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PD의 맛있는 이야기
서울 외곽 지역에도 멋진 평양냉면 노포들이 있다. 1968년 개업한 구의동 어린이 대공원 부근의 서북면옥이 대표적이다. 서울 외곽의 평양냉면 노포의 특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값이 싸다는 점, 그리고 서울 사대문 안 노포에 비해서 단맛이 강하다는 점이다. 서북면옥의 냉면도 이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12,000원으로 평양냉면을 즐길 수 있다. 값도 값이지만 서북면옥의 장점은 평양냉면 초심자도 친근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육향이 강해도 초심자에겐 심심할 수 있는 평양냉면이다. 하지만 서북면옥 냉면은 타 냉면 노포에 비해 단맛이 강하다. 이것도 부족하다 싶을 땐 냉면무를 충분히 넣으면 된다. 유명 평양냉면 집 중 서북면옥의 냉면무가 가장 달다. 냉면무를 넉넉히 넣으면 단짠단짠한 평양냉면으로 재탄생이 가능하다.
서울 외곽으로 갈수록 냉면 육수의 맛이 달아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평양냉면 기준이다. 시중의 고깃집 물냉면과 비교하면 서북면옥의 냉면도 엄청 심심한 맛이다. 외곽 지역의 냉면 육수에 단맛이 강해지는 이유는 주 소비층의 입맛과 관련이 있다. 땀을 많이 흘리는 노동 계층이 주식 대용으로 냉면을 소비하면 그들의 입맛에 맛게 냉면이 진화하기 마련이다.
양평의 옥천냉면도 서북면옥과 유사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단맛이 강하다. 물론 옥천냉면은 뿌리를 황해도 해주냉면에 두고 있어서 정통 평양냉면과는 다른 범주이다. 간장과 액젓으로 육수의 밑간을 하기 때문이다. 양평의 옥천냉면도 과거 땀 꽤나 흘리는 지역 농민들과 군인들이 주 소비층이었다. 옥천냉면은 면의 굵기도 두껍고, 양념무의 간도 세다. 평양냉면이 심심한 사람들도 거부할 수 없는 친근함이 가득한 맛이다.
단맛 때문에 슴슴하지 않은 냉면은 평양냉면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평냉 순수주의자들이 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90년 전에도 그랬다.
“평양냉면, 해주냉면 다음으로 서울냉면을 손꼽을 만큼 이제는 서울냉면이 냉면 축에서 버젓하게 한몫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성냉면(서울냉면)은 말하자면 평양냉면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매일신보. 1936.7.23)
"냉면’이라는 말에 ‘평양’이 붙어서 ‘평양냉면’이라야 비로소 어울리는 격에 맞는 말이 되듯이 …" (조선일보. 1938.5.29)
“평양냉면, 냉면옥(冷麪屋)에는 흔히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평양냉면이 아무리 맛있은들 삼팔선을 넘어 운반해 왔단 말인가요. 서울서 만드는 냉면을 평양냉면이라는 새빨간 거짓말” (경향신문. 1948)
냉면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평양냉면, 서울냉면 논쟁이 다 있었을까. 90년 전에도 '여름 한철 더군다나 각 관청 회사의 점심시간이면 냉면집 전화통에서는 불이 날 지경'(매일신보. 1936.7.23)이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맛있는 건 인기가 높다.
평양냉면이 전국으로 전파되는 계기는 한국 전쟁이다. 북한 실향민들이 피난지에 정착 후 생계를 위해 냉면집을 열었다. 대전의 사리원면옥, 숯골원 냉면, 군산의 뽀빠이 냉면, 경북 풍기의 원조 서부냉면, 대구 대동면옥 등이 실향민들의 대표적 노포들이다. 이러한 평양냉면 전국화와는 다른 결을 가진 지역이 있다. 인천이다.
인천은 1883년 인천항 개항과 함께 평안도 지역민들이 많이 유입되었고, 그들 또한 인천에 냉면집을 개업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정옥과 인천관
"1920년대 후반 인천에서 냉면의 중심지는 현재의 동인천 일대와 배다리 지역이었다. 용동에는 평양관(平壤館)과 경인관(京仁館)이, 경동에는 신경관(新京館)이, 답동에는 사정옥(寺町屋)이 있었으며, 금곡동에는 풍성관(豊城館)과 인천관(仁川館) 등이 있었다. 이곳의 냉면은 대체로 평양냉면이었다" (인천 in. 2024.9.27)
현존하는 인천의 평양냉면 노포로는 경인면옥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집 음식은 수준급이다. 1944년 종로에서 평양냉면 집을 개업 후 1946년 인천 신포동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업력 80년인 경인면옥은 맛의 균형감이 뛰어나다. 은은한 육향과 단맛이 도는 육수와 메밀향 충만한 면의 조합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노르스름한 녹두 지지미도 지나칠 수 없다. 폭신한 식감 속에 고소함이 가득하다. 소박하고 깔끔한 맛이다. 평양냉면 한 그릇에 녹두 지지미 한 접시로 편안한 포만감을 가질 수 있다.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한정 판매하는 갈비탕도 맛볼 수 있다. 갈비 건더기는 실하고 국물은 맑고 진하다. 진국이란 말을 붙이기에 모자람이 없다. 평양냉면으로 해장을 할까, 갈비탕으로 속을 풀까 고민하다 녹두 지지미에 한 잔 하게 되는 집이 경인면옥이다.
평양냉면 마니아도 인천에선 잠시 한 눈 팔아도 괜찮다. 백령면옥이 있다. 황해도식 해주냉면을 하는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황해도 해주는 메밀의 주요 산지여서 해주냉면이 이름난 냉면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한국 전쟁 후 황해도 실향민들이 백령도에 자리를 잡고 냉면을 만든 것이 인천 지역 해주냉면의 뿌리가 되었다. 백령면옥도 그 뿌리에서 발원된 냉면 노포 중 하나다.
백령면옥의 물냉면은 뽀얗고 달다. 살얼음 가득한 육수는 사골 국물을 베이스로 간장과 까나리 액젓으로 간을 맞췄다고 한다. 평양냉면의 밍밍한 맛이 어색한 사람도 백령면옥의 물냉면은 쉽게 친해질 수 있다. 육수맛이 시원 달콤하다. 친숙한 만큼 평범할 수도 있는 백령면옥 물냉면을 수준급으로 끌어올리는 힘은 면의 맛이다. 백령도에서 재배한 메밀로 자가 제면하는 면의 구수함이 압도적이다. 툭툭 끊어지는 메밀면 특유의 식감도 좋고, 혀뿌리에 남는 은은한 단맛도 좋다. 단맛의 육수와 구수한 메밀면의 조화는 평양냉면에서는 찾기 어려운 신선함이다. 백령면옥의 시그니처 메뉴 중에 반냉면이 있다. 물냉면에 비빔냉면의 양념장을 넣은 메뉴다. 어릴 적 동네 시장 입구의 분식점 냉면을 추억하는 중장년에겐 선물 같은 맛이다.
황해도의 해주냉면이 까나리 액젓으로 육수 맛을 냈는지 확인해 주는 문헌은 없다. 유추하건대 황해도 실향민들이 백령도의 식재료 상황에 맞게 응용한 것이 현재에 이르렀을 것이다. 부산 밀면 노포인 내호냉면이 대표적인 예다.
함경남도 흥남군 내호리에서 '동춘면옥'이라는 농마국수(함흥냉면)를 하던 일가가 부산으로 피난 온 후 1953년에 내호냉면을 개업했다. 내호냉면이 처음부터 밀면을 팔았던 건 아니라고 한다. 동네 신부님의 부탁으로 배급 밀가루에 고구마 전분을 섞어 면을 뽑아 주었다고 한다. 면 뽑는 삯만 받는다고 '삯국수'라고 불렸던 이 면이 부산 밀면의 시작이다.
내호냉면의 물밀면은 백령면옥의 반냉면과 닮아있다. 육수에 빨간 양념으로 맛을 더한다. 내호냉면은 밀면이고 백령면옥은 메밀면이라는 차이만 있다. 두 곳 모두 친근하고 소박한 맛이다. 내호냉면 본점은 재개발이 한창인 부산 우암동 주택가 골목에서 여전히 영업 중이다. 창업주가 유언으로 ‘솥은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고 했기에 가게를 옮기지도 못하고 앞집, 옆집으로 확장만 했다. 증축만 9번 했다고 한다. 내호냉면 본점 골목에 들어설 때면 옛이야기 속으로 향하는 기분이 든다. 시공을 초월한 맛을 만나러 가는 영화 속 주인공 같은 기분. 맛은 혀로만 느껴지는 게 아님을 내호냉면 골목에서 깨닫는다.
사라진 흔적을 지방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충주의 삼정면옥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100년 전 상징이 남아있다. 삼정면옥 입구에서 펄럭이고 있는 갈개발이다.
'갈개발'은 종이 연의 아래쪽 양 귀퉁이에 붙이는 종잇조각을 뜻하는 말이다. 여름과 함께 본격 냉면철이 시작되면 종로통 식당들은 이 '갈개발' 뭉치를 입구에 걸기 시작했다. 휘날리는 냉면 면발을 표현하는 갈개발이, '자~ 이제 냉면 팝니다~'라는 신호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냉면 신호 '갈개발' 뭉치가 충주 삼정면옥 입구에선 사시사철 나부끼고 있다. 사라진 전통이 입구에 걸려있는 충주 노포의 맛은 어떨까.
"서울 냉면집에서 일했던 분이 주방장이었어. 그분이 육수랑 면 뽑는 기술을 알려줬지"
서울의 어느 집에서 일하셨는지는 사장님이 기억을 못 했지만 음식을 제대로 배웠던 분인 건 확실하다. 맛이 보증을 하고 있다. 육수와 면의 조화는 서울 우래옥이나 유진식당과 유사하다. 맛있다. 충청도 특유의 구수하고 뭉근한 정서가 냉면에 녹아있다. 평양냉면도 좋지만 유진식당은 비빔냉면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 비빔장의 매운맛도 뾰족하지 않고 편안하다. 자세히 보면 다진 물고추가 비빔장에 섞여있다. 물고추를 베이스로 한 양념장은 메밀면의 은근한 맛을 가리지 않는다.
삼정면옥은 모든 메뉴가 서울의 것과는 미세한 다름을 가지고 있다. 소고기 수육을 말하는 편육은 잘 삶아진 사태살에 오이와 무 냉채가 얹혀 있다. 달콤한 겨자 소스가 뿌려진 삼정면옥의 편육은 서울 냉면 집의 편육보다는 중식당 오향장육과 더 가깝다. 서울 대부분의 냉면 노포들이 돼지고기 수육인 제육에 삼겹살을 쓰지만 삼정면옥은 전지살을 쓴다. 삼겹살처럼 단정하진 않지만 돼지고기의 고소한 지방맛은 삼정면옥의 제육이 한 발 앞선다. 지나치면 아쉬운 맛이다. 마지막으로 빈대떡. 삼정면옥은 녹두가 아니라 동부부침이다. 동부는 녹두와 비슷하지만 다른 종이다. 맛은 유사하고, 값은 더 싸다. 평양냉면 집에서 동부부침을 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넓적한 동부부침은 고소한 맛과 양에 가격까지 빠짐이 없다.
송추의 평양면옥에서 제주의 화순평양면옥까지 팔도는 넓고 평양냉면 맛집은 많다. 안성의 우정집 냉면이 2시간이면 재료 소진으로 문을 닫아버린다던데. 이번 주말은 아침부터 안성으로 가볼까나. 뜨거운 날씨야 덤벼라. 난 오늘도 평냉 생각으로 더위를 망각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