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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Aug 19. 2020

실패한 바다사자 사냥: 영국 본토 항공전의 지리학

영국 본토 항공전을 지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나치 독일은 1940년 5-6월에 걸쳐 불과 40여 일 만에 프랑스를 정복했다. 이제 유럽에 나치 독일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프랑스 정복으로 나치 독일이 서유럽을 장악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영국이 엄연히 건재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의 침공에 대비하여 프랑스에 약 30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던 영국군은, 됭케르크(Dinkirk)에서 전력을 대부분 유지한 채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영국과의 강화가 가능하다는 근거 없는 믿음에 심취해 있던 히틀러는, 강화를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다 됭케르크의 영국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영국은 비록 최전성기는 지났다고는 하나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고 수준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해외 식민지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 폴란드 망명정부, 노르웨이 왕실, 네덜란드 왕실 등도 영국에 망명하여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을 이어 갔다.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영국을 무력화해야, 자국의 팽창과 레벤스라움의 확보도 순조롭게 이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히틀러로서는 결국 영국 침공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술이나 군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현대전은 보병이 아닌 공군과 첨단 무기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걸프 전쟁(1991)과 이라크 전쟁(2003) 등을 다룬 언론 매체의 보도는, 현대전은 스텔스 전폭기와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이 수행한다는 인식이 퍼지는데 일조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 사용된 스텔스 전폭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등의 최첨단 무기는, 이라크의 대통령궁, 방송통신 시설, 정부나 군부의 최고 의사결정 시설 등 문자 그대로 '고가치 표적'을 제압하기 위해 사용된 것들이다. 당연히 전장에서는 보병과 기갑부대, 포병이 '재래식' 전투를 벌였다. 무엇보다 미국과 그 동맹군들은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수행을 위해 첨단 무기 외에도, 수십만 명의 지상군 병력을 투입하였다. 지상군, 그중에서도 보병이 있어야 전장을 장악하고, 적군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전장이라는 지리적 공간에 강력하고 정확한 화력을 투사하여 적군의 지휘 체계를 마비시키는 일은 첨단무기가 수행할지라도, 전장을 장악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역할은 여전히 보병을 비롯한 지상군의 몫이다. 다시 말해서, 공군과 첨단 무기로 적의 전력을 약화시키거나 마비시키는 것은 현대전에서는 상식에 해당하겠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전쟁의 승리를 유지하는 일은 여전히 지상군의 몫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영국을 오로지 공군력만으로 항복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다. 현대전의 관점에서 보아도 어불성설일 계획을, 나치 독일은 무려 80년 전에 시도했던 셈이다. 물론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번 장에서는 나치 독일이 공군력만으로 영국을 굴복시키려는 수단에서 비롯된 영국 본토 항공전을, 지리학의 관점에서 풀어 가도록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영국은 섬나라이다. 영어에서 유럽 대륙의 문화나 제도 등을 대륙을 의미하는 'continental'이라는 형용사로 표현하는 이유도 바로 이 같은 지리적 요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영국은 전통적으로 육군보다도 해군에 많은 투자를 했다. 특히 영국이 해양 제국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17-8세기 이후에는, 해외 식민지의 유지와 확대를 위해 특히 강력한 해군을 육성하였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을 바탕으로 네덜란드, 프랑스, 에스파냐 등 경쟁국들과의 해상에서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뒷받침했던 대규모의 해외 식민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영국의 해군은 국토방위에도 필수적이었다. 강력한 해군력으로 적국의 상륙을 저지하면, 국토방위를 충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588년에는 에스파냐의 영국 침공군을 태웠던 무적함대를 해상에서 격파하여 그들의 영국 침략 시도를 좌절시켰으며, 나폴레옹 역시 영국 해군 때문에 결국 영국을 복속하는데 실패하고 이는 나폴레옹 제국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프랑스를 한 달여만에 굴복시킨 나치 독일군이었지만, 영국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영국 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송 선단은 물론, 이를 호위할 해군 전력도 필요했다. 육군은 당연히 바다를 건널 수 없고, 항공기를 통한 수송은 소규모의 특수부대나 분견대 정도의 병력이면 모를까 대규모 병력과 중장비의 운송에는 뚜렷한 한계를 가졌다. 이에 따라 나치 독일은 영국 본토에 지상군 70만 명을 상륙한다는 계획인 바다사자 작전(Unternehmen Seelöwe)을 입안하였다. 영국이 전통적으로 사자를 자국을 상징하는 동물로 사용해 온 전통에 착안한 작전명이었다.


  바다사자 작전이 개시된다면 영국의 운명도 풍전등화에 처할 운명이었다. 영국은 섬나라라는 지정학적 특성상 육군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데다, 폴란드와 프랑스를 차례로 정복하며 질적,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나치 독일군의 전력은 영국 육군으로서도 상대하기 곤란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해군이었다. 영국 본토에만 수 척의 전함과 항공모함을 비롯한 강력한 해군 전력을 확보했던 영국과 달리, 애초부터 부실했던 나치 독일 해군은 노르웨이 전역에서 사실상 전력이 와해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잠수함 전력이 건재했지만, 잠수함만으로 강력한 영국 해군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최신 전함인 비스마르크급 전함 2척이 완공되고 노르웨이에서 손상을 입은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척까지 현역에 복귀한다면 나치 독일은 전함 4척을 보유하겠지만, 이들의 현역 취역 및 복귀까지는 여전히 적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었던 데다 항공모함은 전무했고 순양함, 구축함 등 전함을 보조할 수상 함대 전력 역시 크게 부족했다. 야심 찬 바다사자 작전이었지만, 낫질 작전과 달리 이 작전은 애초에 물리적으로 현실성이 부족했다. 제해권을 확보하기는커녕 현실적으로 가용한 수상 함대 전력조차 없어지다시피 한 상황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했다가는, 대규모의 병력과 장비를 영국 해협에 수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치 독일군의 바다사자 작전은, 영국 해협 일대의 제해권 확보가 전제되어야 실천에 옮겨질 수 있었다.(출처: 위키피디아)

  이 기회를 잡은 인물은, 나치 독일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 1893-1946)이었다.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1차대전의 전쟁 영웅이었던 그는 사교계에서의 명성과 정치 수완을 발휘하여 히틀러가 정권을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공군 원수도 아닌 제국 원수(Reichsmarshall)라는 나치 독일군 내부에서도 유일무이한 계급의 소유자였던 그는 정치적 야심이 남달랐다. 그리고 프랑스 함락 직후, 그리고 영국 본토 항공전 직전에 일어난 영국군 및 연합군의 됭케르크 퇴각은, 나치 독일 수뇌부에서도 영향력이 특히 컸던 괴링의 명성과 발언권에 적잖은 흠집을 남겼다. 괴링 휘하의 나치 독일 공군은, 퇴각하는 영국군 및 연합군 병력과 이들을 수송하는 영국 수송선단을 섬멸하기는커녕 그들이 전력을 사실상 온존한 채 무사히 퇴각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괴링은, 바다사자 작전이 사실상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을 연합군의 됭케르크 퇴각 성공으로 인해 빚어진 자신의 오점을 씻고 자신과 나치 독일 공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였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공군이 5주 이내에 영국 공군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으며, 나치 독일 공군이 영국 공군에 이어 해군력까지 무력화한다면 육군 병력의 영국 본토 상륙도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치 독일 공군이 영국 침략의 선봉에 서서 영국 공군과 해군을 무력화할 수 있다면, 나치 독일군 내부에서 공군의 위상이 육해군을 압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입지 또한 히틀러 외에는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을 정도로 탄탄해지리라는 것이 괴링의 계산이었다.

히틀러(좌)와 괴링 가족. 괴링은 1차대전의 영웅이자 히틀러 집권의 공신이었지만, 2차대전기 공군 통수권자로서 무책임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출처: The Telegraph)

  영국 본토 공습을 개시했을 때, 나치 독일은 여러 측면에서 우세-괴링의 허장성세를 논외로 하더라도-를 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치 독일은 국력과 전력 면에서 월등히 강했던 프랑스를 40여 일 만에 정복한,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둔 상태였다. 승기를 잡고 있었고, 사기도 충천해 있었다. 반면 영국은 프랑스 전역에서 30만 영국 원정군이 됭케르크에서 간신히 탈출해 왔으며, 노르웨이에 이어 강력한 동맹국인 프랑스를 잃고 말았다. 유럽 대륙에서 나치 독일을 견제할 실질적인 장소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소련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나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사실상 동맹인 상태였고, 공산국가였던 소련과 반공주의를 견지한 영국이 상호 원조를 한다거나 동맹을 맺는 일을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이탈리아는 애초에 일본과 더불어 삼국동맹의 일원으로 나치 독일의 핵심적인 동맹국이었다. 에스파냐 역시 중립국이면서 친독 성향의 파시즘 국가였기 때문에, 영국이 기댈 만한 국가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함락은 영국의 제해권에도 중대한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과 공조하면서 특히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프랑스의 항복은 영국 입장에서도 중요성이 컸던 지중해 방면의 제해권에 중대한 공백을 야기하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지원 역시 물자 지원 정도에 그쳤다. 사실상 영국은 유럽에서 지리적으로 고립된 셈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는 대부분 건재했지만, 유럽 전역이 나치 독일의 영향력 아래 떨어지고 식민지와 영국 본토를 잇는 수송로가 나치 독일 해군의 잠수함에 의해 교란되기라도 한다면, 영국은 고사(枯死)할 운명에 처할 상황이었다.

 나치 독일의 공군은 외적인 측면에서 영국 공군에게 우세하다고 여겨질 만하기도 했다. 나치 독일 공군은 폴란드와 노르웨이, 프랑스에서는 물론, 에스파냐 내전-피카소의 명화 “게르니카”가 바로 에스파냐 내전에서 나치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은 에스파냐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의 참상을 표현한 작품이다-에서부터 실전에 참전해 오면서 실전 경험을 축적해 왔다. 그리고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 공군은 기갑부대와 더불어 전격전의 주역으로 나치 독일의 조기 승리에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급강하 폭격기인 Ju-87D 슈투카(Stuka)는 급강하를 통해 목표물에 정확하게 폭탄을 투하하여 수많은 프랑스군 전차와 토치카 등을 파괴하면서 프랑스군의 사기와 전의를 꺾었고, 프랑스군은 이 항공기가 급강하할 때 나는 소음을 듣기만 해도 ‘여리고의 나팔(구약성서에서 여호수아가 불어서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다고 전해지는 나팔)’이 들린다며 혼비백산할 정도였다. 게다가 나치 독일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의 수는 영국 공군의 2배에 달할 정도였다. 영국 본토 항공전 개전 당시 영국 공군과 해군항공대의 가용 항공전력이 600대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던 반면, 나치 독일은 영국 전선으로 1,300대 이상의 항공기를 동원한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은 괴링과 히틀러가 공군력만으로 영국의 전의와 전투수행능력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갖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히틀러와 괴링의 자만은 여러 가지 중요한 요인들을 간과한 오판이었고,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나치 독일이 결국 패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영국과 나치 독일이 가졌던 지리적 여건과도 중요한 연결고리를 가진다.

  영국은 히틀러의 비현실적인 낙관론과는 달리,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거나 강화를 맺을 의도가 전혀 없었다. 특히 1930년대에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게 지나친 유화책으로 일관하며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무혈 점령당하고 폴란드마저 나치 독일과 소련에게 점령되는 결과를 야기했던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 1869-1940)은, 이로 인한 여론 악화로 인해 1940년 5월에는 사임해야 했고 대독일 강경파였던 윈스턴 처칠이 후임 총리 자리를 이어받았다. 처칠 개인의 성향도 성향이지만, 그가 체임벌린을 교체하고 신임 수상에 취임했다는 사실은 애초에 영국 국민들이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거나 타협할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 준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처칠 휘하에서 영국 공군을 지휘했던 휴 다우딩(Hugh Caswall Tremenheere Dowding, 1882-1970) 역시 처칠 못지않게 나치 독일의 침공을 격퇴하겠다는 결의가 완고하리만치 강했다.

철모를 쓰고 집무실에 앉은 처칠 수상. 나치 독일에 대한 확고한 항전 의지를 보여 준다.(출처:  UPI)

  영국인들의 이 같은 전의를 무력화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지상군을 투입을 통한 저항의 근거지를 점령 및 소멸이었다. 공습으로 인해 인명과 재산, 인프라에 큰 손실을 입더라도, 영토가 존재한다면 얼마든지 저항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대규모의 공습으로 북베트남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도 결국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도, 걸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과 그 연합군이 대중매체에 보도된 이미지와 달리 대규모 지상군을 파병하고 주둔시킨 이유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애초에 영국의 영토를 그대로 둔 채 공습만으로 영국의 전의와 전투수행 능력을 마비시켜 승리를 거둔다는 구상 자체가, 괴링의 허장성세와 달리 현실성이 담보되기 어려운 아이디어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항공 병력만으로 영국을 항복시키려면,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전제되어야 했다. 첫째, 영국의 방공능력이 나치 독일 공군에게 의미 있는 위협이 되지 못할 정도로 약해야 했다. 적지를 침투하는 군용기에게 적군의 방공능력은, 요격해 오는 적기 이상으로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선 적의 레이다나 조기경보관제기 등에게 위치를 탐지당한다면, 기습은커녕 적기에게 요격당하거나 적의 방공망에 격추당할 우려가 매우 커진다. 오늘날 공군기들이 스텔스화를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지상에 매복해 있는 대공포화의 위험성은 적지에 침투하는 군용기에게는 치명적이다. 대공포화는 그 특성상 어디서 날아올지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트남전에서 미 해군과 공군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현저히 열세였던 베트남군을 상대로 심각할 정도의 손실을 입은 주요한 원인은, 바로 북베트남군이 대규모로 운용했던 대공포와 지대공 미사일 등의 대공화기였다. 대공화기가 화망을 형성하면 군용기는 회피기동을 통해 격추를 모면할 수는 있지만, 극도의 견제를 받기 때문에 당초 계획했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이처럼 방공망은 군용기의 임무 수행에 지극히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 각국의 공군은 방공망 제압(Suppression of Enemy Air Defence, SEAD)을 위한 첨단 장비를 개발하고 공군의 임무 수행에 앞서 방공망 제압 임무를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즉, 공군은 지상 병력에게 반드시 절대적인 우세만을 점하지는 않으며, 지상의 방공망이 제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군의 임무수행은 극도의 위험성이 따르고 임무의 성공 가능성 역시 크게 떨어진다. 따라서 공습만으로 영국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려면 영국의 방공능력이 미미한 수준이었거나, 아니면 영국의 방공망을 확실하게 제압 및 무력화할 방안이 강구되어 있어야 했다.

  둘째, 영국 공군기를 격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영국 공군이 공중전에서의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산업 능력 및 경제력을 무력화하는 일이었다. 나치 독일 공군이 영국 공군 전투기를 우수한 교환비로 격추시키더라도, 영국 공군이 전투기와 조종사를 빠른 속도로 충원한다면 전투에서의 전술적 승리 차원을 넘어선 전쟁에서의 승리는 요원한 일이었다. 이렇게 하려면 단순히 영국 공군기 격추와 지상 폭격을 넘어, 공군력의 충원과 재생을 근원적으로 차단할 수단의 모색이 필수적이었다.

  셋째, 영국 공군의 질적 수준이 나치 독일 공군보다 현저히 떨어져야 했다. 그래야만 나치 독일 공군이 영국 공군의 반격을 확실하게 제압하고 영국의 저항 의지와 능력을 무력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 공군이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의 제공권을 확보할 수 있었던 데는, 폴란드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기량은 충분했지만 전투기의 대수가 부족했던 데다 그중 상당수는 노후화된 구형 기체였다는 요인도 자리 잡고 있었다. 만일 폴란드군이 신형 전투기를 충분히 구비했더라면, 폴란드 침공의 양상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국 공군이 양적으로 나치 독일에 비해 부족했다고는 하지만, 나치 독일이 자국 상공에서 싸우는 영국 전투기들을 확실하게 제압하려면 나치 독일 공군의 질적 수준도 영국 공군을 현저하게 압도할 정도가 되어야 했다. 본토 상공에서 싸울 영국 공군 조종사들과 달리 나치 독일 공군 조종사들은 영국 해협을 건너 적지 상공에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신체적인 피로나 심리적인 압박감이 더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 활동에서도 많은 제약-연료 문제 등-을 받았다. 이는 다른 조건들이 동일하다면 나치 독일 공군 조종사들이 영국 공군 조종사들에 비해 불리한 여건에서 싸워야 했음을 의미한다.

  넷째, 바다사자 작전이 실현에 옮겨지지 못했던 까닭은 바로 해군력 때문이었다. 비록 프랑스에서 연합군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패배에 직면했다고는 하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해군 및 수상 함대 전력을 여전히 보유했던데 반해 나치 독일은 수상 함대 가용 전력이 사실상 없다시피 한 상태였다. 게다가 나치 독일은 프랑스의 해군 전력을 제때 접수하지 못했다. 나치 독일은 프랑스 해군이 보유했던 함정들 가운데 소수만을 노획할 수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전함이나 항공모함, 중순양함 등 제해권 확보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대형 함선은 포함되지 않았다. 프랑스 해군 전력은 주로 지중해 방면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해군에 노획되거나 비시 정부에 속한 전력도 있었지만, 자유 프랑스 정부 등으로 넘어간 전력도 있었다. 심지어 영국은 프랑스 해군 전력이 나치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노획될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1940년 7월 캐터펄트 작전을 실시하여 북아프리카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 해군의 주력 함정들을 격침하기까지 했다. 이 같은 상황은, 나치 독일이 공군력으로 영국을 무력화하려면 무엇보다도 공군력을 동원하여 영국의 해군, 그중에서도 수상 함대 전력을 무력화하거나 적어도 확실하게 제압할 필요가 절실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현실은 괴링의 허장성세에 가까운 과도한 낙관론과는 달랐다. 비록 영국 공군과 해군항공대가 보유했던 항공전력의 규모가 내 독일에 비해 열세였다고는 하나, 나치 독일 공군에게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붕괴될 정도로 취약하지는 않았다. 영국 공군과 해군항공대는 무엇보다도 자국 영토에서 싸우는 입장이었다. 즉, 영국 항공전력은 익숙한 공역에서 지상의 항공관제 및 방공전력의 엄호를 받으며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연료나 작전반경 측면에서도 여유로웠다. 반면 나치 독일 공군 조종사들은 자국 영공이 아닌, 적국 영공 깊숙이 침투하여 영국 항공전력과  맞서야 했다. 적진으로 침투해야 하는 만큼 작전반경 및 시간에서 영국 조종사들과 달리 확연한 제약이 따랐다. 자국의 항공관제나 방공포 전력으로부터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고, 영국 전투기의 요격뿐만 아니라 영국군의 방공망이라는 또 다른 위협에도 노출된 상황이었다.

나치 독일 공군기의 접근을 거부하기 위해 런던 상공에 띄어놓은 비행선|(출처: 위키피디아)

  영국 상공에서의 공중전이라는  지리적 특성은, 영국과 나치 독일 양국이 공중전에서 입을 손실의 무게 또한 차별화시켰다. 영국군 전투기가 전투 중 격추당하거나 불시착할 경우, 조종사가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다면 고급 인력인 전투기 조종사의 손실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탈출에 성공한 영국군 조종사는 얼마든지 전선에 복귀-일정 기간의 요양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하여 또다시 나치 독일과 싸울 수 있었다. 항공기의 손실을 무시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조종사 양성에는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데다 축적된 실전 경험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조종사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전술적으로는 물론 전략적으로도 큰 이점이었다. 전투기가 손상을 입더라도 불시착이나 귀환에 성공한다면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반면 적국 상공에서 싸워야 했던 나치 독일 공군 전투기와 폭격기의 손실은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한 번 손실을 입은 나치 독일 공군기는 탈출하거나 귀환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손실을 입은 나치 독일 공군기는 설령 불시착이나 조종사의 탈출에 성공하더라도, 그대로 영국군에 노획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섬나라였기 때문에, 적지에 고립된 조종사를 구조할 수 있는 수단은 전무했다. 이런 식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종사를 상실하는 일은, 나치 독일 공군 전력의 약화로 이어졌다.

  게다가 영국 공군의 전력, 그리고 영국의 태세 역시 나치 독일군이 손쉽게 무력화할 정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영국군은 당시로서는 최신의 장비였던 레이다를 확보하고 있었다. 레이다는 원거리에서 다수의 적기를 동시에 실시간으로 포착할 수 있었다. 레이다가 제 기능을 한다면, 공습을 통한 기습의 효과는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나치 독일 공군기가 목표에 도달하기도 전에 영국군에 포착되므로, 영국군은 적시 적절하게 공습 대상을 보호하고 적기를 요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영국군 레이다의 탐지범위. 나치 독일 공군의 침투를 사전에 예측할 수 있었다.(출처: 위키피디아)

  영국 공군의 질적 수준도 나치 독일 공군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영국 공군의 주력 전투기는 슈퍼마린(Supermarine) 사가 개발한 스핏파이어(Spitfire)와 호커(Hawker) 사가 개발한 허리케인(Hurricane)이었는데, 이 중에서 스핏파이어는 나치 독일이 자랑하던 주력 전투기 Bf-109와 비교해도 성능적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며 선회성능 등은 이를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성능을 가진 전투기였다. 허리케인은 스핏파이어에 비해 성능이 떨어져 Bf-109와 대등하게 공중전을 벌이기는 어려웠지만, 스핏파이어보다 생산성이 뛰어나고 정비가 용이한데다 신뢰성도 매우 높았기 때문에 스핏파이어를 보조하면서 나치 독일 공군의 폭격기를 요격하기에는 충분한 성능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나치 독일의 공습에 대비하여 방공망도 충분히 구축해둔  상태였다. 여기에 덧붙여, 영국 공군과 해군항공대 조종사의 기량도 나치 독일 공군 조종사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나치 독일 공군 조종사들이 비록 실전 경험을 적잖게 쌓았다고는 하나, 나치 독일 공군은 사실상 1930년대에 와서야 재건이 이루어졌다. 교육훈련이나 교리 등의 측면에서 부족함도 적지 않았다. 영국 공군 조종사들의 교육훈련 수준은 나치 독일 공군 조종사들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았고, 항공 전술 교리 또한 지속적으로 발전해 온 상태였다. 덧붙여 영국 공군과 해군항공대에는 폴란드군과 프랑스군의 조종사, 그리고 영연방 국가였던 캐나다군의 조종사들도 전속 또는 배속되었다.

  나치 독일 공군 내부의 문제도 간과하기 어려웠다. 나치 독일 공군의 교리는 전략 폭격이 아닌 지상군의 지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공군기 역시 그러한 교리에 맞추어져 있었다. 즉,  지상의 목표물을 정확히 타격하는 급강하 능력이나 폭격 능력은 우수했지만, 장거리 작전 능력이나 대량의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나치 독일 공군은 폴란드나 프랑스 전역에서는 지상군-특히 기갑부대-과 보조를 맞추며 놀라울 정도의 전과를 거둘 수 있었지만, 영국 국토에 종심 깊게 자리 잡은 군사시설이나 산업시설 등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기에는 상대적으로 불리했다.

나치 독일의 급강하 폭격기 Ju-87D 슈투카. 연합군을 상대로 맹위를 떨쳤지만, 항속거리와 무장 탑재량이 부족하여 전략 폭격 임무에는 불리했다.(유용원의 군사세계)

  괴링을 비롯한 나치 독일 공군 수뇌부의 지휘에도 문제가 많았다. 3천대에 육박하는 항공기를 보유했던 나치 독일 공군의 전력이 세계 최대 수준이라고는 했지만, 영국 상공으로 침입하여 공중전과 폭격을 감행한다는 일에는 많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상기한 지리적, 지정학적 요건도 요건이거니와, 전쟁에서 공격자가 방어자에 비해 불리하다는 사실은 이론이나 담론이라기보다도 상식에 속하는 문제이다. 더욱이 섬나라인 영국을 육군, 해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공군력만으로 제압하려면, 그만큼 작전과 정보 수집, 보급 등의 측면에서 주도면밀하고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져야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은 영국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준비 태세가 소홀했다.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영국을 단기간 내에 무력화하겠다는 괴링의 허장성세와 달리, 나치 독일 공군은 전투기 생산 증가, 조종사의 교육훈련 강화 및 양성 증가, 첩보활동 강화 등과 같은 노력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프랑스에서의 기적적인 승리에 따른 자만도 자만이었거니와, 전략전술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했던 히틀러, 그리고 과거에는 전쟁영웅이었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에는 사실상 정치군인으로 변질된 데다 질병 치료 목적으로 복용한 모르핀에 중독되어 판단력까지 흐려진 괴링이 나치 독일 군부와 공군을 마치 사병 집단처럼 장악해 버린데 따른 악영향이기도 하였다.


  1940년 8월 13일, 나치 독일 공군은 영국 공습을 개시했다. 영국의 산업 및 군사 시설을 파괴하여 전쟁 지속 능력을 마비시킨다는 목적이었다. 나치 독일의 공습은 영국 남부 해안 지대의 군사 시설과 산업 시설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지만, 괴링의 허장성세와 달리 영국 공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영국 정부는 처칠과 다우딩의 지도 하에 나치 독일의 공습에 대한 준비를 해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나치 독일 공군의 기동은 영국군의 레이다에 의해 탐지되었고, 영국 공군기의 성능과 조종사의 기량은 나치 독일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데다 지상의 방공망으로부터 엄호까지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우딩은 공군 전력의 숫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자국 영공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항공 전력을 집중한 다음 순차적으로 계속해서 전투기를 발진시키는 방식으로 나치 독일의 공습에 대처하는 전술을 고안하였고 이는 효과를 거두었다. 9월 초순까지 영국군이 390여 대의 항공기를 손실한 반면, 나치 독일은 6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손실해야 했다. 격추되더라도 탈출에 성공한 영국군 조종사들은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던 반면, 나치 독일 공군기가 격추되면 조종사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영국은 후방의 전투기 공장에서 손실되는 항공기들을 지속적으로 보충하였다. 항속거리가 짧은 나치 독일의 폭격기들은 후방의 산업 시설 및 군수 공장들을 파괴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제해권을 확보한 영국은 해외 식민지, 동맹국 등으로부터 나치 독일과의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공습을 통해 영국의 군사 및 산업 시설을 초토화하여 전쟁 수행 능력을 마비시킨다는 애초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나치 독일 수뇌부는 공습의 목표를 런던으로 바꾸었다. 런던을 초토화하여 영국을 무력화한다는 아이디어였다. 이로 인해 런던 시내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러한 결정은 영국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무력화하기는커녕 더욱 강화시키는 패착으로 이어졌다. 런던 시가지는 파괴되었지만, 영국의 지도부와 시민들은 사전에 마련된 방공호, 심지어는 런던 지하철로까지 대피하면서 전쟁을 이어갔다. 지상군에 의한 런던 점령이 실행될 수 없었기 때문에, 건물과 시설은 파괴했을지언정 영국인들의 항전 의지와 나치 독일에 대한 적개심은 마비되기는커녕 마치 기름을 부은 듯 커져만 갔다. 영국 공군과 방공망에 의해 나치 독일 공군은 여전히 영국 공군보다도 더 큰 손실을 이어갔고, 후방의 군수 공장에서는 손실된 영국 공군기를 계속해서 보충했다. 공습 목표가 군사/산업 시설에서 런던으로 바뀌다 보니, 영국이 전쟁을 지속하는데 필수적인 군사 시설과 산업 시설의 피해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 공군의 공습은 영국 해군 전력에도 별다를 손실을 주지 못했다. 심지어 영국 공군은 역으로 베를린을 공습하기까지 하였다. 선전물을 살포하고 폭탄 몇 발을 투하하는 정도였지만, 영국 공군의 베를린 공습은 나치 독일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1940년 9월 13일, 공습으로 파괴된 런던 시내의 복구 현장을 방문한 영국 국왕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공주(현 엘리자베스 2세)(출처: BBC)

  1940년 10월에 접어들어, 나치 독일의 공습 능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영국 공군이 입은 손실보다도 나치 독일 공군이 입은 손실이 더 컸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전쟁 수행 능력 및 의지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0월 말 나치 독일은 영국 공습을 완전히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1,700여 대의 항공기를 상실한 반면, 나치 독일 공군은 2,000대에 육박하는 항공기를 상실했다. 1,500여 명의 영국 군민이 목숨을 잃었지만, 나치 독일 공군은 전사한 조종사의 수만 2,500명이 넘었고 1천여 명에 육박하는 또 다른 조종사들은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나치 독일은 프랑스에서 전격전을 통해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프랑스에 주둔했던 영국 원정군이 전력을 온존 한 채 영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게다가 제해권 확보는커녕 해군력이 사실상 무력화된 시점에서 공군력만으로 영국을 제압한다는 비현실적인 계획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소중한 공군 전력에까지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영국이 나치 독일의 공습을 격퇴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영국 군민의 일치단결과 영국 공군의 우수성, 처칠과 다우딩 등의 지도력 등, 그리고 나치 독일 공군 수뇌부의 무능함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의 경과는 지리적인 요인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치 독일이 영국을 무력화하려면 됭케르크에서 신속하게 영국 원정군을 격멸했거나, 아니면 항공 전력으로 영국의 산업 시설과 해군 및 수송 전력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무력화했어야 했다. 하지만 괴링과 히틀러는 이러한 지리적 요인을 충분히 살피지 못했고, 괴링의 정치적 야욕과 히틀러의 부족한 군사전략 및 지정학적 식견은 결국 나치 독일 공군 전력만 갉아먹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영국은 나치 독일의 침략 전쟁으로부터 서유럽을 사수하는 거점과도 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다. 영국에는 영국 정부와 국민은 물론, 프랑스, 폴란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의 망명정부 또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영국의 제압 또는 무력화에 실패한 채, 동쪽의 소련으로 총부리를 돌렸다. 나치 독일의 패망을 가져온, 독-소 전쟁의 시발점이었다.


참고문헌


Bishop, P., 2013, Battle of Britain: A Day-by-Day Chronicle in Great Britain, London: Quercus.

Mackay, R., 2002, Half the Battle: Civilian Morale in Britain During the Second World War, Manchester, UK: Manchester University Press.

Mosley, L., 1977, The Battle of Britain, Morristown, NJ: Time-Life Books.

Weinberg, G. L., 2005, A World at Arms: A Global History of World War , Part : The World Turned Upside Down, Second Edition,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홍희범 역, 2016, 2차세계대전사: 1권 뒤집어진 세상, 이미지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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