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黎明)

: 새벽 4시 48분

by 유영

새하얀 낮의 색은 다채롭다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을 만큼 촘촘하게 펼쳐져 있으면서도 어쩐지 이상하리만치 밋밋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밝음은 자주 친절한 척을 하며 다가왔고, 그때마다 그 친절에 기대어 하루를 밀어붙이는 날들이 늘어갔다. 빛이 충분하다는 이유로 마음까지 환해져야 한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듯한 표정들이 거리 위를 지나간다. 그 속에서 나는 자주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보이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정작 내 안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 알아차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도 내가 어떤 색의 인간인지 따위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나조차도.

종종 낮은 너무 정직해서 잔인하다. 많은 것들을 드러내야 하는 탓에 가진 보호막 위로 계속해서 새로운 천을 덧씌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감추고 감추고 또 감추다 보면 원래의 나는 그 무게에 짓눌려 질식하고 만다.


밤은 늘 검은 것으로 불렸다. 한 가지 색으로 보이는가 하면 다른 색들이 겹겹이 쌓여 층을 이룬 거대한 무지개처럼 보이기도 했다. 낮의 무지개에서는 스치듯 지나쳤을 색들이 밤이 되어서야 제자리를 찾은 듯 겹겹이 떠올랐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들은 어딘지 모르게 왠지 더 마음이 갔다. 낮에는 바깥이 나를 정의하는 일이 많은데 밤에는 내가 나를 정의할 수 있는 틈이라도 주어진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끝없는 회의처럼 울려 퍼지던 한낮의 소음. 그 회의를 얕게 만들어주었던 것은 한밤의 정적이었다. 어둠 속에서 표정을 지을 땐 느슨해진다. 애초에 흐릿했던 시선들은 그마저도 금세 내게서 눈을 돌리기 바쁘다. 조여 있던 숨이 길게 내려앉았다. 제 색을 되찾은 별들이 점점 더 또렷해져 간다. 밤은 가장 아득하게 화려한 낭만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그 어둠 속에서만 나의 색이 선명히 드러나기도 했다. 그간 낮의 색이 밋밋하게 느껴졌던 것은 너무 많은 색이 한꺼번에 번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점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 빛은 결국 서로를 덮어버린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빛이 가라앉고 나서야 남겨진 한 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무엇이든 한꺼번에 보이는 세계에서는 종종 중요한 것이 평범한 것처럼 보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평범한 것이 가장 눈이 부시게 빛나 보인다. 그래서 나는 밤을 좋아한다. 그 속에서 나를 닮은 별 하나를 건질 수 있어서. 어쩌면 나의 색을 확인하고 싶을 때마다 밝은 곳으로 달려가는 선택이 늘 정답일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닮은 별은 가장 어두운 시간에만 빛나고 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더해져 흰색이 되는 세계와 모든 것이 흡수되어 검정으로 가라앉는 세계 사이에서 나는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우리는 명확한 것들보다 애매함에서 더 강한 끌림을 느낀다. 끝도 아니고 시작도 아닌 곳에서 되돌릴 수 없는 실수들은 선명해지는지, 흐릿해지는지. 어쩌면 나는 흰색이 되고 싶었을지 모르고, 검정으로 숨어버리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빛은 결국 갈라지고, 색은 다시 흩어진다. 내가 찾던 나의 색은 낮과 밤 어느 한쪽이 아니라 모두가 뒤엉켜 잠시 멈춰 서는 경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새벽 4시 48분, 밤이 완전히 끝났다고 말할 수 없는 이 시간에 눈을 뜨고 말았다. 아직 어둠이 벽에 붙어 있고 창밖의 공기는 검은 기운을 버리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그렇다고 이 시간을 온전히 밤이라고 부르기에도 어딘가 어색하다. 어둠은 뒤로 밀려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빛은 아직도 제 이름을 얻지 못한 채 기척만 남기고 있었다.

창문 밖은 아직 어둡고 방 안은 조용하다. 소음이 줄어든 세계에서는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나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가려졌던 감각이 늦게서야 표면으로 올라온다. 빛이 오기 전에는 경계가 흐릿해지며 사람은 보다 솔직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진실되고,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주 잔인하게 찌르면서도, 때로는 이상하게 낭만적인 모순된 감정이다. 이 시간의 고백은 늘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고백이 왜 유난히 더 무겁게 느껴지는지는 모를 일이다. 창문 틈 사이로는 아주 엷은 빛이 번지고 있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나를 덮칠 빛이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이 빛이 나를 어디쯤에 세워둘지, 그 찰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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