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삐뚤빼뚤하지만 진심을 담은 일기장

그래도 기차는 간다

by 시가 별빛으로 눕다

1. 받아쓰기 시험지 위의 눈물

초등학교 1학년 교실, 갓 입학한 아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받아쓰기'다. 선생님이 불러주는 문장을 제때 적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들의 마음을, 나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다시금 절감하고 있다.

퇴직 후 새롭게 마주한 사회라는 교실에서, 세상은 내게 너무 빠른 속도로 문장을 불러준다. "이건 이렇게 처리하시고요, 저건 저 플랫폼을 활용하세요." 젊은 동료의 입에서 쏟아지는 단어들은 내가 평생 써온 사전에는 없는 외계어들이다.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펜을 쥔 손에 힘만 주다가, 결국 하얀 종이 위에 삐뚤빼뚤한 궤적만 남긴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채점자였다. 누군가의 기안문에 붉은 펜으로 선을 긋고, '다시 해오게'라는 한마디로 타인의 노력을 평가하던 사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빵점 맞은 시험지를 가슴에 품고 하굣길을 걷는 겁먹은 초등학생이다. 14권의 저서를 펴낸 작가라는 자부심도, 수십 년간 쌓아온 경력이라는 훈장도, 이 낯선 '사회초년생'의 교실에서는 무거운 가방 속 낡은 교과서만큼이나 거추장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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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데기, 그 비좁고 뜨거운 감옥

사람들은 흔히 퇴직을 '해방'이라 부르지만, 내게 그것은 '고립'이었다. 익숙했던 조직이라는 고치가 사라진 뒤, 나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단단한 껍데기 속에 숨어 있었는지 깨달았다. 명함에 적힌 직함은 나를 보호하는 갑옷이었고, 매달 통장에 찍히던 숫자는 나의 존재 증명이었다.

하지만 그 갑옷을 벗겨내자, 속살만 남은 번데기가 드러났다. 번데기의 시간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다. 그 안에서는 과거의 장기들이 녹아 없어지고, 새로운 날개를 만들기 위한 치열한 화학 반응이 일어난다.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뜨겁고 아프다.

"과거에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나는 스스로의 뺨을 친다. 그 생각이야말로 나를 다시 날지 못하게 만드는 낡은 껍데기의 잔해이기 때문이다. 껍데기를 벗어내는 아픔은 생살을 찢는 것과 같다. 어제의 나를 부정해야 오늘의 내가 겨우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이 역설. 나는 지금 그 지독한 번데기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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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알림장에 적은 고백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는 늘 내 알림장을 확인하며 말씀하셨다. "글씨 좀 반듯하게 써라, 마음이 삐뚤어지면 글씨도 삐뚤어지는 법이야."

오늘 나는 일기장을 펴고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 문장을 적어본다. 여전히 글씨는 제멋대로 휘어지고, 지우개로 박박 문지른 자리는 종이가 일어나 너덜너덜하다. 하지만 이 삐뚤빼뚤함이야말로 나의 솔직한 자화상이다. 반듯하게 정렬된 워드 프로세서의 글자들 뒤에 숨어 있던 가짜 인생이 아니라, 흔들리고 방황하면서도 어떻게든 한 자 한 자 눌러 쓰려는 나의 진심이다.

"나는 오늘 복사기 앞에서 길을 잃었다. 젊은 팀장의 지시를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해 서너 번을 다시 물었다. 자존심이 상해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나는 끝내 '모르겠습니다, 다시 알려주세요'라고 말했다."

이 문장을 적는 데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 삐뚤빼뚤한 고백을 마친 뒤, 나는 내 등 뒤에서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낡은 껍질이 깨지고, 아주 조금은 시원한 바람이 속살에 닿는 느낌. 사회초년생이라는 비참함은 사실, 다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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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의 장례식

한때는 그 껍데기가 나인 줄 알았다.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여미던 빳빳한 깃과 소매 끝에 달린 단추들, 그것이 나를 지탱하는 뼈대인 줄로만 믿었다. 30년 동안 공들여 쌓은 고치는 견고하고 아늑하여, 나는 그 속에서 영원히 안전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듯 고치는 찢어졌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에 바스러진 껍데기를 두고 광장으로 나왔을 때, 나는 비로소 보았다. 햇살 아래 드러난 나의 살갗이 얼마나 무르고 연약한지를. 갓 태어난 짐승처럼 작은 바람에도 온몸이 떨리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비수처럼 꽂혔다.

껍데기를 벗어내는 일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장례식에 가까웠다. 익숙했던 권위를 묻고, 능숙했던 나를 지우고, '왕년'이라는 이름의 비석을 깨부수는 일. 그 아릿한 통증 끝에 남은 것은 삐뚤빼뚤하게 쥐어진 연필 한 자루와 하얀 종이 한 장이었다.

다시 초등학교 1학년의 마음으로 앉아, 나는 내 생의 가장 서툰 문장을 적는다. 글씨는 제멋대로 춤을 추고 문장은 자꾸만 툭툭 끊기지만, 이것은 가짜 나를 버리고 얻은 첫 번째 진실이다. 고통은 날개를 빚는 재료였음을, 껍데기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하늘이 눈에 들어왔음을 나는 이제야 쓴다.

비좁았던 감옥을 깨고 나온 번데기의 등 위로, 낯선 생의 빛이 내려앉는다. 아프다, 그래서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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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비가 되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모두 화려한 나비가 되어 비상하는 순간만을 꿈꾼다. 하지만 이 시리즈물을 쓰며 나는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날개의 색깔이 아니라, 스스로 고치를 뚫고 나오려는 그 의지 자체라는 것을.

14권의 책이 나를 증명해 주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15번째 책은 이 삐뚤빼뚤한 일기장에서 시작될 것이다. 맞춤법이 틀려도 좋고,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도 상관없다. 세련된 문체보다 중요한 것은 갓 태어난 생명처럼 파르르 떨리는 이 진심이니까.

나는 다시 연필을 깎는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깊은 균열을 내야지. 껍데기를 벗어던진 자리에 흉터가 남겠지만, 그 흉터야말로 내가 다시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나는 8살 아이처럼, 다시 세상을 향해 삐뚤빼뚤한 인사를 건넨다.


"안녕, 세상아. 나는 오늘부터 진짜 나로 살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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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2년여 동안 요양시설에서 치매 노인들과 함께 하였고 현재는 AI,인권, 노인의 성,치매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강의와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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