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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ul 10. 2020

안슐루스의 지리학

나치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나치즘적 레벤스라움에 입각한 영토정책은,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침략전쟁으로 실현되었다. 그 신호탄은 '안슐루스(Anschuluß: 본래 독일어로 결합, 연결, 병합 등을 의미하는 일반명사임)'라고도 불리는, 1938년의 오스트리아 합병('안슐루스'라는 용어는 '오스트리아 병합'을 의미하는 독일어 'Österreich Anschuluß'에 유래함)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문화권에 속한 국가로 국민의 대부분이 독일어를 구사하는 독일인이며,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은 19세기에 프로이센과 독일 통일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프로이센과의 경쟁에서 패하여 독일 제국에서 배제되기는 했지만, 독일이라는 정체성이 여전히 강했고 독일인이 주를 이루는 국가였다. 게다가 1차대전 종전 후 합스부르크 제국의 와해와 함께 신생 오스트리아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오스트리아의 독일 정체성은 더욱 강해졌다. 기존에 합스부르크 제국을 구성하던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의 비독일계 국가들이 독립해 버렸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마치 ‘독일어를 사용하고 독일인이 거주하는 독일 국경 바깥의 나라’와 같은 양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을 확보하여 독일과 독일 민족의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는 히틀러와 나치독일 입장에서는 매우 유리한 빌미를 만들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나치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은 나치독일의 기대 이상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1차대전 종전과 합스부르크 제국 해체 후 오스트리아 국내에서는 독일과의 합병을 바라는 여론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에도 이를 시사하는 조항이 언급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국제연맹의 조항 등을 통하여 양국의 합병을 저지하려 하였다. 심지어 1930년대에 나치독일의 중요한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조차 양국의 합병을 공공연하게 반대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나치독일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적극 개입하지 않았고, 이탈리아 역시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인해 나치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문제에 적극적인 조치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는 1930년대 나치즘 정당이 득세한 상태였다. 이미 1934년에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치즘 정당인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노동당이 엥겔베르트 돌푸스(Engelbert Dollfuß, 1892-1934) 총리를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키기까지 한 상태였다. 이 쿠데타는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후에도 오스트리아에서 나치주의자들의 준동이 근절되지는 못했다. 이는 나치독일에는 호재로 작용했다. 국내에서의 나치즘 발호와 나치독일의 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정부는 결국 나치즘을 합법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나치주의자이자 나치독일에 포섭된 인물이었던 아르투르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ß-Inquart, 1892-1946)는 오스트리아 내무장관을 거쳐 총리까지 올라, 나치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독일군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영내로 진군하였고, 동년 4월에 실시된 국민투표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독일령으로 합병되었다.

안슐루스 당시 빈에서 카 퍼레이드를 하는 히틀러(일어선 사람)와 자이스-잉크바르트(히틀러 우측)(출처: https://www.dw.com/)

  나치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은 사실 군사적인 정복활동의 결과라기보다는, 정치적, 그리고 지리적 요인에 의해 이루어진 측면이 크다. 사실 1938년의 나치독일군은 재건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전 경험 또한 부족했기 때문에, 군 기강의 측면에서나 전술 및 보급의 측면에서나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역사적, 지리적, 정치적 이유로 인해 독일과의 동질성이 적지 않았고, 특히 1930년대 후반에는 나치독일과의 합병을 바라는 여론이 비등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나치독일의 레벤스라움 확보를 위해 필수적으로 점유해야 하는 영역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치독일은 오스트리아군과의 무력 충돌 없이, ‘합법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수 있었다. 아래에 인용한 하인츠 구데리안(Heinz Wilhelm Guderian, 1888-1954) 장군의 기록은, 오스트리아 병합 당시 다수의 오스트리아인들이 독일군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리고 오스트리아인들이 독일과의 병합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빈에서는 합병을 축하하는 대규모 횃불 행렬이 막 끝난 상태라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쌓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독일군 선발대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우레와 같은 환호가 쏟아져 나온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국립오페라하우스 옆에서는 선발대는 오스트리아군 군악대의 취주악에 맞춰 오스트리아군 빈 사단의 슈튐플 장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분열 행진을 했다. 행진이 끝나자 다시 열광적인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나는 인파에 거의 들린 채 숙소까지 갔고, 내 외투의 단추들은 순식간에 빈 사람들의 기념품으로 바뀌었다. 나와 우리 군인들은 빈 사람들의 뜨거운 호의를 경험했다.(하인츠 구데리안 저, 이수영 역, 2014, 구데리안-한 군인의 회상, 길찾기, 73쪽)
안슐루스로 인해 '대독일(Groß Deutschland)'이 탄생했다는 나치독일의 포스터(출처: http://www.germanpostalhistory.com/)

  나치독일의 다음 목표는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중세 시대부터 1918년 독립하기 직전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했던만큼, 독일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았지만 독일과 밀접한 교류를 맺어 왔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는 300만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의 총인구가 약 1,200-1,300만 명, 그중 체코인이 약 660만 명, 슬로바키아인이 약 200만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독일 인구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은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접경지대였던 주데텐란트(Sudetenland)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은 나치독일 입장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들을 보호하고 나아가 이들이 독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영역, 즉 레벤스라움을 체코슬로바키아 영역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빌미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독일인 자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었고, 히틀러는 이를 구실로 주데텐란트,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독일 영토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물론 독일의 진정한 목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와 산업시설을 흡수하고 영내의 비독일계 주민들을 절멸시켜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의 레벤스라움을 만드는 데 있었다.

주데텐란트 지도(황토색)(출처: https://80447552.weebly.com/background.html)

  사실 1930년대 후반의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 입장에서 전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산업 중심지였던 이 나라는 독립 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해 있었다. 군사력 또한 약하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최대 100만 명 전후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국토의 군사요충지는 견고하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군수산업 또한 발전하여, 일부 체코제 무기와 군장비는 독일제를 압도하기까지 하였다. 더불어 193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는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나치독일의 위협을 예상하고, 프랑스, 독일, 소련 등과 공수동맹을 체결해둔 상태였다.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1938년 9월 총동원령을 선포하여, 100만에 달하는 병력의 동원 준비를 마치기까지 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군 기갑부대의 모습.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얕볼 수준의 군대가 아니었다.(https://www.quartermastersection.com/czechoslovakia)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독일군과의 변변한 전투 한 번 없이 독일에 병합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외교적 문제,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내부의 지리적 문제와 관계가 있다. 우선 체코슬로바키아와 공수동맹을 맺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정작 나치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및 병합 의도를 노골화했을 때 아무런 군사적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대공황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데다 전쟁 준비가 미흡했던 탓도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 모두 막대한 인명의 소모가 이어졌던 1차대전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던 탓도 있었다. 가파른 속도로 경제력과 군사력의 성장을 기록하던 독일의 국력과 군사력을 영국과 프랑스가 실제보다 과대평가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게다가 주데텐란트를 중심으로 독일 내부에 많은 수가 거주하고 있던 독일계 주민들도 문제였다. 이들의 자치권, 그리고 독일로의 병합 주장은 체코슬로바키아 서부의 슬로바키아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결국 1938년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 1869-1940)의 주도로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4개국이 체결한 뮌헨 협정을 통해, 유럽의 평화 보장을 조건으로 나치독일의 주데텐란트 합병이 결정되었다. 이듬해인 1939년 나치독일은 슬로바키아인들을 체코 정부의 압제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슬로바키아를 분할시켜,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복속시켰다.

  이처럼 1938-39년에 걸쳐 나치독일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인접국인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할 수 있었다. 그 배경에는, 독일계 민족의 지리적 분포, 그리고 이를 정치와 전쟁에 이용한 민족 분포의 전력과 정치도 자리잡고 있었다. 독일인들의 영역이었던 오스트리아인들의 다수는 독일과의 병합을 바랐고, 자국에 진주했던 독일군들을 환영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나치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국내 민족집단의 복잡한 지리적 분포를 정치적‧전략적으로 이용하였다. 이를 통해서 나치독일은 동유럽을 식민지배해서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을 확보한다는 지정학적 목표의 첫 단계를 완수한 듯하였다.

주데텐란트에 진주한 나치독일군에 환호하는 독일계 주민(좌)과 오열하는 체코계 주민(우)(https://ww2db.com/image.php?image_id=2221)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에 성공한 히틀러의 다음 목표는, 이어지는 글에서 상세히 다룰 폴란드였다. 그리고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2차대전이 발발하였다. 이후 프랑스까지 굴복시킨 나치독일은, 항공공습만으로 영국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계획(영국본토항공전, 1940년 6월-1941년 6월)에 실패한 뒤 소련 침공을 단행하였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동유럽에서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을 확보한다는 나치독일의 목표와도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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