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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ul 15. 2020

2차대전의 서막, 폴란드 침공의 지리학

나치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을 지리학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무혈 병합에 성공한 나치독일은, 폴란드를 그 다음 목표로 삼았다. 폴란드는 나치독일이 반드시 확보해야 할 레벤스라움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던 유럽 러시아 확보를 위해서도 반드시 확보해야 할 발판과도 같은 영역이기도 하였다. 

  나치독일의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성공은,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이라는 도박에까지 비유될 만한 선택을 하게 만든 또다른 요인으로 작용했다. 히틀러와 나치독일 수뇌부의 우려와는 달리, 나치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은 영국과 프랑스의 별다른 견제조차 받지 않은 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는 히틀러로 하여금 동유럽 침공과 영토 확장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 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38년 당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었던데다 상당한 수준의 군수산업까지도 발달했었기 때문에, 이들의 산업시설과 경제력, 군장비는 나치독일에 흡수되어 이들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말았다.

  1939년 9월 1일, 나치독일은 선전 포고 없이 폴란드 침공을 단행했다. 폴란드는 독일에 비해 국력, 군사력 모두 열세이기는 했지만,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1918년 독립을 성취한 폴란드는 1919-21년간 이어진 소련과의 전쟁(소련-폴란드 전쟁)에서 양적, 질적으로 우세한 소련군을 격퇴한 전적이 있었다. 이후 독일, 소련 등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영국, 프랑스와 공수동맹을 맺는가 하면, 1930년대 중반에는 나치독일의 재무장과 팽창정책에 대비하여 대대적인 군 현대화, 기계화 계획(6개년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나치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에 위기의식을 느낀 폴란드 정부는, 1939년 동원령을 발령하여 3월에는 28만명이 조금 넘던 현역 병력을 약 44만명까지 증강시켰고, 9월에는 95만명에 달하는 군 병력을 동원하여 폴란드-독일 국경지대의 방어선에 배치해둔 상태였다. 폴란드군의 사기와 기강, 훈련도 또한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일례로 1939년  9월 7-10에 벌어진 비츠나 전투(Battle of Wizna)에서는 700여명에 불과한 폴란드군 보병 병력이, 전차를 비롯한 중장비로 무장한데다 독일 기갑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명장 하인츠 구데리안(Heinz Wilhelm Guderian, 1888-1954)의 지휘까지 받던 4만명 이상의 나치독일군 병력을 상대로 적잖은 손실을 강요하며 이들의 진격을 저지한 바 있다. 아울러 폴란드 멸망 이후 연합군에 합류한 폴란드 망명정부의 군대는 뛰어난 전투력으로 숱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휴식을 취하는 폴란드군 기갑부대원들의 모습. 폴란드군은 결코 약체나 시대에 뒤떨어진 군대가 아니었다.(출처: Daily Express)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개전 후 한 달이 조금 지난 10월 6일에 결국 나치독일과 소련에 분할 점령당하며 패망하고 말았다. 폴란드의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에 나치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폴란드는 이들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나치독일과 소련이라는 두 군사대국의 양면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폴란드 침공을 2차대전의 실질적인 개전으로 삼는다. 이 글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군사강국이었던 폴란드가 왜 고립무원 상태에서 나치독일과 소련에 의해 패망했는가를, 지리적 관점에서 살펴 보도록 하겠다.  


  18세기말 프로이센,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어 멸망한 폴란드는, 1차대전 종전후인 1918년 11월에 독립을 달성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폴란드 제2공화국). 이는 폴란드와 나치독일, 소련 간의 적대관계는 물론, 이들 간의 영토 문제가 폴란드의 독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우선 폴란드는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 그리고 제정 러시아의 식민 치하에서 심한 탄압을 받아야 했으며, 이로 인해 폴란드인들은 약 150년에 걸쳐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폴란드인들이 나폴레옹에게 적극 협력했던 까닭도, 바로 러시아와 프로이센으로부터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던 그들의 열망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 독일과 러시아는 1차대전으로 인해 폴란드를 상실해야 했고, 패전국 독일과 1차대전에서 결과적으로 손실만 입은 소련은 이후 폴란드 영토를 수복하겠다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실제로 폴란드와 소련은 영토 문제로 1919-21년에 전쟁을 벌였으며, 심지어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에조차 폴란드 영토 수복에 관한 조항이 담겨 있을 정도였다. 이는 폴란드가 독일과 소련이라는 동서의 두 가상적국을 견제하고, 이들의 침공에 대비해야만 한다는 지정학적 위치를 강요하는 상황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폴란드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각각 소련, 나치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으며 이 두 강국의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시도하면서 국가 안보의 보장을 위한 노력을 해 나갔다. 그런 한편으로 폴란드는 영국, 프랑스와의 동맹을 통하여 향후 독일, 소련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1920년 비스와 강 전선에서 소련군을 격퇴한 폴란드군의 모습을 그린 회화. 폴란드는 독립 후에도 소련과의 영토 문제로 전쟁을 벌였다.(출처: Catholic Insight)

  히틀러의 집권은, 애초부터 폴란드와 나치독일 간의 영토문제를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치즘에 따르면 폴란드는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 확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할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치독일은 독일 영토를 분단시킨 폴란드 영토인 폴란드 회랑의 수복, 나아가 폴란드 영토의 레벤스라움화를 프로파간다로 내걸었다(필자의 브런치 글 "레벤스라움의 지리학https://brunch.co.kr/@ldmin1988/3" 참조). 나치독일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사실상 무혈 점령함에 따라, 나치독일의 폴란드에 대한 위협은 기정사실화되었다.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두 나라가 나치독일에 합병된데다, 폴란드의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사실상 두 나라의 합병을 방조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1939년 8월 23일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은, 폴란드 입장에서는 더욱 큰 악재였다. 이념적으로 상극이었던 두 나라가 공수동맹의 성격을 가진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폴란드가 서쪽의 나치독일과 동쪽의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과의 양면전쟁을 강요당할 위험성을 더한층 증폭했기 때문이었다. 지형적인 요인 또한 불리했다. 폴란드 서부의 독일 접경지대와 동부의 소련 접경지대에는 지형적으로 산맥 등 자연 장애물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폴란드군 입장에서는 요새 건설 등 방어전략 수립에도 불리한 여건으로 작용했다.

  폴란드의 민족구성이라는 인문지리적 요인 또한 나치독일, 그리고 소련의 침공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폴란드 제2공화국에는 폴란드인 외에도 독일계, 벨라루스계, 우크라이나계 등 다양한 민족집단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특히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은 폴란드 정부와 적지않은 갈등을 빚어오고 있었다. 우크라이나계 폴란드인들은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폴란드인들과 달리 그리스 정교를 신봉한데다, 역사적, 정치적인 문제-본래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다가 17세기 후반에 반란을 일으킨 다음 러시아로 편입되었음-도 있고 해서 폴란드에 동화되기보다는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1938년의 폴란드 지도. 독일 및 소련과의 접경지대에 산맥 등의 자연적, 지형적 장애물이 발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출처: https://i.pinimg.com/)

  1939년 9월 1일, 나치독일은 폴란드군이 나치독일을 침공했다는 자작극을 빌미로,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 영토로 진격하였다.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된 것이었다. 폴란드군은 독일과 인접한데다 산업시설 등이 집중해 있던 서부전선에 병력을 배치하여, 동맹국인 영국, 프랑스의 참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방어작전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독일에게 선전포고만 했을 뿐, 나치독일에 대한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고 전세를 관망하기만 할 뿐이었다. 나치독일의 군사적 역량을 과대평가한데다, 이미 나치독일이 군사적 팽창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지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었다. 기갑부대와 공군 전력을 중심으로 한 나치독일의 기계화 전술, 기동전은 폴란드군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다. 폴란드 역시 군사력 확충과 전쟁 준비를 이미 해두고 있었지만, 경제적,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목표했던 군 현대화는 충실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폴란드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나치독일군은 빠른 속도로 폴란드군의 저항을 분쇄하면서 지휘 체계를 마비시켰다. 9월 중순에는 폴란드군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조직적인 군사 작전 능력이 크게 저하되는 수준에 이르었지만, 폴란드군의 당초 방어 계획과 달리 동맹군의 참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치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 영국과 프랑스의 방조 하에, 폴란드는 양면전쟁을 강요당하며 결국 나라를 잃고 말았다.(출처: Holocaust Encyclopedia)

  9월 17일에 이루어진 소련군의 침공은, 폴란드의 패망을 급속히 가속화시켰다. 소련은 폴란드 영내의 우크라이나계, 벨라루스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였다. 폴란드와 소련 간에 체결되었던 여러 조약들을 무시한, 국제법상 불법 침략이었지만 소련군의 폴란드 침공을 저지하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폴란드는 10월 6일에 결국 항복하였고, 이는 나치독일과 소련에 의한 분할 점령으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폴란드군 병력이 전사하거나 나치독일군,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수만명에 달하는 폴란드군은 폴란드 지도층 및 민간인들과 더불어 폴란드를 탈출하여 영국, 프랑스 등지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영국에 설치된 폴란드 망명 정부의 군대로 활동하면서, 영국군, 미군 등과 더불어 나치독일군을 상대로 용전분투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폴란드 분할 점령 후 악수하는 나치독일군(좌)과 소련군(우) 수뇌부(출처: https://enrs.eu/)
영국으로 망명하여 영국 공군 휘하에서 참전했던 폴란드 공군 조종사들. 이들은 뛰어난 비행 실력으로 많은 전과를 세워, 연합군의 찬사를 받았다.(출처: Historic UK)



  강대한 군대를 흔히 '백만 대군'이라는 수사로 표현한다. 그런데 폴란드는 백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나치독일과 소련의 침공에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이는 지리학,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나치독일, 그리고 소련의 폴란드 침공은,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의 방조에 의해 일어났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에 이어 폴란드까지 나치독일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 특히 프랑스의 방어전략 실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독일의 동쪽에 위치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와 더불어 나치독일을 견제, 압박하고 궁극적으로는 나치독일에게 양면전략을 강요해야 했다. 그런데 이 두 동맹국이 나치독일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사실상 방관함으로써, 프랑스는 나치독일이 서부전선, 즉 프랑스 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여지를 스스로 만들어준 셈이었다. 나치독일의 프랑스 침공때까지도 소련은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을 유지했기 때문에, 나치독일의 폴란드 점령은 나치독일이 프랑스 침공에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의 조성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프랑스가 2차대전 개전초 나치독일에게 허망하게 점령당한 원인은,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나아가 체코슬로비카아 병합-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치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분할(출처: 위키피디아)

    나치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가혹하게 통치했다. 나치즘은 폴란드를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으로 여겼던만큼, 폴란드인에 대한 탄압은 유대인 박해 못지않게 가혹했다. 나치 치하에서 폴란드인들은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기본권마저도 억압받았으며 극도의 탄압을 받았다. 심지어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당했던 폴란드인들도 적지 않았다. 소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폴란드의 재기를 막기 위해 카틴 숲 학살과 같이 폴란드 지도층을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폴란드인들이 나치독일에 대항해 일으켰던 1944년의 바르샤바 봉기에서도, 소련군은 이들을 돕기는커녕 방치하여 결국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2차대전 종전후 폴란드는 영토가 크게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폴란드 망명정부와 폴란드인들의 희생과 염원과 달리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2차대전이 폴란드의 영토를 어떻게 바꾸었는가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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