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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ul 08. 2020

나치즘의 지정학적 뿌리, 레벤스라움

나치즘의 탄생과 2차대전의 발발을 지리 사상의 관점에서 살펴보기

  2차대전사를  나치즘에 대한 이해는 2차대전의 이해에 있어 필수 불가결하다. 왜냐 하면 2차대전은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대전중 일어난 대규모의 전쟁범죄 또한 나치즘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2차대전이 끝난지 70년을 넘긴 오늘날에도 나치즘이 독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회에서 엄격하게 금지되는 까닭도, 나치즘이 극단적인 인종주의적‧전체주의적 사상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나치즘이 2차대전의 발발 및 각종 전쟁범죄, 반인륜 범죄와 밀접하게 관계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치즘은 지리학적 속성을 강하게 가진다. 사실 나치즘의 논리적 뿌리는, 19세기 말-20세기 중반에 걸쳐 서구 학계에서 유행했던 지리학(지정학) 개념인 레벤스라움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나치독일의 동유럽 침공과 2차대전의 전개 양상,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인종청소와 민간인‧포로 학살 또한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 확보라는 나치독일의 의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실 2차대전, 그중에서도 유럽에서의 전쟁은 나치독일이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 확보를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레벤스라움(Lebensräum)이란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 1844-1904)이 처음 제시한 지리학(지정학) 개념이다. 이 단어는 생활, 삶 등을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 Leben과 공간을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 Räum을 조합하여 만든 조어이다.  하지만 레벤스라움은 ‘생활 공간’ 정도로 번역될 만한 개념은 아니다. 왜냐 하면 레벤스라움이란 단순히 사람들의 생활에 필요한 장소나 공간 정도의 의미를 넘어, 국가나 민족 집단이 인구를 부양하고 국력을 신장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영역을 지칭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라첼은, 영토 확보가 국가, 민족집단 등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는 지정학적 관점을 발달시켰다. 국가를 영토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유기체적 집단으로 간주하였고, 지속적인 영토 확보가 이루어질 때 국가와 민족이 존속 및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국가가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고 외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증가하는 인구가 이주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영토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처럼 국가나 민족집단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영토가 바로 레벤스라움이다.

  라첼은 레벤스라움의 적정 규모는 클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인구 규모와 관련된 요구치를 따른다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그리고 국가나 민족집단의 정체성을 절대 불변한다고 간주하지 않고, 이주에 따라 문화의 융합과 변동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즉, 슬라브 계열의 민족집단이나 유대인 등의 절멸을 기도했던 극단적인 인종주의 색채를 띄었던 나치즘, 그리고 나치독일의 팽창주의나 영토정책과는 차별성을 가진다. 라첼의 지정학과 레벤스라움 개념이 나치즘이나 나치독일의 영토정책보다 온건하고 현실적으로 타당했음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레벤스라움은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의 ‘약육강식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은유가 시사하듯, 기본적으로 국가나 민족집단의 생존과 존속에 필요한 레벤스라움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나 민족을 병합하거나 정복해도 좋다는 논리를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구 규모와 그에 따른 다양한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레벤스라움 확보에 실패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타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질 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문제까지 비화함으로써 결국 그 국가는 쇠퇴‧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배타적인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의 성격이 농후한 레벤스라움은, 현대 사회와 현대 지리학의 흐름과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였던 19세기 말-20세기 초‧중반에는 전 세계 지리학자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중에는, 나치즘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인 카를 하우스호퍼(Karl Ernst Haushofer, 1869-1946)도 있었다. 하우스호퍼는 1차대전에 참전했던 군인 출신(최종 계급 육군 소장)이었으며, 일본에 군 관찰관(Militärbeobachter)으로 파견된 경력도 갖고 있었다. 군인 신분이었던 1913년 뮌헨대학에서 일본의 군사력과 지정학적 위치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1차대전 종전 후인 1919년 뮌헨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지정학 연구를 하였다.

카를 하우스호퍼(좌)와 루돌프 헤스(우)(출처: The Diplomat, 2015년 3월 10일, "Karl Haushofer and the rise of the Monsoon"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적 이론, 그중에서도 레벤스라움 개념은 나치즘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제자이자 훗날 나치독일 부총통을 역임하는 인물인 루돌프 헤스(Rudolf Walter Richard Heß, 1894-1987)를 통해 히틀러와 인연을 맺었던 하우스호퍼는, 뮌헨 폭동으로 란즈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된 히틀러에게 지정학, 국제관계, 정치학 등의 지식을 전수하였다. 1차대전은 2차대전과 달리 독일제국이 연합군의 침공을 받기는커녕 패망 직전까지도 전투에서는 연승을 거두기까지 했기 때문에, 전후 자국의 패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독일인들이 많았다. 하우스호퍼도 그런 부류의 사람에 속했기에, 뮌헨 폭동을 일으킨 히틀러와 헤스에게 공감하는 부분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 및 나치즘에 미친 하우스호퍼 레벤스라움의 영향은 이때를 계기로 이루어졌다고 판단된다. 『나의 투쟁』에는 동유럽으로 진출하여 게르만 민족의 레벤스라움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나치독일은 레벤스라움의 확보를 프로파간다 삼아 정권을 획득‧강화했고, 팽창 정책을 실시했으며, 침략 전쟁을 감행했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폴란드 침공, 소련 침공으로 이어지는 나치독일의 동유럽 침략 전쟁 역시, 레벤스라움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무엇보다 하우스호퍼가 히틀러 집권 후 나치독일로부터 학술원 원장을 맡았다는 사실, 그리고 히틀러가 주데텐란트(Sudetenland)의 독일계 주민 보호를 구실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했을 때 하우스호퍼가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성취되었다고 기뻐했다는 사실은,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이 나치즘과 나치독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국가와 민족집단이 생존 및 번영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영역 확보가 필요하다는 레벤스라움의 논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나치독일의 레벤스라움은, ‘동방 노선’과  ‘동방정책’, 그리고 ‘동방에서의 생존권 확보’를 논했던 『나의 투쟁』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동유럽을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으로 식민화하여 확보해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졌다. 히틀러와 나치당 입장에서 동유럽은 독일 국민, 그리고 독일 영토 밖에 거주하는 독일 민족들의 인구를 부양하고 독일 민족의 발전에 필요한 식량과 자원을 공급할 ‘텅 빈’ 광대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이들은 고대 게르만 민족의 선조들이 슬라브 민족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게르만 영토를 확보하여 게르만 문화를 꽃피웠던 것처럼, 그리고 중세의 독일기사단이 발트해 연안 지역과 프로이센을 식민화하여 독일 민족의 영역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동유럽을 식민화하여 궁극적으로는 독일 민족이 이주하여 독일 민족의 문화가 융성할 레벤스라움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인구부양을 위한 레벤스라움 확보의 필요성을 선전하는 나치독일의 포스터(출처: www.thoughtco.com/lebensraum-eastern-expansion-408124)

    하지만 하우스호퍼의 지정학과 레벤스라움이 그대로 나치즘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우스호퍼가 나치독일과 히틀러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실세’였다는 일설이 있기도 하지만, 그의 나치즘과 히틀러, 나치독일에 대한 영향력이 절대적이지만은 않았다. 사실 히틀러는 란즈베르크 출감 이후 하우스호퍼와 만난 횟수가 10여 회에 불과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1941년 헤스가 돌연 영국으로 망명하는 기행을 저지른 뒤에는 나치독일 내에서의 입지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무엇보다도 나치즘적 레벤스라움은 하우스호퍼 레벤스라움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로부터 변질된 측면도 적지 않다. 나치즘적 레벤스라움은 기본적으로 우생학과 인종주의를 전제하였다. 즉, 독일의 영토 확보를 넘어, 독일 민족의 인종적‧민족적 순수성을 저해하는 ‘열등한 민족’의 절멸까지도 전제하였다. 이는 레벤스라움 확보를 위한 식민지 쟁탈전이나 전쟁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민족을 절대 불변하고 순수한 것이 아니라 이주와 정착 과정을 통해 융합‧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던 라첼, 하우스호퍼 등의 레벤스라움과 차별화되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나치즘적 레벤스라움은 영토나 영역의 의미를 넘어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 즉, 나치독일은 레벤스라움을 국가와 민족의 존속과 발전을 위한 영토 또는 영역 차원을 넘어, 레벤스라움과 국가를 동일시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레벤스라움의 침범이나 훼손은 영토 상실을 넘어서 국가라는 생명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한 상처로 여겨졌다. 따라서 국가와 민족, 레벤스라움이 ‘죽지’ 않게끔 이 같은 레벤스라움의 침범과 훼손을 수복하고, 레벤스라움을 해치거나 해칠 수 있는 세력이나 민족집단 등을 조기에 제거하는 것 또한 국가의 중요한 과제로 여겨졌다. 단적으로 나치독일은 1차대전의 패배로 인해 폴란드에 할양해야 했던,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분단하는 위치에 자리 잡은 영역이었던 폴란드 회랑을 단순한 영토 상실을 넘어 독일과 독일 민족을 죽음으로 몰고갈 치명상으로 간주했다. 이는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일어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1차대전 이후 독일 영토를 분단하는 형태로 획정되었던 폴란드 회랑. 회랑 동서로 'Germany' 표기가 보인다.

 독일 민족의 단일 레벤스라움을 나치독일과 히틀러가 독재를 해야, 그리고 새로 얻은 레벤스라움이 독일 민족과 독일 문화의 순수성을 담보할 수 있으려면, ‘열등한’ 민족들을 제거 및 절멸해야 한다고 보았다. 나치독일의 주요 선전구호 가운데 하나였던 ‘단일민족, 단일제국, 단일총통(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라는 구호에는, 히틀러와 나치당의 독재 하에 이 같은 독일 민족의 단일 레벤스라움을 확보‧구축해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아래에 인용한 나치독일의 선전가 「국민에게 총을!(Volk ans Gewehr!)」의 가사는, 이처럼 독일이 동유럽을 식민화하여 패전으로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하고 독일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가져와야 한다는 논리가 잘 나타나 있다.  

그대는 자유와 태양의 징표인 동방의 아침놀을 보는가? 우리는 살아있을 때에도 죽은 뒤에라도, 언제 어디서라도 항상 굳게 단결한다. 의심과 다툼을 멈추라, 우리 핏줄에는 게르만 민족의 피가 여전히 흐르고 있으니. 국민에게 총을! 국민에게 총을!
'단일민족, 단일제국, 단일총통'의 구호가 적힌 나치당의 선전물(출처: 영국 BBC 웹사이트)

  지금까지 살펴본 나치즘적 레벤스라움은, 나치독일이라는 왜곡되고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지배하는 정치체제가 등장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의 확보라는 점에서, 나치독일의 동유럽과 소련 침공 및 동유럽 민족집단에 대한 인종청소가 자행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나치독일은 독소전쟁 개전 이후 소련 점령지 정책의 총괄 계획인 「동방 일반계획(Generalplan Ost)」를 수립하여 유럽 내에 위치한 소련 영토를 정복하고 슬라브 민족을 박멸한다는 계획을 명문화했다. 이에 따라 동유럽과 소련 영내의 나치독일 점령지 내에서는 수백만 명 이상의 전쟁포로와 민간인들이 ‘열등’한 슬라브 민족이라는 이유로 인해 희생당했다. 나치독일은 슬라브 민족의 절멸을 위해 폴란드군, 소련군 전쟁포로들을 극심하게 학대했으며, 심지어는 아우슈비츠 등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죽음을 맞이한 동유럽계 전쟁포로와 민간인들도 적지만은 않았다.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 내에서 이들 ‘불순’하고 ‘열등’한 민족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리고 나치독일은 현지인들이 강제 이주당하거나 학살당하여 ‘제거’된 점령지에 독일인들을 이주시켜, 군사적으로 정복한 동유럽 영토를 ‘순수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으로 변모시키려는 시도를 대전 기간 동안 이어갔다.

나치독일의 동방 일반계획이 상정한 나치독일의 궁극적인 레벤스라움 영역(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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