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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수 May 29. 2023

나답다

(아름답다)

인스타에서 봤다.

'아름답다'에서 '아름'은 '나'라는 의미라고. 그러니 아름답다는 말은 '나답다'는 말이라는.


내가 불교에 관심 가진 지 10년 정도 되었나?

종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의 엄마의 교육열 덕분에 기독교 초등학교를 다니며 점심 먹을 때마다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니 은혜로우신 하나님 늘 감사합니다~"

라는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고 점심도시락을 먹었다.

사춘기를 지나며 마음이 힘들 때마다 하나님을 찾았다.

주기도문을 외우며 하늘에 내 기도가 닿기를 바랐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기도가 잘 닿지 않아서 하나님이라는 대상에 화도 내고, 이렇게 화내서 기도가 안 이뤄지나 보다고 나 자신을 탓했다.


결혼을 하고 나에게 기독교는 그냥저냥 마음속의 종교로 남아 있다가 우연히 성당을 아이들과 가게 되었다. 그때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부모의 부재의 두려움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마땅한 합리적 이유가 없을 때 아이들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아주 적절한 대안이라고 생각을 해서 성당을 데리고 다녔다.

나는 세례를 받아 '루치아'라는 세례명도 받고 큰애는 마리아, 작은애는 소피아라는 소중한 세례명을 받았다. 대모와 대부의 축복을 받으며 세례식을 거행하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왠지 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도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줄 누군가가 있겠다는 믿음은 아이들의 정서에도 도움이 되는 듯했다.


그러다 내게 연타로 힘든 상황이 몰아칠 때였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난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 못 된 것일까?

예수님도 성모마리아 님도 나의 이 힘든 근원을 설명해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게으른 종교관도 문제였겠지만 근본적인 나 자신이 문제였다.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은 아무리 내가 매일 밤 기도를 한다고 바뀔 수 없는 문제였다. 

내 주변은 바뀔 수 없지만, 내 환경은 바꿀 수 없지만 난 이 힘든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금전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중년을 넘어가니 내가 미처 준비도 되기 전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밀어닥쳤다.

내가 흩어져서 없어져 버리는 느낌이 들어 이러다 죽지 싶어 내 오래전 친구가 있는 절을 찾아갔다.


한참을 친구 앞에 엎드려 울었다.

"그만 울어... 나 기도 갈 시간이야. 옆에 그냥 앉아 있어."

그렇게 불교와 인연을 맺고 이렇게 저렇게 시간이 흘러 내 나이 앞줄이 바뀌도록 다니다 보니 이제야 보이는 내 그림자를 나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

상황은 바뀐 것이 없지만 나를 바꾸어 갈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생각을 바꾸는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그래 벗어날 길이 있어."


나답기가 얼마나 힘든지.

무엇이 나고 무엇이 그림자인지 가끔 헷갈리지만 굳이 구별하지 않기로.

그렇지만 분별이라는 것은 무섭다.

무엇 때문에 기분 나쁘다 좋다는 분별이 나를 흔들어 댈 때 그게 나가 아님을 그러면서 그게 나임을 깨달을 때 그래 본래 나란 없다.

그러니 나답다도 없지만 애써 부인하면서 나다운 것을 버릴 것도 없다는 것.

이걸 인정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나는 아직도 참지 않고 버리지도 않으면서 순간순간을 살기를 연습한다.


이차부등식을 설명한다.

"모르겠는데요..."

"그래... 이 부분 어려워... 지난번에 설명한 것 어디까지 기억하지?"

"기억 안 나는데요..."

"2차 함수 그래프 그릴 수 있지?"

" 네 위로 볼록... x축은 어디다 그려요?"

" 판별식이 0 보다 큰가? 작은가? "

" 커요."

" 그럼 어떻게 그리라고 했지?"

" 두 군데 지나겠네요."

" 봐 너 알잖아 여기까지는..."


참을 것도 없다. 아이들은 그냥 생각하는 연습이 안되어 있을 뿐이다.

얘네들은 이 문제가 자기 인생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2차 함수 2차 부등식은 이 우주에서 나답게 만드는데 별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사소한 것에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며 진지하게 고민했는지는 앞으로 너의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감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순간순간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의해 나의 생각이 만들어진다.

내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 듣는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도 않고 해드셑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 주변 소리가 안 들리고 그냥 음악 소리만 들린다.


그래서 본래 없다고 한다.

너무 당연하지만 이 사실이 나를 너무나 편안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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