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학으로 읽는 바르바로사 작전
나치 독일은 소련과 1939년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지만, 이 조약이 영구히 지속되기는 언뜻 보더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애초에 나치 독일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토대한 극우 정권이었고, 소련의 공산주의는 나치 독일로서는 타도해야 마땅한 이념이었다. 소련 역시 자국을 넘어, 공산주의를 전 세계로 확산시킨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 영토, 특히 유럽의 영토는 나치 독일이 반드시 확보해야 할 레벤스라움이기도 하였다. 이 두 나라의 평화가 지속되기를 기대하기는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겨울 전쟁에서 보여준 소련군의 졸전은, 나치 독일로 하여금 소련군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충분한 승산이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해 주었다. 나치 독일은 영국 본토 항공전 종료 직후부터, 소련 침공을 위한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치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착착 준비했던 반면, 소련의 준비 태세는 미흡하기 그지없었다. 소련군은 1930년대 중-후반의 대숙청에 따른 피해를 아직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 소련군은 총사령관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주도로, 1920-30년대에 전차, 항공기, 공수부대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적인 전략, 전술을 선구적으로 입안해 둔 상태였다.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도 성과를 거두어, 1930년대 소련은 연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나치 독일과 더불어 GDP 기준 세계 2, 3위 수준의 경제 규모를 건설했다. 이를 바탕으로 소련군은 전차 등의 중장비와 신무기를 대거 생산할 수 있었다. 일례로 소련군의 주력 전차였던 T-34는 독-소 전쟁 초중반에 나치 독일이 보유했던 그 어떤 전차보다도 화력과 방어력이 우수하여, 나치 독일군 장병들과 수뇌부를 경악시켰다-각종 매체에서 무적의 전차처럼 묘사되는 나치 독일의 5호 전차 판터(Panter)와 6호 전차 티거(Tiger)는 실제로도 소련군 및 연합군 전차를 압도하는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지만, 이들의 실전 배치는 1942-43년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하지만 투하쳅스키를 비롯하여 소련군 장교단 전체의 절반-70%에 육박하는 장교들이 대숙청에 휘말려 투옥되거나 목숨을 잃으면서, 소련군의 질적 수준은 크게 저하되었다. 유능하고 경험 많은 장교들이 대거 숙청당했고, 능력보다는 충성심, 당성이 앞서거나 고위 지휘관, 참모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경륜이 부족한 장교들이 그 빈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장교들 역시, 자칫하면 또다시 숙청에 휘말릴 수 있다는 두려움 탓에 소신 있는 지휘를 하기보다는 중앙 정부와 공산당, 스탈린의 눈치를 보는 습성에 젖어갔다. 게다가 투하쳅스키를 비롯한 혁신파 장교단이 대부분 숙청당하면서, 이들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현대전 교리도 대부분 폐기되고 말았다.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에 비해 실전 경험 또한 크게 부족했다. 나치 독일군은 폴란드에 이어 노르웨이, 프랑스 전역에서 연승을 거두며 정예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소련군은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겨울전쟁에서는 졸전 끝에 간신히 승리했고, 이는 소련군에게 귀중한 실전 경험을 가져다주기보다는 나치 독일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소련군의 전력을 폄훼하고 우습게 여기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상태였다. 훗날 소련에게 막대한 지원을 해 준 영국, 미국은 아직 소련의 편이 아니었고, 스웨덴은 명목상 중립을 지켰을 뿐 사실상 나치 독일에게 협력했으며, 핀란드, 루마니아 등도 소련의 편에 서 있었다.
스탈린과 소련 정부는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을 전혀 모르는 상태가 아니었다. 소련 정보부, 그리고 동유럽 일대의 친소련 분자들은 지속적으로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을 경고했다. 소련도 내부적으로는 현역 장병 및 예비군 병력에 대한 교육훈련을 강화하고 동부전선 일대의 병력을 증강하는 등의 대비를 해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전쟁 준비 태세는 여전히 열악했다. 스탈린은 동부전선의 준비 태세를 본격적으로 강화하기보다는, 독일과의 평화를 연장시키는데 골몰했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나치 독일은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Unternehmen Barbarossa)을 단행했다. 독-소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일인들이 영웅시해 왔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1122-1190)의 별명인 바르바로사(Barbarossa: 붉은 수염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를 따서 명명한 이 작전에는, 북부 집단군(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Wilhelm Ritter von Leeb, 1876-1956) 원수), 중부 집단군(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Moritz Albrecht Franz Friedrich Fedor von Bock, 1880-1945) 원수), 남부 집단군(사령관 게르트 폰 룬드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1875-1953) 원수)의 3개 집단군, 그리고 노르웨이 주둔 병력인 노르베겐 야전군(사령관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Nicholaus von Falkenhorst, 1885-1968) 상급대장) 병력이 참전했다. 이 3개 집단군 예하에는 총 152개 사단(약 200-250만 명)이 배속되었고, 전차 약 3,350대, 야포 약 7,200문, 항공기 약 2,770대를 장비했다. 노르웨이 방면의 핀란드군 약 20만 명(14개 사단), 그리고 남부 집단군의 후위를 맡을 루마니아군 약 10-20만 명(14개 사단)도 이들을 지원하였다.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총병력 380만 명을 투입하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 3개 도시의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우선 주공인 중부 집단군은 소련의 수도이자 중심지였던 모스크바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모스크바를 점령한다면 소련의 전쟁 수행 기능과 의지를 순식간에 마비시킬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북부 집단군은 발트 3국 방면으로 진격하여, 노르베겐 야전군 및 핀란드군 병력과 합세하여 레닌그라드를 함락한다는 임무를 맡았다. 레닌그라드는 한때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발트 해의 해상 교통 요충지였다. 그리고 남부 집단군은 6월 22일 새벽, 나치 독일은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Unternehmen Barbarossa)을 단행했다. 독-소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일인들이 영웅시해 왔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1122-1190)의 별명인 바르바로사(Barbarossa: 붉은 수염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를 따서 명명한 이 작전에는, 북부 집단군(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Wilhelm Ritter von Leeb, 1876-1956) 원수), 중부 집단군(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Moritz Albrecht Franz Friedrich Fedor von Bock, 1880-1945) 원수), 남부 집단군(사령관 게르트 폰 룬드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1875-1953) 원수)의 3개 집단군, 그리고 노르웨이 주둔 병력인 노르베겐 야전군(사령관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Nicholaus von Falkenhorst, 1885-1968) 상급대장) 병력이 참전했다. 이 3개 집단군 예하에는 총 152개 사단(약 200-250만 명)이 배속되었고, 전차 약 3,350대, 야포 약 7,200문, 항공기 약 2,770대를 장비했다. 노르웨이 방면의 핀란드군 약 20만 명(14개 사단), 그리고 남부 집단군의 후위를 맡을 루마니군 약 10-20만 명(14개 사단)도 이들을 지원하였다.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총병력 380만 명을 투입하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 3개 도시의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우선 주공인 중부 집단군은 소련의 수도이자 중심지였던 모스크바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모스크바를 점령한다면 소련의 전쟁 수행 기능과 의지를 순식간에 마비시킬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북부 집단군은 발트 3국 방면으로 진격하여, 노르베겐 야전군 및 핀란드군 병력과 합세하여 레닌그라드를 함락한다는 임무를 맡았다. 레닌그라드는 한때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발트 해의 해상 교통 요충지였다. 그리고 남부 집단군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접경지대에 놓은 거대한 천연 장애물인 프리피야트(При́пять) 습지 남쪽으로 진격하여,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이자 흑해, 중앙아시아 등과 이어지는 교통과 자원 확보의 요충지인 키예프 점령을 목표로 삼았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소련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광대한 영토를 상실했다. 북부 집단군은 개전 1개월여 만에 발트 3국을 장악한데 이어, 9월 초에는 레닌그라드 포위에 성공했다. 중부 집단군은 개전 2주 만에 소련이 장악했던 폴란드 동부 영토를 장악했고, 남부 집단군은 키예프 정복에 성공하기까지 하였다. 수백만 명의 소련군이 전사하거나 나치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소련군은 패퇴를 거듭했다. 벨라루스 방면을 방어하던 소련 서부전선군은 나치 독일 중부 집단군의 기습과 유인 전술에 휘말린 채, 약 42만 명의 병력을 손실하며 6월 말 전멸하고 말았다. 서부전선군 사령관 드미트리 그리고례비치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 1897-1941) 상장은 결국 패배의 책임을 물은 스탈린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 같은 소련군의 패퇴는, 앞서 언급한 소련군의 준비 태세 미비, 그리고 질적 수준 저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소련군은 충분한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데다, 지휘관들의 자질 역시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작전 지휘에 필요한 능력과 경험이 부족했던 소련군 지휘관들은 적시 적절한 명령을 내리지 못했고, 대숙청으로 인해 투하쳅스키 등이 발전시켰던 선진적인 전술교리 대신 구식 전술교리에 따라 전투에 임했던 소련군은 전차부대를 앞세운 나치 독일군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대숙청과 스탈린의 독재는 전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대숙청으로 인해 과감한 전투지휘를 하는 대신 공산당과 스탈린의 눈치 보는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던 소련군 지휘관과 참모들은, 나치 독일군의 공세에 과감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스탈린의 현실을 무시한 명령은 소련군의 피해를 가중시켰다. 스탈린은 전선의 지휘관, 참모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무리한 전선 사수를 명령했다. 명령에 따르지 않은 지휘관들은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파블로프 외에도 적지 않은 수의 소련군 고위 지휘관과 참모들이 패전의 죄를 추궁당한 끝에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키예프 전역에서는 이 같은 문제가 극적으로 불거졌다. 키예프 방면의 방어는 러시아 혁명전쟁의 전설적인 영웅이었던 부죤늬 원수가 지휘하는 병력 60만 명 이상의 남서 전선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부죤늬는 전설적인 기병 지휘관이었지만 현대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인물이었고, 남서 집단군의 전투력 역시 상기한 문제로 인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남서 전선군은 나치 독일 남부 집단군의 포위에 직면했다. 9월 11일과 14일 포위 섬멸당할 위험성을 인지한 부죤늬와 남서 전선군 정치위원 흐루쇼프(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1894-1971), 그리고 참모장 바실리 투피코프 소장은 키예프의 포기와 남서 집단군의 퇴각을 요청했지만, 스탈린과 소련군 총참모장 보리스 샤포슈니코프(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Шапошников, 1882-1945) 원수는 이를 묵살했다. 퇴각 허가는 9월 17일 자정에야 내려졌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남서 집단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부죤늬와 흐루쇼프는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지만, 투피코프는 전사했다. 나치 독일은 키예프 점령은 물론, 66만 명이 넘는 소련군 포로를 획득했다. 파블로프와 달리 부죤늬는 러시아 혁명전쟁 때의 전설적인 명성과 스탈린과의 친분 덕분에 처형을 면하고 군적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이후 야전 지휘에 나서지 못하고 후방 업무에만 전념해야 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의 거듭된 전투로 인해, 나치 독일군 수뇌부는 겨울이 오기 전에 소련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일례로 나치 독일 육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는,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2주 정도면 소련에게 항복을 강요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에서와 달리, 소련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연패를 거듭하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나치 독일군이 수백만 명의 소련군 병력을 와해시키며 광대한 소련 영토를 점령했지만, 소련군의 전쟁 지속 능력과 의지를 와해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패전을 거듭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전쟁을 위한 역량을 강화시켜 갔다. 소련군은 거듭되는 패전 속에서도 그 전훈 및 정치적 이유로 인해 폐기된 투하쳅스키의 옛 전술교리 등을 활용하여, 각 제대(諸隊)의 체계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공세를 핵심으로 하는 제파식 전술이라는 소련군만의 독창적인 전술교리를 개발해 나갔다.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Гео́рг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Жу́ков, 1896-1974)와 같은, 투하쳅스키가 양성했던 자질이 우수한 장교들이 이를 주도했다. 대숙청의 피바람을 피해 가는 데 성공했던 주코프는 엄격한 교육훈련을 통해 적어도 자기 휘하의 부대들을 강병으로 육성하는 데 성공했고, 할힌 골 전투는 물론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등지에서도 병력을 지휘하여 나치 독일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거나 격퇴한 명장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대숙청으로 투옥된 유능한 장교들도 군에 복귀했다. 사형수 신분에서 군적에 복귀한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Рокоссо́вский, 1896-1968)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고문 후유증으로 발에 장애까지 입었던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뿐만 아니라 독-소 전쟁 전반에 걸쳐 눈부신 전공을 세웠고, 원수로 진급하여 독-소 전쟁 종전 기념행사에서 주코프와 더불어 소련군 사열을 지휘하는 영광까지 누렸다. 군수물자와 장비를 생산할 산업시설들의 우랄 등 후방 지역으로의 소개(疎開)도 이루어졌다. 기초 군사훈련을 이수한 1천만 명 이상의 소련 남성들은 전쟁으로 인한 병력 손실을 충원하는 자원이 되었다.
반면 나치 독일군은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전력이 약화되며, 작전한계점을 향해 치닫는 형국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소련군을 상대로 거둔 수많은 전술적 승리는 소련군의 와해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그 과정에서 나치 독일군 역시 적지 않은 병력과 장비를 손실했다. 손실한 병력과 장비의 충원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보급에도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전황은 점점 나치 독일군에게는 불리하게, 소련군에게는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군은 이처럼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수백만 명에 달하는 규모의 소련군 병력을 와해시키며, 광대한 소련 영토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최종 목표였던 모스크바 함락에 결국 실패했고, 소련을 정복한다는 바르바로사 작전 또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는, 소련의 지정학적, 군사 지리학적 여견 및 요인과도 적지 않은 관계가 있었다.
우선 소련의 종심은 프랑스보다도 월등히 깊었다. 앞서 작성한 글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나치 독일 동부 국경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서부 국경에서 파리까지의 거리에 비해 수 배 이상 길었다. 즉, 종심이 월등히 깊었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군 주력을 조기에 신속히 마비시키고 격파하여 프랑스의 전쟁 지속 능력과 의지를 와해시키는 데 성공했던 '전격전의 신화'가 소련에서는 되풀이되지 못했다. 소련군은 개전 초기에 도합 수백만에 달하는 전사상자와 포로를 발생시키며 나치 독일군에게 패퇴를 거듭했지만, 이것이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 마비 및 와해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소련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패퇴를 거듭하면서도, 손실한 부대를 보충하는 데 성공하며 저항을 이어갔다. 소련군의 저항은 나치 독일군의 전력 역시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전투에서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거듭했던 나치 독일군이었지만, 소련의 전쟁 지속 능력과 의지를 마비, 와해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되는 전투는 결국 나치 독일군의 전력과 사기까지 소모시키며 작전한계점만 앞당기는 결과를 야기했다. 반대로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의 손실이 누적되는 동안 전열을 정비하고 전술교리를 개선하는 등의 시도를 할 수 있었다.
나치 독일군의 공세가 남북으로 분산된 것도 작전 수행에 악영향을 미쳤다. 우크라이나 일대는 교통과 자원의 요충지였고, 나치 독일로서는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와 자원 확보라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지역이었다. 하지만 종심 깊은 소련에 대한 침공을 남북으로 이어진 긴 경계선으로부터 침공해 들어간다는 계획은, 나치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켜 작전의 최종 목표인 모스크바의 조기 점령에 차질을 가져올 소지도 컸다. 게다가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의 주공이 우크라이나 등 남서쪽을 향할 것을 예상하고, 이 일대에 많은 병력과 장비를 배치해둔 터였다. 만일 나치 독일이 우크라이나 일대를 과감히 포기하고 모스크바 방면에 전력을 집중했더라면, 프랑스 침공 작전에서 그랬듯이 모스크바 점령에 성공하여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마비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치 독일은 프랑스 침공 작전 때와는 달리 광범위한 전역에서 소련 침공을 감행했다. 남부 집단군이 소련군 남서 전선군을 포위 섬멸하며 키예프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 승리가 소련군의 전력에 큰 손실을 주기는 했을지언정 소련의 전쟁 지속 능력과 의지의 붕괴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소련은 전쟁 지속에 필수적인 군수 및 산업 시설의 상당 부분을 우랄 등 종심 깊숙한 후방으로 이전하는데도 성공했다. 후방에 새로 이전된 군수, 산업 시설은 비록 열악한 환경 속에서의 생산 활동을 강요당했지만, 군 장비와 군수물자의 생산과 보급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곳에서 군수물자와 군장비가 지속적으로 생산되면서, 소련군은 나치 독일과의 전투에서 입은 막대한 손실을 어느 정도 보충하면서 전쟁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나치 독일군이 소련 영토로 종심 깊이 진격하면서, 보급 및 작전상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은 나치 독일 수뇌부의 예상보다도 더욱 길어졌고, 그러면서 보급 문제와 병력의 이동 및 기동 문제도 심각해져 갔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독일 전차부대'의 이미지와 달리, 2차대전 중 나치 독일군의 기계화 및 차량화 수준은 상상 이상으로 낮았다. 전차부대는 충분한 기동력을 확보했지만, 전차부대와 함께 행동해야 할 보병들은 상당수가 도보 행군 또는 군마를 활용한 수송에 의지했다. 군수물자 수송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련의 철도는 나치 독일의 철도와 규격이 달랐기 때문에, 철도를 이용한 물자 및 병력의 수송 역시 크게 제약되었다. 이로 인해 전선이 길어질수록 보급 문제는 물론, 병력의 진격에까지도 차질이 빚어졌다. 게다가 겨울이 다가오면서, 나치 독일의 항공기, 전차 등의 가동률도 크게 저하되었다. 항공기나 전차 등은 정밀한 기계였기 때문에 정비 소요가 컸는데, 혹한기에는 정비는커녕 장비의 가동에도 제약이 따랐다. 반면 소련군은 자국 영토 내의 보급 및 정비 시설을 활용하면서 혹한기에도 항공기, 전차 등을 충분히 정비, 운용할 수 있었다.
스탈린의 모스크바 사수 결의는 소련 국민과 군인들의 사기를 크게 고양시키며, 모스크바 20-30km 지점까지 진격한 나치 독일 중부 집단군의 공세로부터 모스크바를 결국 지켜내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나치 독일군의 모스크바 진격은 다수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피난을 준비하는 등, 큰 충격과 동요를 야기했다. 이는 모스크바 시민은 물론, 소련군 장병들과 소련 국민들의 사기에도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쳤다. 모스크바가 함락은, 소련의 전쟁 지속 능력을 크게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소련의 패망을 상징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40년 11월 7일 붉은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스탈린은 장병들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날 스탈린은 자신이 모스크바를 버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나치 독일의 침략자들을 반드시 물리칠 것이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스탈린은 특히 이 연설에서 공산주의 이념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러시아와 소련의 국토를 지켜낸 역사적 인물들-제정 러시아 인물 포함-을 언급하며 나치 독일에 대한 승리의 확신을 역설했다. 소련 국민들의 역사적 정체성과 자긍심, 그리고 국토애를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이는 소련 국민과 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고취했을 뿐만 아니라,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목표였던 모스크바를 함락을 목전에 둔 위태로운 거점에서 소련 군민의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의 중심지로 변모시키는 효과까지 가져왔다. 아래에 인용한 스탈린 연설문, 그리고 모스크바 전투에서 불려졌던 군가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 가사의 일부는, 모스크바라는 장소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를 잘 보여 준다.
우리는 희망을 담아 우리 고향인 이 도시를 건설했다. 조국의 영토를 폐허로 만든 적들에게는, 우리의 처절한 응징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사랑하는 모스크바는 소중한 도시이다. 불파의 장벽을 세우고 철통같이 방어하여, 적을 궤멸하고 격퇴하자!(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 가사 중 일부)
... 작금의 우리나라는 23년 전(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8년을 말함)보다 산업, 식량, 원자재 측면에서 훨씬 유리한 상황입니다. 우리에게는 독일 침략자에 함께 맞서는 동맹자들이 있습니다. 히틀러의 압제 하에 신음하고 있는 유럽 인민들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울 정강한 육해군 장병들이 있습니다. 식량과 물자, 군복은 충분합니다. 조국의 전 인민이 육해군을 지원하며 그들이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 무리들을 격파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소련의 인적 자원은 소진되지 않습니다. 위대한 레닌의 정신과 승리의 깃발이, 23년 전에도 그랬듯 여러분을 대조국 전쟁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독일 침략자를 격퇴할 수 있다는 확신에, 누가 의문을 던질 수 있을까요? 우리 붉은 군대 육군과 해군 장병 동지 여러분, 지휘관과 정치위원 동지 여러분, 파르티잔 동지 여러분, 전 세계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독일의 침략자 무리들을 격파해 줄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독일 침략자들에게 노예 신세로 전락한 유럽의 인민들은 여러분이 그들의 굴레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조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드미트리 돈스코이, 쿠즈마 미닌, 드미트리 포자르스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미하일 쿠투초프의 업적을 떠올려 보십시오. 위대한 레닌이 승리의 깃발을 들고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스탈린 연설문의 일부)
1941년 12월, 모스크바를 목전에 둔 나치 독일군 중부 집단군의 공세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병력과 장비의 손실, 그리고 보급 부족에 시달리던 중부 집단군이 작전한계점에 접어들었던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모스크바를 방어하던 소련군은, 재편성된 서부 전선군 사령관이자 모스크바 방어 작전의 총책임자였던 주코프 대장의 지휘 하에 본격적인 역습을 시작했다. 신설된 칼리닌 전선군(사령관 이반 스테파노비치 코네프(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Конев, 1897-1973) 중장)과 서부 전선군 병력을 중심으로 한 소련군은 병력 약 11만 명에 770여 대의 전차와 7,600여 문의 화포를 보유하여, 170여만 명의 병력과 화포 약 13,500문, 전차 약 1,170대를 보유했던 나치 독일 중부 집단군에 비해 외형적인 전력 측면에서는 부족했다. 하지만 나치 독일 중부 집단군은 상기한 바와 같이 누적된 손실과 보급 문제로 인해 사실상 작전한계점에 다다른 상태였다. 소련군은 12월 5일 중부 집단군을 대상으로 대공세를 감행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소련군의 공세에 직면한 데다 월동 준비의 미비와 보급의 부족이라는 내부적인 어려움까지 떠안고 있었던 중부 집단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곳곳의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목전까지 진출했던 중부 집단군 병력은 소련군의 공세에 결국 퇴각해야 했고, 중부 집단군 예하 제34군단은 포위 섬멸당하고 말았다. 나치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 하인츠 구데리안 휘하의 제2기갑군 역시 소련군의 집중적인 공세를 받아 퇴각해야 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소련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했지만, 결국 목표 달성에 실패한 채 종료되고 말았다.
안슐루스에서 프랑스 전역에 이르기까지 연전연승을 거듭해 왔던 나치 독일에게, 모스크바에서의 퇴각과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는 중대한 충격으로 다가갔다. 히틀러는 동부전선에서의 후퇴를 요청했던 폰 룬드슈테트, 구데리안 등의 지휘관은 물론,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Heinrich Alfred Hermann Walther von Brauchitsch, 1881-1948)까지도 해임하였다. 히틀러는 폰 브라우히치를 해임한 다음 자신이 육군 총사령관 직책을 겸임하면서, 무리한 현 위치 사수 명령을 공식화하고 작전상 후퇴와 예비 방어선 구축 등에 대한 논의조차도 금지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는 나치 독일군의 인적, 물적 자원을 소모시켰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현실에 맞지 않는 무리한 명령을 군부에게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계기가 되면서 나치 독일의 패망을 결과적으로 앞당기고 말았다.
히틀러의 실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1941년 12월 말에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지자, 히틀러는 미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전부터 적대관계를 이어온 두 나라였지만, 1년 반 전에 프랑스라는 서쪽의 강적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던 히틀러는 이제 대서양 너머의 더욱 거대한 적을 만들고 말았다. 정작 미국을 공격했던 일본은, 소련과 중립 조약을 맺고 아무런 적대 행위도 가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나치 독일의 대미 선전 포고는 미국의 연합국 참여와 소련과의 동맹 체결로 이어졌고, 미국으로부터의 막대한 물자와 장비 지원 덕택에 소련군의 전투력과 전투 지속 능력은 더한층 강해졌다. 히틀러는 별다른 이득도 없이, 대서양 너머에 거대한 적을 추가했을 뿐만 아니라 이 적으로 인해 동방의 소련이라는 강적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는 어리석음을 번한 셈이었다.
한편 모스크바에서 나치 독일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 스탈린 역시, 그 성공에 취해 간과하기 어려운 군사적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스탈린은 주코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42년 1-3월에 걸쳐 소련군으로 하여금 동부전선 전역에 대한 공세를 명령했다. 하지만 소련군의 전력은 나치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기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여전히 부족했다. 무리한 공세는 소련군에게도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일례로 스탈린은 레닌그라드 방면의 볼호프 전선군(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 대장)에게 레닌그라드 남부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볼호프 전선군은 예하 제2충격군이 전멸하는 피해를 입은 채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심지어 모스크바 전투의 영웅이었던 제2충격군 사령관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블라소프(Андрéй Андрéевич Влáсов) 중장은, 나치 독일군에게 항복한 뒤 그들에게 협력하여 소련군 포로들로 나치 독일군 부대인 구성된 자유 러시아군을 창설하기까지 하였다-종전 후 그와 자유 러시아군 장병들은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스탈린의 무리한 공세는 결국 3-4월에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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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assner, M., and Fahrer, C., 2004, Political Geography(Third Edition), Hoboken, MJ: Wiley.
Glanz, D. M., and House, J. M., 1995,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 University Press of Kansas(권도승, 남창우, 윤시원 역, 2007, 독소전쟁사: 붉은군대는 어떻게 히틀러를 막았는가, 열린책들).
Guderian, H. W., 2003, Guderian: Erinnerungen eines Soldaten, Stuttgart, Germany: Motorbuch Verlag(이수영 역, 2014, 구데리안: 한 군인의 회상, 길찾기).
Weinberg, G. L., 2005, A World at Arms: A Global History of World War , Part : The World Turned Upside Down, Second Edition,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홍희범 역, 2016, 2차세계대전사: 1권 뒤집어진 세상, 이미지프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