린그라드를 사실상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고립된 채 보급 부족에 시달린 데다 겨울의 혹한까지 닥치자, 제6군 장병들은 비참한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월동 장비와 물자의 보급이 사실상 끊어진 상황 속에서 제6군에서는 나날이 다수의 동사자와 아사자가 발생했으며, 제6군 장병들은 기아를 견디다 못해 군마(軍馬)를 잡아먹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1월에도 소련군의 공세가 이어졌고,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한 제6군은 소련군을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히틀러는 1943년 1월 30일 파울루스가 항복 대신 자결하라는 의도로 그를 원수로 진급시켰지만, 파울루스는 이를 무시하고 결국 2월 2일 소련군에게 항복하였다. 30만 명이 넘는 제6군과 추축군 병력들 가운데 목숨을 부지하여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힌 인원은 9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고, 이들도 대부분 혹한과 기아, 가혹한 포로 생활 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어갔다. 전쟁이 끝난 뒤 독일로 생환한 제6군 포로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
청색 작전의 목표, 그리고 스탈린그라드의 위치는 여러 측면에서 매킨더의 심장부 이론과 강한 접점을 가진다. 우선 스탈린그라드의 위치부터가 추축 지역, 또는 심장 지역의 위치적 특성과 부합하는 부분이 많다. 우선 스탈린그라드를 흐르는 볼가 강은 바다가 아닌 카스피 해로 흘러드는, 대표적인 내륙 하천이다. 캅카스 일대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캅카스 일대는 세계적인 유전 지대였고, 때문에 이 지역의 확보는 나치 독일의 고질적인 골칫거리였던 자원 및 연료 부족을 해결해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캅카스의 확보는 이란, 중동, 인도 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확보를 의미하기도 했다. 나치 독일이 캅카스를 확보한다면 영국-미국과 소련을 잇는 연합군의 연결고리에 중대한 타격을 줄 수 있었고, 영국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해양 세력으로부터의 원조 및 이들과의 연계에 타격을 입은 소련은 이후의 전쟁 수행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치 독일군이 캅카스 장악에 성공했더라면, 소련 외의 연합국, 특히 영국의 식민지가 있었던 인도양과 중동 방면 또한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매킨더의 개념을 빌자면, 히틀러는 캅카스와 스탈린그라드를 장악하고 나아가 소련을 정복하여 동유럽의 거대한 심장부 지역을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으로 삼으로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히틀러는 캅카스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은 있었을지언정, 캅카스와 스탈린그라드의 북쪽, 동쪽, 서쪽 너머로 광대하게 펼쳐진 거대한 영토를 가진 소련의 잠재력을 정확하게, 냉철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으리라고 판단된다. 소련은 비록 나치 독일에 의해 많은 영토를 상실했다고는 했지만 캅카스와 스탈린그라드 배후에 여전히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었고, 이 거대한 영토의 인적ㆍ물적 자원 역시 여전히 소련의 수중에 있었다. 볼가 강 서안 일부를 제외한 스탈린그라드 시역(市域) 대부분이 나치 독일의 수중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저항할 수 있었던 배경, 그리고 소련군이 천왕성 작전과 소토성 작전 등을 통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나치 독일 제6군을 포위 섬멸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거대한 대륙 국가인 소련의 지리적 특징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저서 『한 군인의 회상』에서 히틀러를 육지에 대해서는 충실하게 이해했지만 바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인물로 언급하고 있는데,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개와 과정을 살펴보면 히틀러의 육지, 대륙에 대한 이해 역시 충분했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소련의 잠재력과 저력, 그리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의 측방을 엄호했던 동맹군의 빈약한 전력과 나치 독일의 열악했던 보급 능력을 과소한 채 무리하게 스탈린그라드 공략을 명령함으로써, 히틀러는 제6군 병력은 물론 청색 작전의 핵심 목표였던 캅카스 공략마저도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만 셈이었다.
'스탈린그라드'라는 지명의 정치적 상징성, 즉 지명의 문화 정치는 스탈린그라드의 참상에 기름을 끼얹은 요인으로 작용했다.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라는 지리적 이유 때문에 히틀러는 애초 청색 작전의 핵심 목표도 아니었던 스탈린그라드 공략에 열을 올렸고, 스탈린은 이 도시의 절대 사수에 집착했다. 1942년 10-11월에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의 전진과 선전을 프로파간다로 적극 활용했고, 1943년 이후 소련과 연합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사수를 정치적ㆍ군사적 선전에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2차대전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까닭은, 전투의 규모뿐만 아니라 상술한 정치적ㆍ지리적 상징성, 그리고 이에 따른 연합군과 추축군의 사기 변화와도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2차대전 이후 스탈린그라드는 나치 침략자를 무찌른 영웅들의 도시로 찬양받았다. 스탈린그라드 시내에는 높이 90m에 달하는 '어머니 조국상'을 비롯한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념물들이 들어섰고, 오늘날까지도 소련과 러시아가 '대조국 전쟁'이라 불러온 독소 전쟁의 승리를 재현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와 별개로 1960년대에 소련의 실권자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의 색채를 지우기 위해 스탈린그라드를 볼고그라드('볼가 강의 도시'라는 뜻)라는 오늘날의 명칭으로 개명하였다. 볼고그라드는 2020년 현재도 여전히 볼고그라드라는 지명을 유지하고 있지만, 정치적ㆍ경제적 어려움과 혼란상으로 인해 구 소련 체제와 스탈린에 대한 향수가 짙어지고 있는 러시아에서는 최근 들어 볼고그라드를 다시 스탈린그라드로 개칭하자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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