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따뜻한 생맥주 공동체, 금강산 호프

조PD의 맛있는 이야기

by 조승연 PD

초로의 남자 손님 혼자 4인용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테이블 위엔 생맥주 500cc 한 잔에 서비스 안주가 전부. 홀은 만석이고 가게 밖 대기줄은 깁니다. 유명한 집이거든요. 눈치 꽤나 보이는 상황입니다. 주인아주머니가 과일 몇 쪽을 혼술 중인 초로의 손님에게 가져옵니다.


"편하게 천천히 드세요"


세상에! 감동 또 감동. 대기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 편하게 드시고 가랍니다. 생맥주 한 잔 달랑시킨 손님에게. 서울 시내 한복판에 그런 집이 있답니다. 합정역 7번 출구 [그리운 금강산 호프]. 대기줄 안 서려면 낮술을 마셔야 하는 그리운 술집.

KakaoTalk_20250508_015730033_08.jpg 그리운 금강산 치킨&호프. 대부분 금강산 호프라 한다


"어디서 볼까?". "시간 되면 일찍 보시죠. 4시 어떠세요. 금강산 호프. 그래야 대기줄 안 서요"


프리랜서는 어중간한 시간을 야무지게 보낼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직장인이라면 일과를 빨리 정리하고 싶어 안절부절인 오후 4시.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낮술 한 잔 하러 갈 수 있죠. 금강산 호프로요. 이 때는 가야 줄 안 서고 입장 가능하답니다. 맛있는 안주가 가격도 착하다고 소문이 나서 손님들이 언제나 넘쳐나거든요.

KakaoTalk_20250508_015730033_12.jpg 가성비의 갑

'후라이드' 치킨 한 마리에 15,000원. 값만 쌀까요? 맛도 좋습니다. 꾸밈없이 바삭하게 튀겨 낸 정통 '후라이드' 치킨 맛은 힙한 젊은 친구들에게도 유명합니다. 후라이드 치킨을 필두로 미니족발, 골뱅이무침, 돈가스, 소시지야채볶음에 부대찌개도 포진하고 있죠. 배도 채우고 술도 마실 수 있습니다. 완벽히 한국적이죠. 심지어 멕시칸 사라다도 있습니다. 물론 메뉴판엔 '멕시칸 샐러드'입니다. 하지만 맛을 보면 알게 되죠. 이건 샐러드가 아니고 사라다임을. 제가 사랑하는 안주입니다.


"와! 잔치 때나 먹던 사라다가 여기에 있네. 정말 오랜만이다"

금강산 호프에서 만난 선배의 멕시칸 사라다 시식평입니다. 맞습니다. 멕시칸 사라다는 멕시코가 아니라 한국의 잔치 음식이 기원입니다. 80년대만 해도 돌잔치, 환갑잔치, 칠순 잔치 등 웬만한 행사는 다 집에서 치렀죠. 좁은 집에 일가친척과 지인들 모두 모여 먹고, 마시고, 지지고, 볶고. 이때 잔치 음식 3 대장이 갈비찜, 잡채 그리고 사라다였습니다. 삶은 감자, 당근, 달걀, 햄, 양배추. 땅콩 등을 마요네즈 듬뿍 넣어 비비죠. 마지막으로 건포도 솔솔 뿌리면 끝. 어찌나 고소하던지요. 갈비찜, 잡채, 전, 불고기, 조기찜 등 전통적 맛의 강자들이 즐비한 잔치상 위의 맛있는 이단아였죠.

KakaoTalk_20250508_015730033_01.jpg 멕시칸 사라다. 샐러드라고 하면 맛이 안 난다

멕시코에는 멕시칸 샐러드가 없습니다. 80년대 프랜차이즈 멕시칸 치킨에서 출시한 메뉴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잔치 음식 사라다를 응용했겠죠. 90년대만 해도 호프집 메뉴로 빠지지 않던 멕시칸 사라다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노포라 일컬어지는 호프집에서만 간간히 만날 수 있습니다. 그중 한 곳이 금강산 호프입니다.


이 집은 생맥주가 맛있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보기 드물게 신선하다고요. 당연하죠.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 생맥주 케그(생맥주통)의 회전이 빠릅니다. 게다가 마음씨 좋은 주인 내외분이 성실도 하답니다. 부지런히 생맥주 관을 관리하는 거죠. 생맥주가 뽑혀 나오는 관을 매일 청소하지 않으면 신선한 생맥주 맛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맛없는 맥주집의 십중팔구는 생맥주 관을 방치한 결과입니다. 기본에 충실하면 맛이 보장됩니다. 금강산 호프처럼요.


바삭한 치킨에 멕시칸 사라다 올려서 한 입하고 신선한 생맥주를 벌컥벌컥, 캬아. 이 맛입니다. 고소함에 고소함을 더한 입 속에 시원 쌉싸름한 황금빛 액체가 넘실댑니다. 행복합니다. 일상의 잔치가 열린 거죠. 문신으로 한 껏 꾸민 20대, 꼰대 욕에 여념 없는 30대, 전립선엔 소팔메토라는 중년에, 속 버린다고 천천히 마시라는 노년까지. 모든 세대가 500cc 생맥주를 앞에 두고 왁자지껄 하네요. 20대부터 70대가 공존하는 맥줏집, 제가 아는 한 금강산 호프가 유일합니다. 이곳만의 풍경이죠.


KakaoTalk_20250508_015730033_13.jpg


오후 6시면 만석이 되고, 줄을 서야 하는 이곳을 70대 주인 내외분 둘이서 운영을 합니다. 두 분이서 치킨 튀기고, 노가리 굽고, 과일을 썰죠. 꽤나 힘드실 텐데 늘 친절하십니다. 식어버린 생맥주를 앞에 두고 쉼 없이 떠들고 있으면 눈치 대신 서비스 과일 안주를 늘 두고 가시죠. 누구에게나요. 따뜻합니다. 외관도 낡았고, 인테리어도 볼 품 없지만 따스한 정서가 홀 안에 가득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주인 내외분은 눈치를 주지 않습니다. 한 번이라도 다녀간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알기에 이곳을 또 찾고, 기다리고 있는 거겠죠.


"80년대부터 한국에 생겨난 ‘생맥줏집’은 독일어 ‘Hof’에서 유래한 것이다. 독일어 ‘호프’는 ‘마당’이라는 뜻이며... 이웃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뒷마당’을 두는 건축양식을 가리킨다. 뒷마당에선 아이들이 뛰놀고, 볕이 좋은 날이면 이웃들이 한데 어울려 식사를 한다."(한겨레 21, 강정수 전문위원)


독일의 호프집 정의가 금강산 호프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네요. 금강산 호프는 소시민의 소소한 일상의 잔치가 열리는 공간이죠. 잔치 음식이었던 멕시칸 사라다가 그 증거라고나 할까요. 20대도, 70대도 한 곳에 모여 저마다의 사연을 지지고 볶으며, 먹고 마시는 곳. 주인 내외분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아무도 눈치 보지 않는 소시민들의 생맥주 공동체. 저는 금강산 호프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찾아보니 사전도 제 생각을 닮았네요.


공동체 : 공통의 가치와 정체성을 가지고 특정 사회문화적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버지와 변두리 냉면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