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과정과 경과를 지리의 관점에서 살펴보기
'시간에 의한 공간의 절멸(the annihilation of space by time)'이라는 지리학 개념이 있다. 교통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해 세계 여러 지역 간의 이동 및 소통에 소요되는 시간이 단축되면서, 공간의 제약이 극복되고 세계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2차대전은 과학기술 및 전략전술의 발달에 의해 전장이라는 공간의 의미가 크게 변화한 계기이기도 하였다-필자는 이를 '기동에 의한 전장의 변화'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물론 그 시초(군용기, 전차 등)는 1차대전때 등장했지만, 이러한 전술 및 기술의 혁신이 전장과 전쟁을 본격적으로 바꾸어놓은 계기는 바로 2차대전이었다.
1차대전 후기에 영국군에 의해 개발된 전차는,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완전무장한 참호를 돌파하여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한 회심의 역작이었다. 기존의 보병 및 기병 돌격으로는 참호 돌파는커녕 전사자만 양산할 뿐이었으며, 포격으로도 참호를 무력화하는 데는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갑을 두르고 무한궤도로 기동하는 전차는 참호의 기관총과 철조망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었다. 때문에 1차대전 종전 후에도 각국의 군 수뇌부는 전차의 전술적,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며 전차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전차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엇갈렸다. 장차전을 참호전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본 보수적인 군인들은, 전차를 보병에게 화력지원을 하고 참호를 돌파하는 용도의 병기로 이해했다. 각국 군 수뇌부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이러한 유형의 군인들은, 보병부대에 소수의 전차를 배치하는 방향으로 전차를 운영하기를 원했다. 반면에 전차가 장차전의 양상을 주도하고 변혁하리라고 파악한 혁신파 군인들은, 전차를 보병부대에 분산 배치하는 대신 집중 운용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전차를 집중 운용하여 적의 방어선을 돌파함으로써 심리적 마비를 초래하고, 신속한 기동을 통해 적군 지휘 계통의 중추를 타격함으로써 적을 무력화한다는 관점이었다. 소련군의 미하일 투하쳅스키(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Тухаче́вский, 1893-1937), 영국군의 체스티 풀러(Lewis Burwell " Chesty " Puller, 1898-1971), 프랑스군의 샤를르 드 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그리고 독일군의 오스발트 루츠(Oswald Lutz, 1876-1944)와 그의 제자 격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Fritz Erich Georg Eduard von Manstein, 1887-1973)과 하인츠 구데리안(Heinz Wilhelm Guderian, 1888-1954)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전차뿐만 아니라 군용기의 가능성에도 주목하여, 항공 전력과 전차부대의 합동작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일례로 투하쳅스키는 1920년대에 공수부대의 운용을 선구적으로 개시하기도 하였다. 즉, 이들은 전장이라는 공간의 개념을 기존의 지표면(2차원)에서 지표면과 공간을 아우르는 개념(3차원)으로 재정립하는 혁신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럽 각국의 군부는 후자와 같은 혁신적인 군인들보다는, 전자와 같은 보수파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원수로 진급하여 소련군 사령관까지 역임했던 투하쳅스키는, 스탈린의 견제를 받아 1937년 숙청당하여 옥사하고 말았다. 풀러, 드 골 같은 인물들 역시 자국군에서 비현실적인 몽상가 취급을 받으며 겉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일군은 달랐다. 히틀러와 나치 당이 집권하기 전부터 한스 폰 젝트 장군의 지휘 하에 독일군 재건을 꾀하던 독일 군부는 군대의 기계화와 차량화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1차대전 당시에 전술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물자와 식량의 부족으로 결국 연합군에게 항복한 경험이 있었던 데다, 패망 이후 재건한 군대로는 아무래도 영국, 프랑스 등의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기 어렵다는 판단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독일 군부는 전차와 차량을 이용한 조기 결전을 적국에게 강요하려는 목표 하에 기갑부대와 차량화부대를 이용한 속전속결 전술에 주목했고, 이에 따라 루츠는 1920년대 후반부터 독일군의 기계화를 주도해 나갔다. 전격전(Blitzkrieg)이라는 개념도 이미 1930년대부터 독일 군부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어 오고 있었다. 전차의 집중 운용을 통해서 견고한 요새와 참호를 돌파하고 적의 지휘 체계를 마비시킨 다음 분절된 적의 잔존 병력을 섬멸한다는 이 새로운 전술 개념은, 슐리펜 계획에 기초한 작전 계획과는 어긋나게 서부전선의 장기화로 1차대전에서 패착을 입은 데다 재군비를 실천해 오고 있다지만 여전히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국력, 군사력 측면에서 우위를 접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독일의 현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히틀러의 집권 후에도 독일 군부는 전차와 항공기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작전 교리를 계속 발전시켜 나갔고, 이를 위해 필요한 전차와 항공기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루츠 장군의 지도 하에 1930년대의 독일군은 전차 생산을 개시했고, 전차의 집중 운용을 위한 전술 교리를 발전시켜 가는 한편 기갑사단 등의 편제를 신설함으로써 새로운 전술이 실천에 옮겨질 수 있도록 제도도 완비하였다. 특히 구데리안은 전차의 중량을 교량 통과 가능 여부를 기준으로 정하고, 전차 설계 시 개량을 위한 여유 공간을 두도록 하며, 전차의 승무원을 전차장, 조종수, 포수, 장전수, 무전수의 5명으로 규정하고, 마이크와 무전기를 설치하여 전차 내부에서는 물론 전차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등 현대 전차에까지 이어져 오는 전차 설계의 기준을 마련하였다. 전차부대의 운용을 위한 대규모 훈련도 실시하여, 전차의 집중 운용에 토대한 새로운 전쟁을 실전에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역량도 배가해 갔다. 루츠 장군은 1938년 히틀러의 군부 장악을 위한 군 수뇌부 숙청 사건(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이 이루어졌을 때 퇴역했지만, 그의 최측근 인사이자 제자격이었던 구데리안과 폰 만슈타인 등은 독일 기갑군의 전력 확대를 위한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후술 하겠지만 이 같은 새로운 전술 교리의 개발은 전술적으로는 물론, 전장이라는 공간에 대해서도 혁신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보병 중심의 전술 교리를 기갑부대와 차량화부대 위주로 재편함으로써, '기동에 의한 전장의 절멸'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군대의 이동은 하루에 20-30km가 실질적인 한계였다. 그 이상의 행군 거리는 정찰부대나 수색부대 등의 기동이거나, 아니면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왜냐 하면 인간의 도보 속도는 시간당 4km에 불과한 데다, 대포, 식량, 물자, 마초(馬草) 등을 군마 등으로 운송할 경우 이동 속도는 더욱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전투에 임할 때에도 보병의 돌격 속도는 인간의 달리기 속도 정도였고, 소총과 기관총의 발달로 인해 기병 돌격도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보병과 기병의 화력과 방어력으로는, 대규모 부대가 전장을 고속으로 우회하거나 종심 깊은 타격을 실시하여 적군 지휘부의 수뇌부를 마비시키는데 한계가 분명했다. 1차대전 당시에 개발된, 포병의 대규모 화력 지원 하에 보병의 일제 돌격을 통해 적군을 마비시킨다는 후티어 전술(독일군의 오스카 폰 후티어(Oskar von Hutier, 1857-1934) 장군이 개발한 데서 이런 명칭이 붙었음)이 보여준 초반의 가시적인 성과가 이내 사그라들고 말았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차는 이 같은 보병 중심의 전술이 갖는 한계를 크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 가치를 지녔다. 전차를 집단으로 운용하고 보병과 병참까지 차량화, 기계화한다면, 기존의 군마나 보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동 속도와 화력, 방호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보병, 기병 등이 넘을 수 없었던 공간의 한계를 넘어 신속한 충격 및 마비를 통한 속전속결 전술, 그리고 조기 결전 전략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독일 군부에서 1930년대부터 논의되어 오던 '전격전'의 핵심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라는 동맹국을 상실한 데다 소련이라는 또 다른 견제장치의 의미조차 사라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르웨이까지 나치 독일의 수중에 떨어졌지만,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개시되었던 1940년 5월 당시 나치 독일은 전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지 못했다. 우선 나치 독일의 경제력부터가 장기전을 버틸 만한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 나치 독일은 장기전에 소요되는 석유, 텅스텐 등 천연자원을 충분히 수급하지 못했으며, 육군, 공군에 비해 현저하게 열악했던 해군 전력으로는 연합군의 물자 보급로를 마비시키는데도 분명한 한계가 따랐다. 특히 나치 독일 해군은 노르웨이 전역에서 수상함 전력을 사실상 상실했기 때문에, 프랑스-영국 동맹군을 해상에서 제압하거나 격퇴하기는커녕 최소한으로 견제할 수단마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육군과 공군이라고 해서 사정이 딱히 여유롭거나 하지도 못했다. 폴란드 침공에서 나치 독일은 1개월여 만에 폴란드를 점령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영국, 프랑스의 방조 하에 소련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였다. 더욱이 폴란드에서 입은 나치 독일군의 손실 역시 무시할 정도가 아니었다. 병력이나 장비의 수준 역시 프랑스가 오히려 앞서 있었다. 전쟁 초기에 프랑스는 61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데 비해, 나치 독일이 동원한 병력은 450만 명 정도였다. 프랑스에는 동맹군인 영국군마저 배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치 독일군의 장비 역시 프랑스군, 영국군의 장비에 비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눈에 띄게 열세였다. 개전 당시 나치 독일군은 330여 대의 체코 전차를 포함하여 2,400여 대의 전차를 보유했던데 반해, 프랑스군의 전차는 3,200대가 넘었다. 여기에 동맹군인 영국군, 네덜란드군, 벨기에군의 전차를 합하면 연합군의 전차는 무려 4,200여 대에 달했다. 전차의 질적 수준 역시 연합군이 훨씬 우수했다. 개전 당시 나치 독일군의 최신 전차였던 4호 전차는 장갑 두께가 30mm였고, 1-3호 전차는 그보다도 장갑이 얇았다. 반면 영국군의 보병전차 마틸다는 장갑 두께가 80mm에 달했고, 이외의 연합군 전차들도 나치 독일군의 전차보다 월등히 두꺼운 장갑을 두르고 있었다. 화력 역시 연합군 전차의 우세였다. 4호 전차는 75mm 전차포를 장착했지만 기술력 부족으로 포신이 짧아(이 문제는 훗날 개선되기는 한다) 실질적인 사거리와 화력이 구경에 비해 약했고, 3호 전차와 체코제 전차들의 37mm 주포와 2호 전차의 20mm 주포는 연합군 전차들의 주포보다 구경부터 작았다. 심지어 나치 독일군이 500대 이상 보유했던 1호 전차는 13mm 두께의 장갑에 기관총 2정을 장착하고 있어, 명목상 전차일 뿐 사실상 소형 장갑차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포병전력 역시 나치 독일군이 7,300여 문의 화포를 보유했던데 비해, 연합군은 그 두 배에 가까운 총 14,000문에 달하는 화포를 보유하였다. 군용기 역시 연합군은 총 4,400여 대를 보유하여, 나치 독일군의 3,500여 대를 현저히 상회하였다. 성능 역시 나치 독일의 군용기보다 프랑스, 영국의 군용기가 더 우수했다. 나치 독일 공군 조종사의 기량 역시,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연합군 조종사들에 비해 우수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나치 독일 공군이 수년에 걸쳐 급조된 데다, 교육훈련 시설 및 프로그램 역시 연합군보다 효율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단적으로 1940년 2-3월에 나치 독일 공군 조종사들 중에서, 교육훈련 중 사고로 인한 사상자가 무려 560여 명이나 나왔을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 프랑스가 자랑하는 무적의 요새 마지노 선이 나치 독일과 프랑스 국경선은 물론, 중립국인 벨기에, 룩셈부르크 방면에까지 뻗어 있었다. 마지노 선에는 보병을 제압하기 위한 기관총과 화포는 물론, 대전차포까지 높은 밀도로 설치되어 있었다. 요새들은 지하 통로와 철도망으로 네트워크처럼 연결되었고, 요새 내부에서 장기간 작전하는 병력의 건강 문제를 고려한 인공 일광욕 시설까지 설치되어 있을 정도였다. 전차로 돌파가 가능했던 1차대전기의 참호와는 차원이 다른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누가 보더라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하기는커녕, 우세를 점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프랑스군 수뇌부는 나치 독일과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프랑스군과 연합군의 전력 앞에 나치 독일군이 조기에 무력화되리라고 공언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반면 나치 독일군 수뇌부에서는 프랑스와의 개전을 우려하는 장성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 Franz Halder, 1884-1972) 대장은 히틀러가 무리한 전쟁으로 독일을 멸망케 할 것이라는 우려에 휩싸여, 그를 암살할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히틀러는 폴란드 항복 직후인 1939년 9-10월부터 군부의 장성들에게 프랑스 침공 계획의 수립을 지시하였다.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 영토를 최대한 확보하여 영국과의 결전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동시에,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할 루르 산업지대의 완전한 지배권을 손에 넣으려는 목표였다. 이에 따라 나치 독일군 수뇌부는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돌파하여 프랑스 북부로 진격한 다음 요격하러 오는 프랑스군을 우회하여 포위 섬멸한다는 슐리펜 계획을 토대로, '황색 작전(Fall Gelb)'이라 이름 붙여진 프랑스 침공 계획을 입안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차대전때 이미 실시된 작전개념을 되풀이하는 식의 작전계획은 실현 가능성도 부족-심지어 1차대전때 독일 제국군은 예상치 못했던 벨기에군의 선전에 의해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이는 나치 독일의 작전 계획을 상당 부분 어그러뜨렸다-했고, 무엇보다 슐리펜 계획의 핵심 목표였던 프랑스의 조기 항복을 배제한 프랑스 북부-네덜란드에 이르는 영토의 확보를 최종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도 저급한 수준에 머무른 계획이었다. 이에 대하여 Karl Heinz Frieser(1995: 진중근 역, 200)은, 작전을 주도한 육군 참모총장 할더가 히틀러의 전쟁 계획이 무모하고 비현실적임을 입증하여 그의 전쟁 계획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로 이 같은 수준 낮은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할더의 의도가 어쨌든, 히틀러의 지시는 계속 관철되어 나치 독일 군부는 작전 계획을 수정했다. 작전의 요지는, 나치 독일 B 집단군이 주공을 맡아 벨기에-네덜란드 방면으로 진격하고, 조공인 A 집단군이 독일-프랑스 국경지대로 진격한다는데 있었다. 하지만 수정안 역시 뚜렷한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등 문제가 많았다. 이로 인해 히틀러는 프랑스 침공을 계속해서 연기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1940년 1월에 프랑스 침공계획과 관련된 기밀문서를 소지한 채 항공기로 이동하던 나치 독일군 정보장교들이 시계 악화로 인해 벨기에에 불시착한 뒤 체포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은 더욱 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전술, 그리고 전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을 통해 나치 독일 군부가 직면했던 난제의 해결을 제시한 인물은, 루츠, 구데리안과 더불어 독일 기갑군 창설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었던 폰 만슈타인 중장이었다. A 집단군 참모장이었던 폰 만슈타인은 기존에 주공으로 계획되었던 B 집단군을 조공으로 전환하고, A 집단군에 주공 임무를 부여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A 집단군이 당시 대규모 군부대가 통과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아르덴(Ardennes) 삼림지대를 통과하여 스당(Sedan)을 돌파하고 마스(Maas) 강 하구까지 진격한 다음 B 집단군과 합세하여 프랑스군 주력을 포위 섬멸한다면, 연합군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크게 저하시키거나 마비시킬 수 있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북부에서 프랑스군의 주력을 격파한 뒤,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켜 잔존 병력을 소탕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당시 군 수뇌부 인사들이 갖고 있던 생각과는 이질적이었기 때문에, 할더를 비롯한 수뇌부 인사들의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폰 만슈타인은 군 수뇌부의 고위 장성들을 설득했고, 전차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구데리안도 폰 만슈타인의 작전이 실현 가능함을 뒷받침해 주었다. 차량화된 보병과 수송부대, 그리고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집단으로 기동하는 독일 기갑군은, 기존의 보병 중심 전술로는 실현하기 어려웠을 폰 만슈타인의 작전 구상이 실제로 실현되는데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무엇보다 그의 작전 구상은 히틀러를 매료시켰다. 폰 만슈타인의 작전은 집중해서 운용되는 기갑군의 신속한 기동력과 강력한 화력, 방어력을 바탕으로 프랑스라는 전장을 기존과는 다른 차원으로 기동하며 전투 지속 능력을 조기에 마비시켜 항복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전략전술은 물론 전장이라는 공간을 바라보는 지리적인 측면에서도 일대 혁신이었다. 때문에 할더는 초기에는 폰 만슈타인의 작전 계획을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결국에는 그 역시 폰 만슈타인의 지원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2차대전의 본격적인 서막이자, 전쟁의 흐름을 다시 쓰게 만든 전환점이었던 낫질 작전의 입안이 이루어졌다. 1940년에는 5월 10일에 나치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을 개시했고, 폰 만슈타인의 작전은 불과 40여 일 만에 프랑스를 점령했다. A 집단군과 B 집단군이 프랑스의 연합군을 조기에 무력화시킨 양상은 마치 낫으로 곡물을 수확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훗날에는 '낫질 작전'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다만 '낫질 작전'이라는 명칭은 나치 독일이 사용한 적은 없으며, 윈스턴 처칠이 사용한 용어가 후세에 널리 알려지고 쓰이게 된 것이다. 용어를 사용한 주체가 누가 되었든, 서유럽의 대지에 거대한 상흔을 남긴 히틀러의 낫질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1940년 5월 10일에 나치 독일은 프랑스에 대한 침공을 단행하였다. B 집단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점령하는 동안, A 집단군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던 아르덴 돌파에 성공했다. 연합군 수뇌부는 아르덴을 통해서 A 집단군 병력이 돌파하리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차량화, 기계화된 A 집단군 병력은 별다른 저항 없이 아르덴을 통과하였다. 보주-쥐라 산맥의 능선에 설치된 강력한 마지노 선도, 벨기에군, 네덜란드군, 영국군의 증원에 의해 증강된 벨기에 방면의 프랑스군도 A 집단군의 돌파를 막지 못했다.
나치 독일 입장에서 프랑스군의 작전 계획은 더욱 호재였다. 전차의 지속적인 집중 운용이 가능하도록 차량화된 병참 부대까지 편성했던 독일군과 달리, 프랑스군은 1차대전의 교리에 충실한 연속적인 선형 방어 계획을 고수했다. 스위스 국경지대로부터 북해 해안을 잇는, 마지노선을 따라 대규모의 부대를 상호 연결성 있게 선형으로 배치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런 방어 전술은 보병과 기병 위주, 또는 전차가 방어선 돌파 목적으로 보병 부대에 분산 배치되는 1차대전 식의 전투에는 적합했을지 모르나, 집중적으로 운용되는 기갑부대의 돌파를 막기에는 부적합했다. 게다가 선형 방어선에 배치된 보병 중심의 부대는 기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갑부대의 돌파나 추격, 포위망 형성 등에 적절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방어선 후방에 충분한 예비대를 배치해 두지 않았고, 이는 나치 독일군의 전격전에 의한 프랑스군의 무력화를 부채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Maurice Gustave Gamelin, 1872-58)의 오판은 프랑스군의 방어 전략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휘하 참모진과 군사령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벨기에 방면에 대규모의 정예 부대를 증편하였다. 나치 독일군 수뇌부의 작전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1차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벨기에 방면으로 독일군이 쇄도할 것만을 단정 지은데 따른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모리스 가믈랭은 나치 독일군의 조공이자 연합군을 기만하는 역할을 맡았던 B 집단군 방면으로 정예부대를 스스로 몰아넣는 실책을 범한 셈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영국군과 프랑스군 수뇌부 간의 의사소통 역시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는 나치 독일군의 전격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아르덴 돌파에 성공한 나치 독일군 A 집단군은 5월 14일 스당을 함락시켰고, 마스 강 도하를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A 집단군 예하 제19기갑군단이 그 역할을 맡았다. 스당 확보에 성공한 구데리안은 프랑스군의 역습에 대비하라는 상층부의 명령을 무시한 채 북서쪽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명령 불복종이기는 했지만, 전차와 항공기의 집중 운용에 토대한 전격전의 가능성, 그리고 전격전의 시대에 적합한 전장을 바라보는 지리적 안목의 산물에 따른 결정이기도 하였다. A 집단군이 프랑스 북동부를 낫질하듯 포위한다는 프랑스 침공 계획이 제대로 실현되려면, 확보한 거점(스당)을 고수하기보다는 신속한 기동을 통해서 일분일초라도 빨리 연합군의 주력을 포위하여 와해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구데리안에게 '서쪽으로 달려라'라는 명령을 미리 받았던 예하 사단장들은 문자 그대로 북해 방면으로의 진격을 거듭했다. A 집단군 사령부는 구데리안의 독단적인 행보에 거듭 제동을 걸었지만 구데리안은 무시하였고, 결국 상관인 제1기갑집단 사령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Paul Ludwig Ewald von Kleist, 1881-1954) 대장이 분노한 끝에 구데리안을 해임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A 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드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1874-1953)의 중재로 갈등을 봉합하는 데 성공했다. 제19기갑군과 더불어, A집단군의 다른 예하부대들도 북해 방면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보병 위주의 편제에다 1차대전식의 방어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프랑스군은 제19기갑군단 예하 기갑사단들의 진격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고, 5월 17일에 A집단군 병력은 벨기에 방면의 프랑스군을 유린하며 대서양 방면까지 도달했다.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1944) 소장이 지휘하는 제7기갑사단은 100-200명 수준의 인명 손실을 입은 채 프랑스 제2군단을 비롯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들을 무력화시켰으며, 1만 명이 넘는 포로를 획득한 채 대서양에 도착할 정도였다. 불과 1주일 남짓한 기간 동안 나치 독일은 벨기에 전선에 배치된 연합군 주력부대의 배후를 가르는 거대한 낫질이 이루어졌고, 전장을 기갑부대와 전술 폭격기의 공간이 아닌 보병의 공간에서만 바라보지 못했던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주력은 전장을 사수하는 대신 질주하던 나치 독일군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낫질에 결국 무력화되고 말았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나치 독일군은 연합군을 앞서지 못했지만, 무기의 가능성과 이에 따른 전술의 변화, 그리고 전장이라는 지리적 공간의 변화를 바라보는 안목의 차이가 전쟁의 결과에 결정적인 차이를 불러오고 말았다.
낫질 작전은 연합군의 주력을 와해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국군과 프랑스군 간의 연결까지 갈라놓았다. 낫질 작전 이후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제대로 된 연계는 일어나지 못했다. 다만 나치 독일군의 측방을 노린 영국군의 선전은 독일군 수뇌부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이는 됭케르크(Dunkirk)에서 영국군을 중심으로 하는 약 30만 명의 연합군이 무사히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벨기에 전선에서 주력부대를 상실한 프랑스군은 모리스 가믈랭의 후임으로 부임한 막심 베이강(Maxime Weygand, 1867-1965) 장군의 지휘 하에 잔존 병력을 모아 역습을 시도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벨기에 전선에서의 패배로 이미 병력과 장비의 손실뿐만 아니라 지휘 계통에도 상당한 혼란이 초래되는 등, 전쟁 수행능력이 이미 저하된 상태였다. 낫질 작전으로 인해 전선이 분단되면서, 영국군의 재편과 지원 또한 어려워졌다. 영국군은 사실상 제시간에 맞추어 프랑스군을 지원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미 무용지물이 되다시피 한 마지노 선의 사수를 위해 적지 않은 병력을 마지노 선에 여전히 배치해둔 것 역시 패착이었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6월 22일에 나치 독일과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명목상 휴전 협정이었지만, 사실상 프랑스의 항복이었다. 이후 프랑스 북부는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남부는 1차대전의 영웅이었던 앙리 필리프 페탱(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étain,1865-1851)을 수반으로 하는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인 비시 정부에 의한 통치를 받았다. 프랑스인들은 자유 프랑스 정부 등 해외 망명 정부 아래서 연합군의 일원이 되거나, 또는 프랑스 국내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이며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이어 갔다.
나치 독일의 전격전은 전략전술의 혁명이기도 했지만, 전장이라는 공간의 혁신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지리적 혁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기존까지의 전장이 보병의 진격 속도와 포병의 사거리를 기준으로 하는 사수해야 할 평면적인 공간이었다면, 전격전은 전장을 항공기와 기갑부대가 지배하는 입체 기동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전격전은 어디까지나 단기 결전 사상에 토대한 전략전술 개념이었다. 프랑스에서 나치 독일은 낫질 작전을 통해서 적군의 주력을 분단하고 마비시켜 조기 항복을 받아낸다는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이후에도 계속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우선 히틀러는 영국을 외교적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됭케르크에서 영국군의 퇴각을 허용하고 말았다. 잔존 병력의 섬멸은 작전술에서는 기본 중의 기본인데, 작전술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함에도 자신의 아집을 군 수뇌부에 강요한 히틀러의 잘못된 행동은 됭케르크라는 장소가 결국 전격전이 이루어놓은 눈부신 승리의 값어치를 퇴색시킨, 그리고 연합군에게는 소생의 가능성을 다니 장소로 만들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보다 월등히 광대하고 종심도 깊었던 소련에게는 이 같은 전격전을 통한 조기 결전 전략이 먹혀들지 못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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