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병의 지워지지 않는 문장
계절이 바뀌는 소리는 바람보다 먼저 서류봉투 사이에서 들려왔다. 퇴직 후, 나를 정의하던 수많은 수식어가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한때는 누군가의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조직의 심장을 뛰게 하던 엔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낡은 노트북 한 대와, 매일 아침 습관처럼 확인하는 구인 사이트의 ‘미열람’ 숫자들뿐이다.
세상은 나를 향해 ‘계절이 지난 옷’이라 속삭이는 듯하다. 한때는 누군가의 체온을 지키고 맵시를 뽐내던 근사한 외투였으나, 이제는 유행이 지나 장롱 깊숙이 밀려난 처량한 옷가지. 이력서를 쓰는 행위는 이제 내게 단순한 구직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 내 존재를 증명하려는 외로운 투항서이자, "나 여기 살아있소, 아직 내 안에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소"라고 외치는 무언의 비명이다. 하지만 그 비명은 번번이 거대한 침묵의 벽에 부딪혀 메아리조차 남기지 못한 채 되돌아온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상처에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숨기는 기술이 느는 것일 뿐이다. 거절의 메시지가 쌓일수록 내 마음의 안방에는 서늘한 한기가 돌았다. '과연 나에게 다음 장이 남아 있긴 한 걸까?'라는 의문이 매일 밤 천장을 유령처럼 떠돌았다.
그날은 유독 하늘이 시릴 만큼 푸르렀다. 오랜 침묵을 깨고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는 가뭄 끝에 만난 기적 같은 단비였다. "작가님 같은 경력과 깊이를 가진 분이 꼭 필요합니다. 저희 공고에 이력서를 넣어주시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정중했고, 나를 향한 예우가 담겨 있었다. 나는 간만에 빳빳하게 다린 셔츠를 꺼내 입었다. 구두 설포를 닦으며 거울 속의 나에게 '아직 죽지 않았다'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설렘이라는 감정이 이토록 낯설고도 뜨거웠던가.
하지만 면접장에 들어선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를 맞이하는 그들의 눈빛에는 ‘기대’가 아니라 ‘귀찮은 숙제’를 해치우려는 지루함이 서려 있었다. 질문은 날카롭지 않았고,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의 시선은 이미 다음 서류로 넘어가 있었다. 면접관들의 대화 속에서 나는 내가 그 자리에 왜 불려 왔는지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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