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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ul 19. 2020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의 지정학

화합할 수 없는 상극 같은 두 나라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지리적 이유

  2차대전은 세계 전역을 무대로 한 전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소련이었다. 극단적인 반공국가였던 나치 독일과 공산국가 소련은, 애초에 국시나 국가 이념적인 측면에서부터 상극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단순한 적국을 넘어 정복해야 할 레벤스라움이기도 하였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통해 자국의 영향력 강화를 꾀하던 소련 입장에서도, 나치 독일을 우호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웠다. 나치 독일이 1930년대에 재무장을 통해 군비를 증강하고 팽창 정책을 노골화함에 따라, 나치 독일과 소련 간의 외교적 긴장은 더욱 커져갔다. 1939년에 개봉한 '트랙터 운전수'라는 영화의 삽입곡이자 소련 군가로도 사용된 노래인 '소련 전차병 행진곡'의 가사는, 이 같은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장갑은 견고하고 우리 전차들은 잽싸며, 우리 인민의 용기는 충만하다. 위대한 조국의 아들인 소련 전차병들은 전투준비를 완료하였다... 숨어있는 적들아, 우리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는 너희의 땅을 한 척도 원하지 않지만, 너희에게 조국의 땅을 한 치도 내어주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이 상극일 수밖에 없었던 나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정치적인 이해관계였지만, 이러한 정치적 이해관계의 원천은 나치 독일과 소련의 지정학적 위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의 체결은, 2차대전의 역사적, 지정학적 과정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독일은 유럽에서 수리적으로 중심부에 해당하는 위치를 점한다. 그러다 보니 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도 손꼽힐 정도로 많은 나라들과 국경을 인접한다. 그리고 독일의 인접국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강국이라는 특징도 가진다. 서쪽의 프랑스는 유럽의 전통적인 강국이었고, 동쪽으로는 폴란드(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다. 남쪽으로도 중세-근세 유럽의 강국이었던 합스부르크 제국 및 이탈리아와 인접하였다. 발트해를 통한 북유럽(스웨덴)의 세력 또한, 독일 입장에서는 간과할 세력이 아니었다. 더욱이 아래의 지형도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독일의 접경 지대에는 알프스 산맥(이탈리아 북부 국경선), 피레네 산맥(에스파냐-프랑스), 트란실바니아 산맥(오스트리아-루마니아) 등과 같은 천연 장애물의 발달도 미약했다. 이는 독일이 유럽의 중심부로 교통의 요지가 될 수 있는 한편으로, 국방이라는 측면에서 외국의 침공에 취약할 수도 있다는 지정학적 여건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유럽 지형도. 독일 동부 국경은 개활지로 이어진 양상을 보이며, 프랑스와의 국경지대 역시 상대적으로 지형이 덜 험준한 편이다.(출처: Pinterest)

  이 중에서도 특히 독일에게 위협으로 작용했던 세력은, 프랑스와 러시아였다. 두 나라는 한 나라의 국력 면에서도 독일의 국력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 않았던 만큼, 이 두 세력의 포위를 받는다면 독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입장에서 더욱 불리했던 지리적 요인은, 독일의 동서 국경선에는 특히 천연 장애물의 발달이 미비했다는 점이다. 이는 독일이 외교에 실패하여 너무 많은 적을 만들어버릴 경우,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를 동시에 적으로 돌릴 경우, 양면 전쟁일 강요당하여 전력과 국력이 분산된 끝에 국가 멸망의 위기가 도래할 수 있다는 여건을 조성했다. 실제로 프로이센은 7년 전쟁(1756-1763) 때 인접국인 프랑스, 러시아, 합스부르크 제국을 모두 적으로 돌렸던 탓에 전술적인 연승에도 불구하고 국가 존망의 위기에까지 내몰렸다가, 러시아의 신임 차르 표트르 3세가 돌연 프로이센과 강화를 청한 덕택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이후 19세기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통해 동방의 위협을 제거한 다음 프랑스와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벌여 승리, 독일 통일을 이룩하였다.

  독일 제국의 성립 후에도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러시아로부터의 양면 전선 형성은 독일 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1891-1905년에 독일 제국군 참모총장으로 근무했던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Alfred Graf von Schlieffen, 1833-1913)은 독일군이 향후 프랑스, 러시아와의 양면 전선에서의 전쟁을 강요받을 상황을 대비한 작전 계획인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을 입안하였다. 그 핵심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조속히 마무리지은 다음 러시아를 격퇴한다는데 있었다. 슐리펜 플랜은 독일제국 동부(동프로이센)를 포기하더라도 전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여 선진적인 인프라를 갖추었지만 국토가 상대적으로 작고 종심이 짧은 프랑스를 조기에 굴복시켜 서부전선의 위협을 제거한 다음, 그 여세를 동부전선에 집중하여 국토가 광대하지만 상대적으로 인프라가 낙후된 러시아를 제압한다는데 있었다. 슐리펜 계획은 훗날의 군사학자들에게 병참, 총력전 등의 현실을 간과한 비현실적인 작전 계획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만큼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가 가진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실제로 1차대전 초기에 독일군이 동프로이센에서 러시아군을 괴멸한 타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anneberg, 1914)는 전술적으로는 포위 섬멸전의 모범을 보인 독일군의 대승이었지만, 유사시 동프로이센을 포기한다는 슐리펜 계획의 원칙을 무시하고 프랑스를 함락에 동원되었어야 할 서부전선의 병력까지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는 독일군의 패착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슐리펜 플랜은 독일 제국이 프랑스, 제정 러시아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아 양면 전선을 강요받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수립되었다.(출처: 3d History)

  지금까지 살펴본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는, 독일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이중 전선이 형성되는 상황을 어떻게든 방지 또는 회피할 필요가 절실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두 나라를 모두 적대시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우선 프랑스부터 무력화해야 했다.  러시아에 비해 인프라가 발달한 반면, 국토가 상대적으로 좁고 종심이 짧았기 때문이었다. 슐리펜 계획의 핵심 역시, 프랑스부터 무력화한 다음 국토가 광대하지만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미비하여 병력 동원에 시간이 많이 걸릴 러시아를 상대한다는데 있었다.

슐리펜 플랜은 동프로이센을 포기하더라도 독일군 전 병력을 동원하여 프랑스를 조기에 무력화한 다음, 여세를 몰아 러시아군을 상대한다는 작전 계획이었다.(hsie-kingsgrove)

  나치 독일과는 태생적으로 상극일 수밖에 없었던 소련 역시, 정치적, 지정학적 이해관계의 측면에서는 독일을 마냥 적대시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1920년대 독일과 소련은 비밀리에 협력을 하던 관계였다. 독일은 1차대전 패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대규모의 군 감축과 군비 제한을 강요받았고, 소련은 공산주의 확산을 경계한 서방 국가들로부터 고립된 상황이었다. 두 나라는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민간 교류를 위장한 군사 교류를 해 가며 군사력 강화를 위한 시도를 해 나갔다. 예를 들면 민간인 항공 클럽으로 위장한 독일 공군들이 소련을 방문하여 소련 영내에서 비행 훈련과 전투기 개발을 하고, 그 대가로 소련군에게 공군 전술 교리와 전투기 제작 기술을 전수하는 방식이었다. 세계사 교과서에 ‘이론상으로는 대단히 민주적인 정부를 갖추었다’고 서술되는 바이마르 공화국은, 한스 폰 젝트(Johannes Friedrich “Hans” von Seeckt, 1866-1936) 장군의 지도하에 현대화된 군대의 재건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합국의 눈을 피해서 군대의 재건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있었던 장소는, 바로 공산국가 소련이었다. 그리고 서방 국가로부터 고립된 데다 혁명으로 인한 혼란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소련 입장에서는, 자국의 영토를 독일에게 재군비를 위한 장소로 제공함으로써 독일의 앞선 군사 교리와 기술을 포섭할 수 있었다.

  1930년대의 대외적, 대내적 여건 변화는, 소련의 외교에 중대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우선 이오시프 스탈린이 시행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면서, 서방 국가들에 비해 낙후되어 있던 소련의 경제와 산업이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1930년대 후반 소련의 GDP 규모는 독일과 더불어 세계 2-3위를 점할 정도였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 이후의 혼란상이 잔존해 있던 1920년대와 달리, 1930년대 소련은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비록 스탈린과 공산당의 개인독재, 1당 독재와 대숙청 등 강력한 공포정치에 토대했다고는 하지만-했다. 이에 따라 소련은 자국의 영향력 확대를 본격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 1차적인 관심은, 옛 제정 러시아의 영토였던 핀란드, 발트 3국, 그리고 폴란드였다.

  나치 독일의 등장은, 한때 군사동맹 수준의 교류를 주고받았던 독일과 소련의 관계를 급속히 냉각시켰다. 나치 독일의 노골적인 재무장과 팽창주의도 소련에게는 위협을 주었지만, 기본적으로 극단적인 반공주의, 인종주의 사상, 그리고 레벤스라움이라는 영토관에 바탕을 둔 나치즘과 나치당은 애초부터 소련과는 양립하기 어려웠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독일을 본격적으로 장악한 1930년대 중반부터, 나치 독일과 소련 간의 외교 관계는 ‘협력 관계에서 적대 관계로’ 급변했다고 묘사될 정도로 크게 악화되었다. 1938년 이루어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은 소련에게도 중대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나치 독일의 동방으로의 팽창 정책이 가시화된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글 서두에 인용한 ‘소련 전차병 행진곡’의 가사는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작사되었다.


  외교적 관계가 나빴던 데다 애초부터 양립 가능한 체제도 아니었던 나치 독일과 소련이 1939년 8월에 돌연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나치 독일과 소련의 지정학적 위치와 의미라는 측면에서도 접근할 필요가 있다.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동방의 레벤스라움 확보를 위해서 우선 영국과 프랑스라는 서방의 위협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을 방조했다고는 하나,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여전히 폴란드 등의 동맹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력, 군사력 측면에서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나라들 역시 결코 약소국이라 할 만한 나라들이 아니었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강국이었다. 따라서 과거 슐리펜 계획이 그랬듯이, 히틀러 입장에서는 본격적인 레벤스라움 확보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영국과 프랑스부터 무력화할 필요가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양면 전선이 형성된다면, 1차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그랬듯이 나치 독일은 막대한 소모를 강요당한 채 군사적인 연승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패할 우려가 컸다.

1차대전 당시의 주요 전선(붉은 선). 독일 제국은 양면 전선 형성을 결국 허용했고, 이는 독일 제국의 전력 분산과 국력 소모를 강요하여 패망으로 이어졌다.(출처: Wix.com)

  게다가 소련은 국가 안보의 확보 및 국제적 영향력 확대를 위해 유럽 국가들과의 교섭 및 동맹을 시도했지만, 소련 입장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였다. 이를테면 소련은 루마니아와의 연합, 동맹을 시도했지만, 루마니아의 반공 정서, 파시즘 운동 등으로 인해 이 시도는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나치 독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영국, 프랑스와도 연계했지만, 이들 역시 공산국가인 소련을 견제했을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시 이들이 보여준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모습으로 인해 소련은 이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 소련은 제정 러시아령이었던 발트 3국과 핀란드에 대한 지배력, 영향력을 회복하겠다는 열망 역시 강하게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치 독일은, 1939년 4월부터 소련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타전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처음에는 나치 독일의 의도를 의심하였지만, 동년 7월에는 나치 독일과의 연대를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은 소련에게 폴란드 분할 점령은 물론, 발트 3국과 핀란드 영유, 나아가서는 동유럽과 발트해 지역을 독일과 소련이 분할 통치, 지배하는 영역으로 만들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이는 영국과 프랑스와에 대해서 실망과 불신을 갖고 있던 소련 입장에서도 매우 매력적인 조건으로 다가왔다. 나치 독일이라는 직면한 위협으로부터 국가 안보를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초반 폴란드에게 빼앗긴 영토의 회복을 비롯하여 동유럽에서의 영토,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의 크렘린을 방문한 나치 독일의 외무상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U. F. W. Joachim von Ribbentrop, 1893-1946)는 이오시프 스탈린, 그리고 소련 외무상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1890-1986)와 회동한 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에 서명했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에 서명하는 리벤트로프). 리벤트로프 바로 뒤에는 스탈린이, 그 우측에는 몰로토프가 서 있다.(출처: 월간조선)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은 2차대전의 진행 과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선 1939년 9-10월의 폴란드 침공에서, 서부전선(나치 독일군)과 동부전선(소련군)으로부터의 양면 전선을 강요받은 폴란드는 동맹국인 영국, 프랑스의 방조 하에 개전 1달여 만에 패망하여 나치 독일, 소련에게 분할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후 나치 독일은 전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여 프랑스를 침공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라는 양면 전선을 강요할 동방의 동맹군들을 독일에게 내어준 채 독일 기갑군의 아르덴 돌파를 통한 마지노선 우회(낫질 작전)에 허를 찔린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개전 한 달여 만에 지휘체계가 붕괴되었고,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한편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대가로 폴란드 동부 영토를 차지했고, 이어서 나치 독일의 동의를 받은 소련이 발트 3국을 병합하였다. 민족 정체성도 언어도 러시아와는 이질적이었던 발트 3국은 1991년에야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고, 이는 소련 붕괴의 전주곡이기도 하였다. 이후 소련은 발트 해 일대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핀란드 침공까지 감행하였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으로 소련은 발트 3국, 폴란드 동부 등의 영토(연두색)를 획득하였다.(출처: 위키피디아)

  공군력을 통해 영국을 무력화하려는 시도(영국 본토 항공전)에 끝내 실패한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에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 침공을 개시하였다(바르바로사 작전). 이로서 2천만 명 이상의 소련 군인과 민간인, 그리고 5백만에 달하는 독일군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던, 2차대전 중에서도 가장 참혹했고 규모도 컸던 독일-소련 전쟁이 그 막을 올렸다. 


참고문헌

황동하, 2001, "독·소 불가침 조약(1939. 8. 23)의 성립: 소련 측의 동기 분석을 중심으로," 서양사론, 68, 119-148.

Bogdanov, K. A. 2010. The USSR instead/inside of Europe: Soviet political geography in the 1930s-1950s. Studies in East European Thought, 62, 40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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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rhose, R. 2014. The Devils' Alliance: Hitler's Pact with Stalin, 1939-1941. New York: Basic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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