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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서울 i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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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이 Apr 15. 2021

가장 행복한 나라에서 제일 우울했던 나에게

내게 위로가 된 말 한마디

[트리거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증의 우울증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방 안에 박혀 최대한 우울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의미한 영상 보는 것으로 나는 하루하루를 겨우 보냈다. 이유 없이 자주 배가 아팠고, 심각한 병은 아닐까 걱정도 심해졌다. "우울은 한데, 나는 그냥 우울을 핑계 삼아 현실 도피하고 싶은 것뿐 일거야. 한심하게. 다들 우울해도 잘 살아가잖아. 괜히 병원에 갔다가 내가 우울증이 아니면? 이 핑계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 들통나면 어떡해." 그랬다. 무지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프더라도 학교 수업을 빼먹는 게 뒤쳐질까 봐 조바심이 나서 집을 나서던 내가 아침에 잠에서 깨지 못해 학교를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져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게을러서 그래." 구체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나를 발견하고 나서야 나는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이렇게 생각했다. "죽어도 한국 가서 죽어야지, 여기서 죽으면 영어도 못하는 우리 엄마는 어떡하지." 지금은 안돼. 자살방지 핫라인에 전화를 걸었다. 덴마크어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울어서 미안하다고,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전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한참을 울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우울증 때문에' 병원엘 갔다.


  결론적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의 그분은 따뜻했지만, 내가 마주한 나의 GP는 형식적이고 시간에 쫓기는 듯했다. 그는 내가 단순한 비타민D 결핍 때문에 오는 흔한 계절성 우울감을 겪는 것 일거라고 했다. 그렇게 반년이 흘렀다.


  우울증 진단은 한국에 와서 받았다. 그 시기 한국에서의 나의 기억들은 수성펜으로 적혔다가 물에 번진 종이 같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멍 해져서 생각을 오래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좋았다. 그때의 나는 생각을 깊이 하면 할수록 내 스스로에게 어떻게 하면 더 상처되는 말을 할까 고민하는 사람 같았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항우울제 먹는 것을 털어놓았다. 내 스스로도 멍한 내가 낯선데 혹시라도 멍하고 반응이 느린 내가 이상하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또 그게 내가 공유할 수 있는 나의 일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이 짐짓 놀란 듯 보였다. '왜 이런 얘기를 나한테까지 해?'라는 말풍선이 몇몇의 얼굴 위에 떠있었다.


  내 스스로도 내가 우울증이라고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가기까지 스스로를 설득하는 시간 동안 나는 <우울증도 감기와 같다(개인적으로 동의는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가장 행복한 나라인 덴마크는 가장 항우울제를 많이 복용하는 나라이기도 하다>라는 말에 익숙해져서 "항우울제 복용"이라는 말이 주는 그 이상한 어두운 느낌과 터부시 되는 분위기를 잊고 있었다. 그런 반응들이 이해가 되었고 말로 터져 나오지 않은 말풍선들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그저 나의 아픔에 공감해주고 격려해주고 비슷한 경험이나 이야기 못한 슬픔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고마웠다.

C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내가 아프다고 광고를 해서인지, 아니면 항우울제의 영향이었는지, 아니면 기억의 미화인지, 이 시기에 주변 사람들이 평소보다 훨씬 다정했다고 기억한다. 번진 수성펜은 따뜻한 색이었던 것 같다.


  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날. 언니가 준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무 힘들면 그냥 한국에서 살면 안 돼? 우리 같이 비혼 타운 만들어서 아침마다 수영하고 놀자."


  밥 한번 먹자 같은 백지 수표 같은 말. 당장 반년 후도 그려지지 않던 나에게 늙은 내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덴마크와 한국 사이의 8000km의 거리와 4년의 시간만큼이나 한국에서의 친구들과도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었다. 이상하게도, 백지 수표 같은 그 말은 색연필 같았다. 젖은 종이도 말려서 그 위에 다시 그리면 돼. 오랜만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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