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의 배경에 대한 지리적 탐색
'마지노 선'이라는 용어는 '최후의 방어선', '최후의 보루'와 같은 뜻을 지닌 관용어로, 일상생활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이 마지노 선(Maginot Line)은 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선에 구축한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며, 정작 2차대전 초기에 나치 독일군의 침공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던 결과적으로 실패한 요새라는 사실 역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랑스는 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이었으며, 특히 육군 대국으로 명성을 떨쳐 왔던 나라였다. 하지만 그 명성이 무색하게도, 2차대전 초기였던 1940년 5-6월에 나치 독일의 침공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불과 40여 일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나치 독일 기갑부대와 기계화부대의 기동전 앞에, 마지노선을 앞세워 구시대적인 방어 전략을 고수했던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이 효과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마비'당해 버린 결과였다. 이후 나치 독일은 프랑스 영토의 북부를 자국의 직할령으로, 남부는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의 영토로 삼아 지배하였다. 프랑스인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또는 자국에 남아 레지스탕스 활동을 전개하면서 나치 독일의 지배에 저항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와도 격이 다를 정도의 강대국이었고 동맹군인 영국군의 지원까지 받았던 프랑스가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장에서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에 대한 배경을, 이어지는 장에서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 작전인 낫질 작전의 과정과 경과를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프랑스와 독일은 보주(Vosges) 산맥, 쥐라(Jura) 산맥, 라인 강 등을 기준으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두 나라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영토 문제나 정치적, 군사적 갈등 등이 적지 않게 일어났다. 일례로 17세기 초반 프랑스의 재상을 역임했던 리슐리외 공작(Armand Jean du Plessis Duc de Richelieu, 1585-1642)은 재상인 동시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일어난 가톨릭-개신교 간의 종교전쟁이었던 30년 전쟁(1618-48)에서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세력을 지원하였다. 유럽의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을 받는 독일의 가톨릭 세력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여 프랑스를 크게 위협할 대제국으로 성장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18세기 초반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프로이센을 격파한 뒤, 두 나라의 약체화를 목적으로 프로이센에게 극단적인 군비 제한을 강요하는 한편 독일 북부의 군주국들을 친프랑스 성향의 라인 연방(Rheinbund)에 가입하게 하여 명목상 존재하던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1806년)시켰다. 1870년에는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외교 전략을 통해 독일 통일의 방해 요인이었던 프랑스를 고립시킨 다음 선전포고를 했으며(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듬해 프랑스의 항복을 받은 프로이센은 프랑스로부터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지방을 획득하였다. 이후 1차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항복했을 때, 프랑스는 독일로부터 알자스-로렌 지방의 회복뿐만 아니라 유럽 최대의 산업 지대였던 루르(Ruhr) 지방, 그리고 자르(Saar) 지방까지도 요구하여 결국 자국 영토로 삼았다. 이처럼 20세기 중반까지 독일과 프랑스는 인접국으로서 수세기에 걸쳐 전쟁과 분쟁을 이어 왔으며, 이에 따른 영토의 변화와 그로 인해 초래된 양국 국민들 간의 적개심 역시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1차대전 내내 독일 제국군의 침공을 받으며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었다. 개전 초에 프랑스군을 조기 섬멸하여 항복을 받아낸다는 독일 군부의 계획(슐리펜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형성된 서부전선에서는 4년 가까이 지루하고 참혹한 참호전이 이어졌다. 1차대전에서 프랑스는 130만여 명의 병력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인적 손실을 입었다. 독일 제국은 심지어 1916년 프랑스군을 베르됭(Verdun)으로 집결하도록 유인한 뒤 소모전을 강요하여 프랑스군의 인적 자원을 고갈시킨다는 '사형장 작전'을 실시하기까지 했으며(베르됭 전투), 이로 인해 프랑스와 독일 양측에서는 각각 30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독일 제국과의 기나긴 총력전은 프랑스 국토, 특히 전장이었던 서부전선 일대를 황폐화시켰으며, 프랑스의 경제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프랑스의 인구 문제는 1차대전에 따른 프랑스의 상처를 더욱 심화시켰다. 프랑스는 1820-30년대부터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과거 유럽 최대의 인구 대국이었던 프랑스 인구는 정체되기 시작했다. 1820년대만 하더라도 독일(약 2,700만 명), 영국(약 1,000만 명)의 인구를 압도하던 프랑스의 인구(약 3,000만 명)는 이 무렵부터 성장세가 둔화되기 시작하였고, 1차대전 무렵의 프랑스 인구(약 3,900만 명)는 영국(약 4,600만 명), 독일(약 6,700만 명)보다도 크게 적은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1차대전으로 인한 인명 손실은 독일(사망자 약 2백만 명)보다도 프랑스에 더 심한 타격을 주었다. 사형장 작전의 배경도 이러한 인구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덩샤오핑, 저우언라이 등 중국 공산당의 창건 멤버들 중 다수가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차대전의 인력 손실로 인해 노동력 부족을 겪은 프랑스 정부가, 유학을 대가로 중국의 노동력을 대거 유치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알자스-로렌 등의 영토까지 상실했고, 게다가 1차대전에서 독일 제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는 패전국 독일에게 매우 가혹한 전쟁 배상을 강요하였다. 1차대전 종전 협정인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은 알자스-로렌의 프랑스 반환을 비롯하여 영토의 10% 이상을 상실했으며, 독일 1년 세수의 20-30배에 달하는 금액인 1,320억 마르크를 연합국에게 30년에 걸쳐 연합국에게 배상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루르, 자르 지방이 위치한 라인란트(Rheinland)는 프랑스군이 관할하는 비무장지대로 설정되었고, 루르, 자르 지방의 경제적 권리는 프랑스에게 귀속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영토 상실, 무거운 전쟁 배상금 등으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더욱이 1923년 프랑스군이 독일의 전쟁 배상금 납부 지연을 빌미로 벨기에군과 더불어 루르 지방에 군대를 진주시키면서, 독일인들의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은 극에 달했다. 1936년 나치 독일의 재무장을 확고화하기 위해 하틀러가 독일군 병력을 라인란트에 배치시킨 라인란트 진주(Rheinlandbesetzung)는, 베르사유 체제 하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 동유럽의 레벤스라움 확보를 시작하겠다는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정책과 전략의 첫 포석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20년대에 작사, 작곡된 노래로 나치당의 프로파간다로도 활용되었던 '자르는 독일이다(Deutsch ist die Saar)'라는 노래의 가사는, 베르사유 체제 하에서 비무장 지대가 된 자르 지방을 바라보던 독일인들의 시선을 잘 보여 준다.
자르는 독일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독일이다. 자르 강의 강변은 독일 땅이다. 그리고 독일은 영원한 내 고향, 내 나라, 나의 조국이다
독일인들 입장에서 프랑스는 영토, 그것도 알토란 같은 산업 요충지인 라인란트를 빼앗아 갔을 뿐만 아니라, 독일이 감당하기 어려운 막대한 배상금을 주도해서 요구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유럽의 레벤스라움 확보를 추구하던 나치 독일 입장에서, 서쪽의 강국 프랑스는 껄끄럽고 위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사실 프랑스와의 전면전을 원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의 존재로 인해 히틀러는 이들과의 전면전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후술할 프랑스의 방어 전략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게는 더욱 부담으로 다가갔다.
1차대전에서 독일 제국에게 승리를 거두고 독일의 '힘을 빼놓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독일은 프랑스에게도 방심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독일의 인구, 과학기술 및 군사적 인프라와 노하우, 독일인들의 프랑스와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적개심 등은, 향후 독일이 재기하여 프랑스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으로 작용했다. 이를 대비하여 프랑스는 우선 동유럽의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과 동맹을 맺었다. 독일과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동유럽의 동맹군들과 연계하여 독일을 동서로 포위한 후 양면 전선을 강요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와 더불어 프랑스는 1920년대 후반부터 장차 독일과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대비하여, 독일과의 국경 지대인 보주 산맥, 쥐라 산맥을 잇는 마지노 선이라는 장대한 요새를 건설하였다. 프랑스 국방장관이자 1차대전 참전 용사이기도 했던 앙드레 마지노(André Maginot, 1877-1932)의 건의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한 이 요새는, 참호전 위주였던 1차대전의 전훈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다. 프랑스 군부는 마지노선을 이용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방어하고, 중립국인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방면으로의 우회를 강요한 다음 이를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애초에 슐리펜 계획부터가 개전 초 독일군 병력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방면으로 집중시켜 프랑스를 조기에 항복시킨다는 계획이었고, 1차대전기에 독일군은 실제로 벨기에를 점령하여 프랑스 방면 병력을 통과시켰다. 마지노 선은 이에 대비하여, 벨기에 국경 방면에까지 요새를 구축하였다.
나치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폴란드 침공,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체결 등을 통하여, 동쪽의 위협을 사실상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는 독일의 움직임을 사실상 제지하지 못했으니, 프랑스는 이미 외교와 지정학의 측면에서 독일에게 승기를 쥐어준 셈이었다.
하지만 1939년 나치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받았고, 이후 양 진영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프랑스를 무력화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이는 영국,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동쪽의 동맹국들을 잃었다고는 하나, 프랑스는 여전히 강국이었고 영국이라는 또 다른 강국의 도움도 받고 있었다. 마지노 선은 위협적이었다. 벨기에 방면으로 군대를 진격시킨다는 1차대전기의 작전은 이미 프랑스도 예측 및 대비를 해둔 상태였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군 입장에서도 난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군 수뇌부가 계획한 낫질 작전(Sichelschnittplan)은 그토록 강력했던 마지노 선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불과 40여 일 만에 프랑스를 항복시켰다. 낫질 작전은 군사 전략과 기술의 혁신뿐만 아니라, 전장이라는 지리적 공간에 대한 혁신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하였다. 낫질 작전의 지리적 의미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2부에서 다루기로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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